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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여사가 1894년부터 4차례에 걸쳐 조선국을 방문하는 모험심은 참으로 본받을 만하다. 비행기도 없었던 시절에 54세의 할머니가 극동의 아주 작은 나라(그것도 망해가는) 조선을 보기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배 멀리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감동적인 모험담이 아닐 수 없어서다. 그 비숍 여사가 조선방문을 결산하면서 쓴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을 읽노라면 당시 참담했던 조선의 여러 정황에 대하여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또 잘 못 기록된 곳이 없지는 않지만 조선의 여러 참상이 그대로 외국에 소개된 것이 다소간 부끄럽기는 하더라도 그러한 모습들이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역사기술을 대신한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비숍여사의 모험심이 우리에게는 시사 하는 바가 너무도 크다.
모험심은 꿈을 만드는 씨앗이다. <톰 소야의 모험>은 세계의 수많은 유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일에 기여하였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을 실현하게 해 주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우리의 고전에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담헌 홍대용의 <담헌일기>와 같은 외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문헌들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은 선비들이 읽는 서책일 뿐, 자라나는 유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책과는 무관하였다.
반대로 일본국의 근대화를 이끌어내는 기본 사상은 젊은이들의 모험심에서 발단되었다. 4백여 년 전 큐슈 북단 나가사키長崎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집단 수용하는 데지마出島라는 아주 작은 인공의 섬이 있었다. 생각이 깊고 뜻이 있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이 데지마로 달려가 네덜란드 상인들을 만나고 싶어 하였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관헌들의 눈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脫藩하였고, 나가사키에 스며들었다 하더라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네덜란드 문화와 접촉할 수가 없었다. 그런 모험심이 모여서 유럽(네덜란드)문화를 배웠고, 그 학문적, 문화적인 성과를 통칭하여 ‘난학蘭學’이라고 하였다. 후일 일본국 근대화의 표상인 명치유신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선각의 지도자는 모두가 이 ‘난학’과 인연을 맺은 지식인들이었다. 바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일본의 젊은이들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밤바다를 조각배로 헤치면서 미국 군함에 올라타서 ‘나를 미국으로 데려다 달라. 당신들의 문명을 배우고 싶다.’고 외칠 수가 있었다. 이들의 꿈이 마침내 명치유신을 이끌어내는 활력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청소년 교육에서 삼강과 오륜을 강조하면서 인성도야에 주력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을 까닭은 없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모험심을 길러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회한이 남는다. 바로 그런 조심 제일주의 가풍이 신문물에 대한 꿈과 모험심을 배제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Hendrik Hamel(?~1692)이 동료 선원 38명과 함께 일본국 나가사키로 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 1653년, 효종 4년이다. 이들은 잠시 제주관아의 보호를 받다가 다음해 봄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미 조선 이름으로 살고 있는 네덜란드 사람 박연朴燕의 확인을 받기 위해서다. 이 후 하멜과 38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은 여수, 순천, 남원 등지의 병영兵營에 감금되어 14년을 살다가, 1666년(현종 7)에 하멜 등 8명은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다. 그들이 잠시 일본에 머물다가 네덜란드에 돌아가 조선에 체류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적은 책이 저 유명한 <하멜 표류기>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일이 있다. 하멜 등 38명이 장장 14년 동안 조선에서 살았는데, 어찌하여 이들로부터 네덜란드 말은 배웠다는 조선 젊은이가 없고, 당시의 조선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었던 서양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젊은이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국운國運과 비교한다면 비극일 수밖에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이야기지만 하멜이 조선을 탈출할 때 한 두 사람의 조선 젊은이가 따라나섰다가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귀국하여 경이적인 유럽문화를 조선에 전파한다. 그 죄가 혹세무민이라 하여 목숨을 잃는 비장한 풍경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애틋한 노릇이겠는가. 바로 그런 풍경이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꿈浩然之氣을 심어주면서 새로운 국운을 몰아오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때를 너무 오래 전이라고 한다면 좀 가깝게는 조선 개화기의 거문 도사건巨文島事件을 살펴 볼 수도 있겠다. 1885년(고종22년) 4월 15일에 영국함대가 전라남도 앞바다에 있는 거문도를 강제점령한 일대불상사가 있었다. 당시 아시아의 여러 사정은 영국과 러시아의 각축전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한·러 밀약설이 파다하게 나돌면서 영국의 동양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면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는 파렴치한 사태였다. 이에 당황한 러시아가 청나라의 이홍장을 통하여 조선의 어느 곳도 점령하지 않겠다고 확약을 하였다. 이 사실을 통고받은 영국함대는 1887년(고종 24) 2월 27일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거문도에서 전라남도의 해안까지는 불과 40킬로미터 정도의 가까운 거리다. 이때도 하멜과 친분을 두터이 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없었던 거처럼, 거문도로 건너가 영국의 군함을 비롯한 서양의 문물을 체험하려는 젊은이가 없었다는 사실은 회한보다 비애를 느끼게 한다. 더 심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이 하던 일은 왜 조선의 젊은이들이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젖게 된다.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교육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교육은 꼭 학교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도 자녀들의 성장을 도우면서 알게 모르게 꿈을 심어주어야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저 푸는 하늘을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행하려 하지 않는다.
도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불행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초당 신봉승 선생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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