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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외무성 부상 김계관을 맞은 뉴욕은 흡사 북.미 수교 전야의 들뜬 분위기(Euphoria) 같다. 미국외교정책협의회가 주최한 세미나에는 전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비롯해서 한반도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해 큰 성황을 이뤘다. 특히 김계관은 키신저와 만난 것을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원래 김계관-힐 회담은 2.13합의에 따른 북.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실무협의를 위한 것이다. 실무협의는 북한이 취하는 비핵화 조치의 단계에 맞춰 미국이 취할 대응조치를 논의하는 자리다.
북한이 취할 비핵화 조치의 핵심은 영변 핵시설의 폐쇄.봉인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복귀, 핵연료봉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을 포함한 모든 핵프로그램의 목록을 공개해 다른 참가국들과 협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회담을 마친 김계관과 힐의 발언과 표정을 보면 북.미 회담 대표들은 1단계 조치에 대해서는 회담 벽두에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고 다음 단계까지 논의를 진전시켜 북한이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라는 북.미 관계 정상화 문제까지 들어갔다. 김계관은 연락사무소 설치의 단계를 뛰어넘어 바로 수교하자고 제의한 모양이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과의 수교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으로는 국제사회의 경제지원을 받는 확실한 생존과 번영의 수단이다. 북.미 수교에서 평화협정 체결까지는 열 걸음도 안 된다. 북한이 먼저 고농축우라늄(HEU) 신고 의사를 밝힌 것도 북한이 미국에 보이는 호의적인 제스처다. 고농축우라늄 문제는 2002년 10월 제2차 핵위기를 촉발한 마물(魔物)인데 2.13합의에는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어 부시 정부가 비판을 받았다. 북한은 자진해서 부시 정부의 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북.미 수교 전야 같은 뉴욕의 분위기를 전해들으면서 우리는 갈등을 느낀다. 북.미 관계 정상화는 한반도 평화의 핵심 조건이다. 그리고 지금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남북.북미.북일.미중 간의 활발한 대화.협의와 후속 6자회담.장관급회담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냉전의 잔재를 걷어내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필요한 과정들이다. 부시가 대북 강경노선을 신사고(新思考) 외교로 전환하고 북한이 거기 화답하는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우리는 조속한 북.미 화해를 바라면서도 화해의 과속을 불안해 하는 모순에 빠진다. 북.미 수교는 미국의 북한 핵무기 포기에 대한 최대의 반대급부다.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면 일본도 서둘러 평양행 버스를 탈 것이다.
핵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과의 수교를 달성한 북한이 핵 포기의 종착역에 이르는 나머지 여정을 끝까지 갈 것인가. 그건 아무도 모른다. 갈 수도, 안 갈 수도 있다. 다만 북한으로 하여금 거기까지 가게 만들어야 하고 만들 수 있다는 자세와 인내심을 갖고 협상을 하는 것이다. 북한이 핵 포기의 약속을 어겨도 미국은 직접적인 안보 위협을 받지 않는다. 한국은 다르다. 미군한테서 전시작전권까지 거둬들여 한미연합사가 해체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북한이 확실한 핵 보유국이 되면 남북관계의 고비마다 한국은 북한의 핵공갈에 노출될 것이다. 북한의 핵 폐기에 앞선 북.미 수교는 미국이 설정한 핵저지선(Red line)을 '핵 불용(不容)' 에서 '확산 불용'으로 후퇴시키는 데로 연결될 위험이 있다.
이라크의 수렁에 빠진 부시정부는 갑자기 북핵 문제 해결을 서두르는 인상을 준다. 북한도 부시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전략을 바꿔 부시 임기 안에 수교까지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다. 그것 자체는 반대할 일이 아니다. 2.13합의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의 큰 이정표니까. 그러나 2.13합의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감지되는 대북 정신적 해이(Moral hazard)를 경계해야 한다. 북핵 폐기에 앞선 북.미 수교는 말 앞에 마차를 세우는 어리석은 조치다. 국제적인 약속을 잘 어기는 북한의 과거 행태로 보아 마차(북.미 수교)가 말(핵 폐기)을 끌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2007.3.9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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