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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문예>> 게재 徐之文칼럼 12편
서지문   |  2007-05-03 06:56:17  |  조회 3817 인쇄하기
깨끗한 정, 더러운 정

감수성 많은 문학소녀시절, 가끔 소설 속에서 ‘멀쩡한’ 여자들이 이기적이고 비열한 남자에게서 정을 떼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면서 신세를 망치는 이야기를 읽으면 너무 안타깝고 속이 상했다. 현실에서도 남편에게 속고 매 맞고 학대받는 여자가 남편을 원망하며 신세한탄을 하다가도 남편이 얽힌 분쟁 같은데 이야기가 미치면 금방 그 남편을 세상에서 제일 양심적인 사람인양 두둔하는 것을 보면 딱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어렴풋하게 그것이 성적인 의존도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면서부터, 무가치한 남성에게서 정을 떼지 못하는 것을 여자로서 가장 큰 불명예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나중에 비열한 인간에게 애정을 구걸하고 싶어진다면 차라리 자살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자대학을 다녀서 남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적었고, 그 시절은 남녀교제가 자유롭지 못해서 성격이나 인품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상대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래도 어쩌다가 ‘데이트’를 하게 되면 늘 그의 ‘매력’에 눈멀어 이성적인 판단을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심을 갖고 임했다.
경계심 때문이었는지 직감이 발달해서였던지 나는 이성과 교제를 하게 되면 몇 번 만나기도 전에 그 사람의 결함을 감지하게 되고 그러면 그에 대해서 가졌던 낭만적인 환상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곤 했다. 나의 센서는 치사함이나 비열함은 물론 남자의 이기심, 허영심, 자기도취도 쉽게 포착해 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낭만적인 환상이 내 눈을 멀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축했는데, 차츰 나의 예리한 촉각으로 인해서 내 인생이 상당히 허전해 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소위 ‘콩깍지’라는 것은 콘택트렌즈처럼 마음대로 씌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잠시 ‘깨끗한 정’을 몇 번 느껴보았을 뿐, ‘더러운 정’이나 ‘미운 정’은 느껴보지를 못하고 반 쪽 삶만 살 수 밖에 없다. (다행이도 나는 여자 동료나 어린 학생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포용적인 편이다.)
그런데 나의 예민한 직감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독신생활에 익숙하고 일에 짓눌려서 고독을 느낄 겨를조차 없게 되었을 때여서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은근히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퇴근해서 내 몸도 주체하기 힘 드는데 신경 쓰고 챙겨주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 내 생활에 간섭하고 이것저것 요구하고 이래라저래라 지시할 사람이 없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하고 마음 편한 일인가.
그래도 일생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싶은, 가슴 아프고 가슴 떨리는 사랑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고, 문학도로서 ‘결격사유’라고 까지 생각될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남편 문제로, 자녀 문제로 여러 가지 고민도 해보지 않았고 매일 사소한 상처도 입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폭 넓은 인간애를 터득하지 못하고 매우 편협한 인간으로 머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주위의 결혼한 사람들을 보아도 정말 포용력 있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은 백 명의 한명도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결혼이 반드시 도량을 넓혀주는 것은 아닌 모양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제는 한국여성들도 활발히 사회진출을 했고 자기성취를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미운 남편이라도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미운 정’에 매달려 살지 않는다. 이혼이 사회적 파멸도 아니고 재혼도 어렵지 않으니까 성적인 상대가 오로지 남편뿐이라서 미워도 남편의 애정을 구걸하면서 사는 여성도 거의 없다. 그러니까 여성이 악질적인 남성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 선천적인 어리석음이나 충분히 진화 못한 유전자 탓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남의 결함을 너무 냉정하고 엄격하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너무 깨끗한, 때 묻지 않은 정만 간직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황우석씨의 지지자들처럼 진실을 받아들이기를 결사적으로 거부하고 ‘착각’에 매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큰 어리석음이고 국가적인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작금의 사태에서 깨닫게 된다. 우리 모두 가족 친지, 동료, 부하의 결함은 널리 포용하되 사기꾼, 범죄자에게 집착하지는 않는 현명함과 성숙함도 아울러 가졌으면 좋겠다. (2006년 4월호)

민주적 삶, 고상한 취미

교양은 민주시민의 자격요건 중의 하나일까, 아닐까? 교양을 쌓는 것은 민주시민의 의무일까, 아닐까? 혹시 우리 중에 민주시민의 도리에 어긋날까봐 취미도 서민적인 것만 가지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인문학계의 원로교수가 20년간 꾸준히 학생들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조사했는데,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학생들이 적어 내는 책들이 “까라마조브의 형제들” 이라던가 “청춘은 아름다워라”, “폭풍의 언덕” 같은 자타가 공인하는 고전이 주종을 이뤘는데, 한 10년 전부터는 다수의 학생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등 그 선생님이 접해보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을 적어낸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감명 깊게 읽는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 위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사서 읽어보니 이는 문학작품이 아니라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는 허섭쓰레기이더라고 말씀하셨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오만하게 들리는 말일 수도 있겠다. 서양의 속담에도 ‘남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간섭하고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취향을 보고 그의 인격과 품성을 짐작한다. 음란만화를 탐독하거나 남을 공연히 비꼬거나 깎아내리고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을 인격자로 대우할 마음은 쉽게 일지 않을 것이다.
취향은 단기간에 배양하거나 인위적으로 주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취향은 가치관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취향은 그 사람의 생존을 위한 활동을 제외한 모든 부분의 삶을 (실상 많은 경우는 생존방식 까지도) 지배하고,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을 때 어떤 활동을 하는가를 결정한다. 취향은 즐겨하는 활동을 통해서 심화되고 세련되어 진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취향이 향상되고 고매해 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지만 취향이 비속해 진 사람은 자신에 대해 긍지를 느끼기가 어려울 것이다.
밀도 높은 문학작품을 읽다가 대중적인 작품을 읽으면 싱거워서 영 재미가 없다. 도스토예브스키의 “카라마조브의 형제들”은 읽는 동안 독자의 전 존재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냥 가상의 등장인물들 중에서 누가 진짜 부친을 살해했으며 누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형(刑)을 받게 되는가하는 궁금증을 넘어 선, 무한히 깊고 복잡하고 비열하고 숭고하고 나약하고 강인한 인간의 내면을 속속드리 탐험한 희열과 만족을 준다. 러시아 대륙보다도 광활하고 깊고 황폐하고 무시무시하고 뜨겁고 고결한 인간이라는 대륙 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긴장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마칠 때에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은, 새로운 눈과 새로운 영혼을 얻은 것 같은 신비감을 준다.
이런 작품에 비하면 아무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탐정소설이라도 싱겁다. 탐정소설을 읽으며 자기의 온 생을 돌아보고 자신에 대해 쓰라린 자성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빈치 코드”를 읽고 나서 새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의 교양과 도덕성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또 불가사해한 일이다. 교육도 별로 받지 못했는데도 소박하고 너그러운 사람을 보면 교양인으로 자처하면서도 이기적인 충동에 자주 휘둘리는 자신이 몹시 부끄럽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교양과 윤리수준에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있다.
우리는 모두 독특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은근히 자신을 지극히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신적인 귀족이 되려는 노력을 별반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범속한 취향을 정신적 ‘겸허함’으로 간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나친 물질적인 부를 누리는 것은 비민주적인 것이 될 수 있어도 정신적으로 풍요한 내면의 세계를 갖는 것은 결코 비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양을 쌓을 만한 여건을 갖춘 사람에게는 가능한한 최고의 정신적 귀족이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먼저 향상해서 우리 당대와 후대 국민들의 정신적 수준을 끌어 올린다면 우리는 그만큼 민주주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높은 민도의 토대위에서 가장 굳건히 유지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지만 피 만으로는 충분한 양분이 되지 않는다. 교양의 거름이 있어야 민주주의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 (2006년 5월호)

苦中樂

나는 ‘고중락’이라는 표현을 매우 철학적인 상황에 쓰이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재작년에 북경에 몇 달 머물던 중에 바로 이웃 도시인 티엔진(天津)을 방문했을 때 ‘고중락’의 진수를 일별했다. 티엔진의 도시역사박물관에는 티엔진의 역사와 내력, 그리고 옛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전시의 거의 마지막쯤에, 어느 해에 홍수로 가옥이 완전히 침수된 도시의 골목길에서 어른 허벅지까지 차오른 흙탕물에 예닐곱 살 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세숫대야 속에 앉아서 마냥 즐거운 얼굴로 물놀이를 하는 사진이 있었다. 양 쪽에서 대야를 붙들고 있는 어른들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사진 설명은 단순히 ‘苦中樂.’
그것은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물난리가 나서 가난한 살림살이가 모두 침수되었고 허술한 가옥도 붕괴위험에 처했는데 아이를 세숫대야 보트를 태워주며 쓴 웃음이 아닌 티 없이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낙천성은 진정 축복으로 느껴졌다. (중국도 요즈음은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변했지만 서민들은 아직도 정말 소박하다.) 한국에서는 홍수 이재민이 웃음을 되찾으려면 아주 여러 날이 필요할 것이다.
그 박물관에는 또 말로만 듣던 위방(危房)의 사진도 있었다. 위방이란 말 그대로 위험한 가옥인데 삼십년 전에는 중국의 서민 대부분이 위방에 살았고, 아직 벽촌에는 위방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부엌, 거실, 침실을 모두 겸한 단칸방인데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좀 넓은 판자 선반을 매고 그 위에서 사람이 자게 되어있는 집이었다. 아래의 허술한 침대에서는 부부가 자고, 그 윗쪽으로 장정 한 사람만 올라가도 떨어져 내릴 것 같은 선반 위, 천정까지 1미터도 못되는 공간에서 장정 서넛씩도 잤다고 한다. 물론, 선반이 떨어져서 위, 아래에서 자던 사람들이 모두 변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작년에 중국 TV에서 ‘위방’에 사는 가족의 드라마가 매우 인기리에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이 ‘위방’에 살던 시절의 애환을 반추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중국식의 ‘위방’은 없었지만, 우리도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나 무너져가는 아파트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 있다. 요즈음도 부실 연립주택이나 반 지하실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주거공간을 떠올리면 ‘양극화’라는 단어가 즉각 상기되고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탄과 울분에 가득 찼을 것으로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도 20-30년 전만 해도 ‘서민의 애환’이라는 것이 풍성하게 있었다. 오늘 날에도 물론 단칸방에도 가족애가 있었고 작은 즐거움, 감격과 행복이 있겠지만, 어쩐지 순수하고 소박한 즐거움이 이제는 모든 계층에서 절대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직감으로 느끼고 있다.
무엇이 우리에게서 소박한 즐거움을 빼앗아갔을까? 서민들은 가난을 타고난 운명으로 여기기보다 사회구조의 탓, 가진 자의 탐욕과 착취의 탓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서민’이 아닌 중산층, 심지어 상위계층도 자신의 비교적 풍요를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가난을 감수하지 않는 자세는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가난을 ‘분복’으로 여기지 않고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뭉쳤기 때문에 우리의 국민소득이 1만 6천불 이상까지 향상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과 함께 민주화도 급격히 진행되어서 이제는 서민도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게 되었고, 공권력의 횡포는 더 이상 묵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행복’은 아직 더 가까이 온 것 같지 않다. 아니 조금 더 멀어졌는지도 모른다. 모든 국민이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그 날부터 행복은 ‘물 건너 간’ 것이 되고 만다. 지금, 강남의 집값이 하늘로 치솟고 있는데, 의외로 강남사람들은 별로 행복해하지 않는 것 같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 동네는 집값이 별로 안 올랐다던가 엄청난 보유세를 어떻게 감당할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울상을 짓는다. 나머지 국민들로 말할 것 같으면 자기 집 값이 내린 것은 아니지만 나라 한 귀퉁이에 자고나면 몇 억씩 더 부자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 그냥 불행해지고 있지 않은가 싶다.
세계에서 국민이 가장 행복한 나라가 방글라데시라고 한다. 힌두교도들과 같이 가난도 압제도 ‘업보’로 받아드리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1만6천불을 갖고도 200불 짜리의 행복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생의 현명한 경영자가 못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가 나날이 거칠고 살벌해지는 것은 우리가 작은 행복을 음미하며 작은 행운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2006년 6월호)

흥부 팔자, 놀부 팔자

작년에 있었던 한 세계문학 포럼에서 안숙선명창이 “흥보가”의 한 대목을 불러서 좌중을 매혹했다. 그 때 옆 자리에 앉았던 어느 외국인 석학에게 “흥보가”가 악한 형이 벌을 받고 착한 아우가 복을 받는 이야기라고 설명해 주었더니, 놀부가 흥부의 아내를 빼앗으려 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놀부가 뭐 대단한 악당도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동양적 선악의 개념과 서양적 선악의 개념의 차이에 새삼 놀랐다.
가난에 찌들고, 무능한 남편에게 끝없이 잔소리하기에 지쳤고, (상이한 판본에 따라) 10명인지 12명인지 19명인지 29명인지의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뼈골이 다 휘었을 흥부의 아내를 성적인 탐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에는 매우 기이한 일이다. 그보다도 놀부가 아무리 악한이라도 자기 동생의 아내를 성적으로 탐낸다는 것은 우리의 정서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어서 소설에도 등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서양 문학의 ‘악한’은 대개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이기적일 뿐 아니라 성적으로 위협적인 존재이다.
놀부의 심술과 비행 속에는 성적인 성격의 것도 있기는 하다. ‘경판 25장 본’에 의하면 놀부는 부모의 전답을 홀로 다 차지하고 흥부를 내쫓았을 뿐 아니라 당시에 파렴치한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비행을 저지른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초상난 데 춤추기와, 불붙은데 부채질하기, 해산한 데 개닭 잡기, 장에 가면 억매(抑賣) 흥정하기, 집에서는 몹쓸 노릇하기, 우는 아이의 볼기 치기, 갓난아이에게 똥 먹이기, 무죄한 놈 뺨 때리기, 빚값에 계집 빼앗기, 늙은 영감의 덜미 잡기, 아이 밴 계집의 배 차기, 우물 밑에 똥 누기, 오려논에 물 터놓기, 잦힌 밥에 돌 퍼붓기, 패는 곡식 이삭 자르기, 논두렁에 구멍 뚫기, 호박에 말뚝 박기, 곱사장이 엎어 놓고 발꿈치로 탕탕 치기” 등이 그의 어마어마한 이력이다. 한말(韓末)의 명창 신재효 본에는 훨씬 더 여러 가지 끔찍한 심술이 한 페이지 넘게 열거되어 있다.
빚값에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면 봉건시대에는 극악무도한 범죄이다. 그러나 아무리 놀부가 고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초인이 아니고서야 위의 범죄행위(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범죄행위이다)를 전부 저질렀을 수는 없을 것이고, 만약 저질렀다면 결코 무사했을 수가 없다. 무슨 높은 벼슬을 살아서 권력이 막강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부모에게 물려받은 전답으로 무위도식하는 놀부가 임산부를 발로 차서 낙태를 시켰다던가 패는 곡식의 이삭을 잘랐다면 일찍이 관가에서 잡아들였을 것이다.
그래서 놀부의 심술 내지 비행의 목록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희극적인 효과를 위한 과장기법이다. 이런 터무니없고 기상천외한 사설(辭說)은 판소리의 독특한 재미이다. 예전에 어느 외국여성과 흥부가의 판소리공연을 듣다가 이 대목에서 마구 웃었더니, 그 외국여성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인간에 대해서 웃음이 나올 수 있느냐고 한편 분개하고 한편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어마어마해서 사실일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여성은 못내 석연치 않아했다. 놀부가 아무리 악당이라도 동생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은 것으로 묘사될 수 없는 이유는 그렇게 된다면 너무 심각해져서 더 이상 희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작년의 문학포럼에 참가했던 석학은 그렇게 무기력한 흥부를 찬양할만한 인간형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민중들을 가난 속에 묶어 두려는 음모가 아니냐고 물었다. “흥보가”에 그런 음모가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놀부를 찬양하는 것이 어떤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 흥부형 인간이 절대다수였다면 나라는 편안했겠지만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놀부형 인간이 다수였다면 물론 나라는 몹시 불편하고 사회는 흉흉했을 것이다. 놀부의 탐욕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 욕망은 놀부 류의 탐욕이나 심술과는 근본적으로 매우 다른 성취욕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대부분 아직 가난했으나, 가난을 벗으려고 몸부림치던 60년대 말에는 “우리는 흥부를 찬양하지 말고 놀부를 본받아야한다”고 외쳤던 사상가가 있었다. 그러나 “흥보가”를 실지로 읽어보면 흥부보다도 어리석은 인간이 놀부이다. 무수한 비행을 저지르고 돌아다니느라 흥부보다 더 부지런히 뛰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파산과 파탄은 오로지 그의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것이다.
비록 선량하지만 흥부의 무능력과 나약함은 바람직한 모방의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흥부가 보은의 박씨를 받는 일이 매우 드물지만 세상이 놀부가 승승장구할 만큼 허술한 곳도 아니다. 선의를 멸시하고 탐욕을 칭송하는 어리석음은 흥부의 무능보다도 더 큰 화를 부른다. (2006년 7월호)

승부차기 없는 인생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육영사업가에게 “사람은 어떤 것을 즐길 때 자기가 왜 그것을 즐기는지 알고 싶어 한다”고 말했더니, “아니, 즐기면 그만이지 왜 즐거운지는 골치 아프게 따져서 뭐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사람은 왜 사는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살 수 있고, 어떤 일을 왜 즐기는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즐길 수 있다. 어쩌면 왜 사는지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출세나 치부를 인생의 성공으로 본다면) 더 잘 살 수도 있고, 왜 즐기는지를 모르면서도 (탐닉이나 몰입을 즐김의 척도로 본다면) 더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자신이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왜 즐기는지 알고 싶은 욕망, 알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직성이 없다면 인문학은 탄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왜 즐거운지는 골치 아프게 따져서 뭐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은 육영사업가로서 자격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인생의 모든 미스테리를 규명하며 사는 변변한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다. 천체물리학, 양자역학, 생명공학 등 대부분의 첨단 현대 과학이 나를 석기시대인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반도체의 원리는 나에게는 마술,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가끔 인터넷이 안 되거나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면 짜증이 나려다가도 나 같은 백치가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황송한 일이냐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는 태어나서 수레의 원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컴퓨터 게임을 하며 인공지능의 전자제품들을 쓰며 자라는 어린이들에게는 ‘신’이 바로 인공지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행하게도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즐기는 것이 다양하지 못하다. 무엇이건 반드시 왜 즐기는 지를 규명해야만 즐길 수 있는 철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고, 재능도 없는데다가 여러 가지 오락이나 여가활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모든 결핍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소중한 문학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취미와 여기(餘技)가 있었더라면 내 인생은 좀 더 풍성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취미생활에서 생의 활력을 얻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편이지만 운동경기 관람은 저급한 쾌락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2002년도 월드컵 열기의 와중에서 축구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축구가 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우수한 팀들 간의 축구는 신바람 나고, 화려하고, 아슬아슬하고, 어이없는 이변과 현기증 나는 반전으로 보는 사람의 넋을 뺏는다. 그림 같은 해트트릭이나 통쾌한 중거리 슛, 기막힌 쐐기꼴이나 절묘한 합작 꼴을 볼 때는 축구는 분명 예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스포츠맨쉽의 화신이어야 할 세계적인 선수들이 거친 태클로 쓰러뜨린 상대편을 짓밟기도 하고,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헐리웃 액션까지 하는 것을 볼 때는 축구마저 더러운 인간사의 하나라는 생각에 일말의 서글픔도 인다.
나에게는 축구경기에서 가장 숨 막히는 순간은 단연 승부차기의 순간이다. 2002년, 홍명보선수의 다섯 번 째 승부차기가 성공한 순간의 그 환희와 감격을 무엇에 비하겠는가? 이번 월드컵 8강전에서 승부차기에 패한 독일, 결승전에서 승부차기에 패한 프랑스 팀을 비웃을 수 있는 냉혈한도 있을까? 우리도 젊었을 때는 승부차기에 우리 인생을 걸 자세가 되어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용기가 없다. 축구의 승부차기는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메꾸어 가고, 월급 받는 직장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사는 우리에게 짜릿한 위기감과 함께 진부한 우리 생에 대한 안도감을 함께 준다.
이 뻔한 분석으로 축구의 즐거움을 대강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10일 새벽의 결승전에서 규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미스테리가 발생했다. 일년에 380억원인지 얼마인지 하는 세계 최고의 연봉이 아깝지 않은 선수라고 경탄했던 지네딘.지단이 왜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의도적인 반칙을 해서 퇴장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했을까? 치밀어 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할 애송이도 아닌 백전노장이?
지단이 마테라치 선수 일 개인을 그에게 잠시의 고통을 주기 위해 자신의 명성과 조국의 승리를 포기할 만큼 증오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프랑스 팀을 보면 대부분의 주전멤버들이 유색인이다. 그래서 프랑스 국민은 월드컵에서 프랑스 팀이 승리하면 정말 프랑스의 승리로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것은 나의 인종편견이 아니고 프랑스인들의 고약한 인종차별이 가증스러워서이다. 어쩌면 의도적일 수도 있는 지단의 자해행위는 지극히 ‘귀하신 몸’이면서도 그라운드 안에서, 밖에서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인종차별에 대한 항의가 아니었을까? 마테라치가 입밖으로 낸 욕설은 인종적인 모욕이 아니었다 해도 지단이 그를 그런 극단적 방법으로 고발한 것은 그가 악질적 인종차별주의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지단이 그 엄청난 도발행위로 동시에 의도적으로 프랑스의 우승을 차단했다 해도 비난할 마음이 없다. 지단은 불행을 자초했지만 그의 불행을 딛고 살벌할 뿐 아니라 비열하기까지 했던 축구경기장이 진정한 스포츠맨쉽이 빛나는 신사적 대결무대로 거듭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6년 8월호)

無識의 허용한계

일전에 영문학 박사인 40대 초의 어느 후배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인 보길도에 갔다 왔다는 말을 했더니 고산 윤선도가 누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탁 내려놓고 일어나서 나오고 싶었다. ‘이렇게 무식한 사람과 한담을 나누는 것은 순전한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우리가 어떤 사무적인 용건이 없는 사람과 만나서 식사도 하고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물론, 그에게서 무엇을 배우겠다는 계산에서가 아니고 그저 인간적인 유대를 쌓기 위해서이지만 그런 시간이 즐겁고 유익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알고 깨닫게 되는 것이 있어서이다. 물론, 상대편이 나에게서 유익한 정보를 얻고 안목과 세계관을 터득했다고 느끼게 될 때에도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아주 어린아이를 만날 때에도 실상 우리는 그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면서 동시에 어린이의 의식세계라던가 어린이의 관점 같은 것을 터득하게 되어서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헤어지고 나서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로 말하자면 물론 그는 영문학자의 필수지식은 아니다. 그러나 비전문가에게는 사소하달 수 있는 그런저런 지식들이 우리의 내면을 풍성하게 해 주고 그 속에서 삶의 지혜 같은 것도 우러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뇌 속에 필수지식 말고는 공백인 사람이라면 그 내면의 빈곤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예전에 타임지에서 이런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남자들이 젊은 여자를 좋아해서 소녀들과 바람을 피우는 현상에 대해서, 어떤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젊고 육체가 싱싱한 것은 좋지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여자와 어떻게 대화를 하느냐?고 했다는. 만나서 교제하는 동안 ‘문화적’ 대화의 주제가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연인들의 결합이 얼마나 단단할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어떤 사람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인 딸이 둘인데 고등학생인 딸은 “한반도”라는 영화제목을 보고 ‘한반도가 어디 있는 섬이냐?’고 물었다고 하고, 대학생 딸은 ‘중공군’이 어느 나라 군대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0교시 수업과 야간수업까지 하면서 공부에 시달리는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한반도’나 ‘중공군’에 대해서 배우지 않는 대신에 습득하는 지식이 정말 우리 삶에 얼마나 필수적인 지식일까? 그것이 과연 ‘한반도’나 ‘중공군’ 보다 더 절실히 알아야하는 지식일까? 생각하면 걱정된다.
프린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 (Knowledge is power)라고 말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지(認知)는 가장 고급의 쾌락이다”라고 말했다. 나의 청춘에 무한한 영감이 되었던 것은 후자,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는 ‘실용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문학을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문학도이기 때문에 가난은 숙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고귀한 감동과 희열을 주고, 나에게 인생을 공허하지 않고 의미있게 만들어 줄 학문이어서 연마하면서 오로지 감사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더욱 실감한다.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인적자원을 잘 배양했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고등교육을 받은 인력이 선진 기술과 학문을 도입해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고, 이제는 우리가 발전시키고 개발한 학문, 기술을 세계에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은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의 사회경제적 손실의 계산법까지 나온 모양인데 (아마도 그런 질환으로 인한 업무수행 장애의 비용을 계산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앞으로는 문학이 인간심성의 황폐화를 막는 효용도 계산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고 계산할 수 있다면 그 경제적 가치가 막대함이 판명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상식’이나 ‘소양’이 내면의 풍요로움을 위해 중요하지만 전문지식의 습득은 생존무기이자 윤리적 의무이다. 지각없었던 사춘기에는 성적을 잘 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것 같이 보이는 급우들을 경멸했고, 의미 없는 공부에 억매이지 않을 양심의 자유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중고등학교의 교과도 모두 영문학 연구에 유용한 지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한다. 문학은 인간의 행위와 내면의 모든 것을 탐구하고 성찰하는 예술이어서 어떠한 지식도 문학과 무관한 것은 없다. 내 학생들에게도 그들이 공부를 불성실하게 하면 앞으로 떳떳한 사회인이 될 수 없으니까 제발 공부를 하라고 호소하지만,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무지몽매한 시절의 나를 너무 닮았다. 의대생이 공부를 게을리 하면서 자신이 3류 의사가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3류 의사를 찾는 환자는 엉터리 진료를 받아도 무방할까?
외교관이나 각료나 대통령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훌륭한 외교관, 각료, 대통령이 될까를 밤낮없이 고민하면서 조심하며 노력하지 않고 ‘내 식대로’를 고집한다는 것은 의사가 의학지식도 없이 ‘내 식대로’ 환자를 고치려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2006년 9월호)

죽어가는 우리 국어, 살릴 수 있을까?

지금 우리 국어는 온 몸이 마비되고 썩어 들어가는 중병에 걸려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말 사랑’ 캠페인은 주로 ‘줍다’가 맞느냐 ‘줏다’가 맞느냐, 또는 어떤 단어는 외래어인데 같은 뜻을 가진 우리말은 무엇이다,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이것도 필요한 교육이지만 병의 뿌리를 뽑을 수 없는, 말초부위 요법밖에는 안 된다.
우리 국어가 이토록 중병에 걸리게 된 것은 사용자인 우리 국민의 성급함과 게으름, 확신의 부족, 그리고 정직성의 결여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미국에 가면 거지도 영어를 한대”라는 썰렁한 개그가 있었는데, 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지식인도 한국어를 제대로 못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런 조처는 국민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고 국민을 분열시킨다”라고 바르게 말하기가 귀찮아서 “국민을 갈등시키고 분열시킨다”라고 엉터리로 말해버린다.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이라도 당신만 못 하더라”는 남편은 “나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의 음식도 당신이 해 준 것만 못 하더라”라고 말할 성의 또는 능력이 없어서 아내를 음식점과 비교해 버렸다. “이젠 도박꾼도 결코 남성들만의 일은 아니다”는 보도도 있었다. “도박꾼”이 여성들에게도 일이 된 것이다.
이렇게 이치가 안 맞는 말들은 말을 절약하기 위해서 문법을 뒤튼 것인데, 반대로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마구 붙여서 괴물이 된 말도 많다. “소멸을 날려보냈다”는 “소멸시켰다” 나 “날려보냈다”로 말해야 바르고 명료한 말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는 “한반도 평화를 저해할 것이다”라고 단순하고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 . . . 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 . . .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하면 된다. 소신이 없거나 또는 책임지기가 싫어서 자기 생각을 딴 사람의 생각, 또는 객관적인 서술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저는 거기에 대해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빙빙 둘러서 말하지 말고 “저는 거기에 반대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평판조회의 부각이 높아지고 있다”는 “평판조회가 부각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뉴스보도 중에는 정황을 모르는 사람은 정 반대로 해석할 말들이 참으로 많다. “아파트가 안전진단을 통과했다”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말인데, 불합격이 합격이 되는 이런 요지경 세태가 차세대의 의식을 얼마나 왜곡하겠는가. “그리스가 유물반환에 나섰다”면 그리스가 소장하고 있는 외국의 유물을 솔선 반환해주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그리스는 우리나라처럼 외국으로 유출된 유물을 반환받으려는 나라이다.
단어의 뜻이 소름끼칠 정도로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학교폭력조직에 가담했던 학생이 탈퇴를 원해서, 갈비뼈가 두 개 부러지고 몇 주일 입원할 정도로 맞고 조직에서 풀려난 것을 스스로 “탈퇴식을 거하게 했다”고 술회하는 것을 듣고 울고 싶었다. 중고교생들 까지도 사람을 반 쯤 죽도록 패는 것을 ‘거한’ 잔치로 생각하는 것인가? “뇌경색이 뇌졸중 증가에 기여하고 있다”면 뇌졸중 증가가 바람직한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런 경험 당해보신 분이 많을겁니다”라는데 경험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지 피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다. “9시에 잠수교가 침수될 예정입니다”라면 9시에 잠수교를 침수시키는 인위적인 조처를 취한다는 말이 된다. “밝혔다”는 비밀에 부쳐졌던 사실을 공개하거나 잘 못 알려졌던 사실을 바로 알리는 것인데 요즈음은 “주장했다,” “건의했다,” 심지어는 “조언했다”는 뜻으로까지 마구 쓰인다. “아무개는 자신이 교육부총리 적임자라고 밝혔다,” “사측은 노조에 00일까지 철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 네티즌은 여자들이 이름을 ‘현정’이라고 바꾸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밝혔다”등의 문장에서 과연 밝혀 진 것이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단어에 ‘론(論)’을 붙이면 유식하고 심오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를 왜 “이것도 좋은 방법론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가? ‘방법론’은 ‘방법’으로 쓸 수 없다. “민족문학사론”은 “민족문학사”와 다른 것인데 문학사를 기술한 책에 왜 ‘론’을 붙이는가? 한 철학교수의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지 못한 것은 존재론 때문이다”라는 난해한 진단은 알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민주화가 안됐다는 말이었다. 어떤 부정적인 상황이나 실상을 ‘자화상’이라고 하면 예술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맞지 않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는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심한 모습(실상)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분야의 권위자가 나와서 그 분야의 전문지식을 “ . . .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라고 말하면 권위는 물론 신빙성도 사라진다. “이 병에 걸리면 몇 달 안에 사망하는 것으로 되어있다”는 전문의가 할 말이 아니고 문외한이나 할 말이다. “선의의 피해자”라는 말도 아리송하다. “애꿎은 피해자”나 “억울한 피해자”는 너무 소박해서 쓸 수 없는 것일까? “ . . . 와 . . . 와”라고 하면 될 것을 “ . . . 랄지 . . . 랄지”라고 하는데, ‘ . . . 랄지’는 ‘ . . . 라고 할 수 있을지’ 또는 ‘ . . . 라고 해야 할지’의 준말이다. “ . . . 했다라고,” “ . . . 이다라고”는 거추장스럽고 부자연스럽다. “ . . . 했다고” “ . . . 이라고”라는 것이 간명하고 자연스럽다.
장단음의 혼동, 억지로 흉내 내는 사투리 억양의 잘 못된 것, “저에게 여쭤보세요”같은 경어의 혼란 등 우리말이 겪고 있는 수난은 한이 없다. “깽판 친다,” “조진다,” “배 짼다” 따위의 야비하고 조악한 말도 사회지도층이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다. 그러나 제일 사악한 것은 요설(饒舌), 번드레하면서 거짓된 말이다. 지난 광복절의 사면, 복권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어떤 정부인사는 그것이 “정치자금법 이전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단행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 정부의 역점사업인 “과거사 정리”는 죽은 지 오래인 사람들의 과거사를 파헤치고 들추어내어 후손까지 괴롭히는 것인 모양인데 바로 두어해 전의 일은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이 ‘정리’인가?
모든 국민이 국어를 바로 쓰게 된다면 거짓과 속임수, 억지와 부조리가 설 땅을 잃을 것이다. (2006년 10월호)

약자의 횡포

일전에 한 커피숍에서 옆 테이블에 앉은 30대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의 대화를 얻어 듣게 되었다.
“미자 너무 불쌍해”
“나는 하나도 안 불쌍하더라”
“아니 왜?”
“다 있는데”
“뭐가 있다구?”
“돈도 부자잖아.”
“그까짓 돈이 무슨 . . . ”
바로 요즘 방영되는 “사랑과 야망”의 미자 이야기였다. 젊은 아줌마 1은 미자의 처지를 가슴아파했고 젊은 아줌마 2는 미자를 밉살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마침 나도 바로 전 주말에 미자가 아들을 빼앗기고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을 보고는 공연히 심난하고 허탈한 기분에 잠겨있을 때여서 귀를 기울였으나 소음 때문에 더 이상은 들을 수 없었다.
“사랑과 야망”의 여주인공 미자는 우리의 동정을 받을만한가? 이에 대한 답은 어떤 공식에 대입해서 산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다년간 자신이 남편의 수준에 못 미치는 여자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또 남편의 질책과 불만, 그리고 인색한 애정표현에 늘 위축되다가 남편이 아주 떠나가고 천신만고로 얻은 아들까지 빼앗기게 된 시점의 미자를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불쌍한 여인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뛰어난 미모에다 여배우로서의 명성,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계속 흠모하면서 돌보아주는 홍조 같은 친구가 있는 미자가 보통여자보다 몇 배나 운이 좋은 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희와 강력히 동일시를 했던 시청자라면 미자를 증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어떤 인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동정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우리와 비교해서 처지가 나은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다가 자만심에 가득 찬 인물이라면 당연히 거부감이 일겠지만 그러나 신의 총아 같은 인물에게도 매력을 느낄 수 있고 연민을 품을 수도 있다. 미자의 경우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이며 사리분별이나 베풂이 다 부족해서 크게 호감을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주재자가 되지 못하는 그녀의 모자람이 오히려 시청자의 동류의식을 불러일으켜서 연민의 대상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소설이나 드라마가 우리가 살아가는데 도움을 준다면 바로, 화려해 보이는 인물들도 얼마나 많은 약함과 불완전함, 그리고 고통을 안고 사는가를 보여주어 질투 대신에 연민과 인간애의 대상이 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얻은 이 교훈이랄까, 깨달음, 또는 통찰력이 아쉽게도 우리 주위의 실제 인물에게까지 확장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에서는 등장인물의 내면적 고통을 선명히 보기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안쓰러워도 하지만 현실의 인물의 경우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그 인물의 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우리는 마치 저능아처럼 나에게는 남모르는 고통이 있어도 다른 사람에게 내가 모르는 고통이 있으리라고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또 남의 성공은 노력보다 운에 힘입은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약자의 심술이나 야료나 무리한 요구도 성공의 댓가로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기하고 미워했던 사람의 진짜 속사정을 알고서 “일찍 알았더라면 . . . ”하고 후회한 경험이 있어도 또 새로운 상대를 향해 적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사는 사람은 주위에 괴로움을 많이 끼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은 괴로움과 손해를 자초한다. 약자에게 너그럽기는 크게 어렵지 않지만 진정한 너그러움은 나보다 운 좋은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는 심성이 아닐까? 시기심과 적개심은 나를 미운오리로 머물게 하지만 진정한 너그러움은 백조로 비상(飛翔)하게 한다. (2006년 11월호)

어리석은 자의 천국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것 다음으로--어쩌면 피해를 보는 것 이상으로--싫어하는 것이 ‘손해’를 보는 것일 것이다. 친구와 같이 쇼핑을 갔다가 친구가 돈이 좀 모자라서 몇 푼 빌려 주었는데 다음에 만났을 때 그 친구가 돈을 빌린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을 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돌려달라기는 너무 째째한 것 같아서 그냥 참고 넘어가면 좀 짜증스럽다. 그 친구가 어렵게 되어서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 열배, 백배의 금액도 선선히 줄 수 있었을지라도 생색 없이 날려버린 돈은 사소한 액수라도 아깝고 언짢다.
그런데 돈보다도 더 손해 보기 싫은 것이 ‘마음’이다. 나는 저 친구를 보름달만큼 생각하는데 저 친구는 나를 초생달만큼 밖에는 생각하는 것 같지 않다거나, 어떤 사람이 내가 좋아서 접근하고 친해지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에게 무슨 부탁이 있어서 다가왔다거나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줄을 대려는 꿍꿍이속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서운함과 노여움에 한동안 오래 부대껴야 한다.
어떤 사람을 소개를 받거나 아는 사람을 길에서 만났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35도의 각도로 인사를 했는데 나 보다 잘난 것도 없는 상대편에서는 27도 밖에 굽히지 않으면 그 ‘손해 본’ 8도에 대한 괘씸함을 한참 달래야 한다. 또 나는 깍듯이 존대를 했는데 상대편에서는 혼잣말하듯이 ‘그런가보다’, ‘그렇구나’ 하면서 은근슬쩍 말을 놓으면 불쾌하기 짝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대개 이런 약 오르는 경우에 ‘손해’를 만회하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은데 나는 대체로 속수무책이다. 그럴 때면 딸들이 영악스럽지 못함을 늘 한탄하시던 우리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나 자신이 한심해 진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나는 고약하고 염치없는 인간들을 피하면서 살 수 있다. 내 직업이 교과내용을 나 혼자 결정해서 독자적으로 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 상사, 부하들과 늘 한 사무실에서 얼굴을 보면서 같이 일을 성사시켜나가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안쓰럽게 생각한다. 물론 동료들과 마음이 잘 맞을 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과 희열을 느끼겠지만.
세상에는 늘 ‘손해 보는’ 숙명을 안고 살아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있다. 누구이건 처음 만나면 우선 위압적인, 얕잡아 보는듯한 태도로 대하다가 그것이 ‘먹혀드는’ 정도에 따라서 태도를 조정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그런 사람은 한 마리 개가 다른 개를 처음 보면 먼저 으르렁거리며 겁을 주어서 상대편이 겁먹고 위축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더 사납게 나오느냐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을 보고 그 법칙을 모든 우주만물의 관계의 원리로 체질화한 모양이다.
나의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누구에게나, 그 사람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이 판명되기 전까지는 최대한의 예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람을 대하는 올바른 원칙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의 성격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람을 만나면 너무 살맛이 나지 않아서 누구이건 만나는 동안은 인간적으로 기분 좋게 교류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원칙(또는 성격)으로 인해서 불쾌한 일도 많이 당했지만 그로 인해 좋은 친구를 많이 갖게 되어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았다고 믿는다. (이 원칙을 오늘날까지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별로 이용가치가 없는 인간이어서 나를 이용하려고 접근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덕이기도 하다.)
물론 50여년을 살면서 인간으로 인한 마음고생을 면제받을 수는 없었다. “나를 이토록 우습게보아서 저한테 이로운 일이 있을까?”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 인간도 많았고 “내가 말 한마디라도 좋게 해 주면 저한테 결코 해롭지는 않을텐데 나한테 이렇게 싹수없이 굴다니 바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인간도 많았다. 이런 때는 입맛이 쓰지만 이제는 괘씸하고 분하기보다는 “딱한 인간이 또 있구나” 싶으면서 조금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낭패를 감안하더라도 나의 어리숙한 원칙--내지 철학--은 내 인생을 풍성하고 축복되게 한 것 같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서열정하기가 ‘경제적’인 생존방법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에서는 계급사회, 서열정하기가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감정적 에너지의 과다낭비를 가져오기 때문에 평등이 답이라는 것이 이미 증명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동물의 수준에서 인간관계를 설계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사람을 늘 찍어 누르고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작은 손해는 보지 않아도 결국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면 큰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람을 경계심 없이, 선의로 대우하는 사람은 손해와 낭패를 보기도 하지만 인간적인 호감을 주고받는 대상이 더 많아서 크게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인생의 손익계산서 산출은 그리 간단명료하지는 않은 것 같다. (2006년 12월호)

미모라는 함정

대학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취업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자는 출신학교이라고 대답했고 여자는 미모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미모를 최고의 자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미모가 취업에 유리한 조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인에게 주어지는 공짜선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윤창출이 지상목표인 기업인이 미인을 채용한다면 그 외모의 이점도 거두면서 일도 시켜먹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일 것이다. 그러니까 ‘외모’덕으로 취직이 된다 해도 외모가 주된 자산이라면 오래지 않아 그 회사에서 찬밥신세가 될 것이다. 젊은 여성이 지성이나 능력의 개발을 게을리 하고 외모 가꾸기에 주력한다면 내면적 공허와 직업전선에서의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예쁜 여성이 실력이나 기술이 외모에 비해 뒤진다면 즉각 ‘예쁘기만 하지 머리는 텅 비었다’또는 ‘얼굴은 반반해도 실력은 형편없다’는 혹평을 듣는다. 예쁜 여자라서 실수나 부실한 업무처리가 ‘용서’를 받는 경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 번 정도는 가능할지 몰라도 거듭된다면 반드시 성상납을 하던가 거기에 준하는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반면에 뛰어난 미모의 여성은 장식적인 존재라는 뿌리 깊은 선입견 때문에 미인은 학문적이나 기술적인 평가에서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 또한 남성과 평등한 대우를 받는데 있어 미모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남성들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공동작업에는 여성을 참여시키는 것을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편치 않아서) 꺼리고, 뛰어난 미모의 여성은 심리적 부담감이 더욱 커서 더욱 더 참여시키기를 꺼린다. 어떤 위원회나 공동 작업에 아름다운 여성을 추천을 하면 그 미인에게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하는 남성들의 소심함 내지 비겁함도 한 몫을 해서 미모의 여성은 전문직업인으로는 미묘한, 그러나 뼈아픈 불이익을 당한다.
여성들이 예뻐지고 싶어 하는 것은 대개의 남자들이 여성을 외모에 따라 노골적으로 차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차별은 미모가 아닌 여성에게 모멸감을 주지만 미모의 여성에게도 다른 종류의 더 큰 모멸감을 준다. 많은 남자들은 심심풀이 삼아 예쁘다고 치켜 올려주면 여자들이 좋아하면서 애교로 응답에 줄 것을 기대한다. 예쁘다고 말해주었는데도 희희낙락하지 않으면 즉각 “여자들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라는 탄식이 남자들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여자가 기뻐 날뛰지 않는 이유가 남자가 자기의 내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외모만 중시하는데 대한 비애나 역겨움일 수 있다는 생각은 남자들은 꿈에도 할 수 없는 것 같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를 눈에 띄게 차별함으로써 예쁜 여자는 민망스럽고 불편하게 하고, 안 예쁜 여자에게는 모멸감을 준다. 그러나 한편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인격적 존경이 아니고 인생의 양념으로서이다. 예쁜 여자에게 자신의 깊은 속내를 털어놓고 고민거리에 대해 진지하게 상의하는 남자는 거의 없다. 예쁜 여자에게는 멋있게 보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쁜 여자의 용도는 다른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쁜 여자는 ‘남자친구’는 많을 수 있지만 ‘남자 친구’는 매우 드물다. 남자를 친구로 갖지 못하고 늘 이성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우정관계에서 불리한 반면에 애정에서는 늘 유리한가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애정에 있어서도 여성은 자기에게 구애하는 남성이 자신을 마음의 반려, 동지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트로피로 여긴다는 생각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런 남성과 결혼한 여성은 남편의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안 되고 늘 매력적인 외모를 유지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남자의 애정의 유효기간은 자신의 미모가 유지되는 동안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20세기 최고의 매혹적 스타 매릴린 몬로는 오로지 남성의 성적인 선망의 대상이 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서 결국 36세에 자살하고 말았다.
예쁜 여성은 자기의 미모 때문에 당하는 불리함과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다. 듣는 사람이 배부른 고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쁜 여성은 자신을 예쁘다고 의식하는 티를 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어떤 꽃미남 교수는 여성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피해망상에 걸릴 지경이라고 ‘고백’을 했는데, 예쁜 여성은 ‘나의 미모 때문에 남성들에게 시달려서 몹시 괴롭다’는 식의 고백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미모를 의식하지 못하는 척하며 내숭을 떨어야 한다.
이제는 여성들이 남성의 둔감성과 몰상식으로 인해 빚어 진 이 수천년 묵은 미모콤플렉스를 과감히 벗어던져야 한다. 모든 여성이 남성들의 얄팍한 찬사나 관심의 무가치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아를 가꾸며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기로 결심한다면 21세기는 여성이 승천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2007년 1월호)

사랑할 자격, 다스릴 자격

서양의 사랑의 이야기는 대부분 ‘자격검증’의 이야기이다. 옛날 중세의 기사는 자기가 사모하는 여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악한과 싸우고 용을 퇴치하고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큰 공로를 세운 후에 겸허하게 사랑을 호소했다. (물론 현실에서는 흉내 내기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기사가 주인공인 사랑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패턴을 따른다) 중세가 지나고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서양의 사랑이야기는 대부분 ‘자격검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와 같이 남녀 주인공이 같이 자격검증의 과정을 거치면서 같이 성숙하는 이야기는 지적, 감정적 만족을 주지만 일방적인 자격검증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의 경우에도 좀 허전하고 씁쓸하다. 오페라 “춘희”의 주인공 비올레타는 화류계의 여인이라는 전력 때문에 아르망에 대한 자신의 애정이 순결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전 재산을 동거생활을 위한 생활비로 쓰고도 아르망을 위해서 그를 포기하는 절대적인 희생을 한다. 그 고통 때문에 병이 들어서 아르망의 오해가 풀리고 연인의 자격을 인정받는 순간 죽는다. 이런 오페라는 참고 볼 수 있는데 소설은 참고 읽기가 힘들다.
서양의 연애이야기에는 쌍방의 자격검증이 많은 반면에 동양의 연애이야기는 일방적인, 여성 쪽의 자격검증의 이야기가 많다. 동양에도 공주님과 결혼하기 위해서 전쟁에 나가서 무훈을 세우는 것 같은 남자의 자격 증명 이야기도 있지만, 대부분은 (춘향전에서처럼) 지체가 낮은 여성이 모진 시험을 통과해서 지체 높은 남자의 배필 될 자격을 입증해 보이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사극이 분통터지는 주된 이유는 여성들이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기 때문이지만, 왕은 왕비나 후궁들에게 순전히 마음 내키는 대로 승은(承恩)을 입히거나 총애를 거둘 뿐 그 여인들의 애정을 얻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애정에 따르는 책임의 개념도 전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서양에서도 신데렐라를 아내로 맞은 왕자는 자신의 자격을 입증하지 않았다.)
이 전통은 현대에도 답습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신랑감의 등급은 사회적 지위로 결정된다. 의사, 박사, 판검사는 교양이나 인격은 어찌되었던 간에 1등 신랑감이다. 1등 신랑감의 배우자가 되기 위한 자격은 ‘열쇄 3개’라고 한다. 열쇄 3개를 마련하지 못하고 이런 1등 신랑감과 결혼을 하면 그 월권행위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의사나 박사나 판검사 또는 그와 유사한 ‘자격’을 가진 남자는 그 이상의 자격입증은 필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격파탄도 허용이 되는 것 같다.
방금 종영한 “열아홉 순정”이라는 연속극 속의 국화라는 연변처녀는 학식이 없고 중국교포라는 ‘약자’로서 재벌의 아들과 결혼하기 위해 모진 자격검증을 거쳤다. 착하고 영리한 국화가 시어머니 감과 시누이감의 고약한 심성과 야비한 가치관 때문에 거의 1년을 고생했던 것 같다. 국화의 빛나는 승리는 시청자들을 기쁘게 했다. 그런데 내가 놓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신랑감인 윤우는 자신이 국화의 배필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한 번도 고민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국화보다 몇 등급 아래인 것 같았는데 . . .
자격검증이 필요한 것은 애정에서 만은 물론 아니다. 옛날 이집트는 전제왕조였지만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30년마다 백성이 보는 앞에서 황소를 제압해 보여야 했다고 한다. 30년이라는 기간이 너무 길고, 황소를 제압하는 사람이 통치도 잘 할까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고대에도 그런 자격검증제도가 있었고, 세습군주라도 자격검증이 필요하다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위로가 되었다. 그 개념이 제대로 계승, 발전되었다면 서구는 지금 쯤 낙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근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선거가 통치자의 자격검증 장치이다. 물론 대통령 후보 쯤 된다면 이미 전력이 상당히 알려진 사람일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선거기간에 감추어졌던 사실도 노출이 되고 집중적인 검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거짓폭로와 흑색선전은 이 검증을 망가뜨린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일단 선거에서 이기면 그것으로 검증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서 획득한 권리는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법이 고위 선출직에 부여한 ‘고유권한’이라는 것은 개인 취향에 따라, 입맛 당기는 대로 행사하라고 준 보너스 같은 것이 아니고 국정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해 부여된 것이므로 그 부당한 행사에 대해서 국민은 당연히 발언권이 있다. 통치자가 자기 ‘권한’을 주장하고 싶을 때, 통치자에게는 국민의 지지율이라는 당대의 검증이 있고, 또 속일 수도, 아부로 회유할 수도, 뇌물로 매수할 수도 없는 역사라는 검증자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07년 2월호)

델리행 야간열차

나이를 먹어도 철이 안 들어서인가, 편한 것만 추구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안락함보다는 ‘모험’ 쪽으로 마음이 쏠린다. 인도여행상품 중에서 바라나시(베나레스)에서 델리까지 항공편 이용 코스도 있는데 침대차로 가는 코스를 선택했다. 막상 역으로 향하기 전에 14시간 기차를 탄다는 말을 듣고 화장실을 몇 번 가야될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야간열차가 인도의 참 얼굴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변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아름답고 웅장한 문화유적을 즐기지만 그 나라 사람들의 현재의 삶에 더 관심이 있다.
기차역에 들어서자 정말 영화에나 나올만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없이 긴 플랫폼에는 누추한 옷을 걸치고 먼지를 뒤집어 쓴 사람들이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은 대부분은 초점 없는 시선으로 하염없이 앉아있거나 짐 위에 엎어져서, 또는 짐을 베고 누워서 잠을 자기도 했고, 가족끼리 밥을 해 먹기도 하는 모양이 마치 언제 올지 모르는, 올지 안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그 사이를 몸이 불편한 걸인들이 누비고 다녔고,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흰 소도 있었다.
역에 들어와 있는 낡고 지저분한 기차는 창에 쇠창살이 쳐 있어서 죄수호송차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쇠창살 안쪽의 유리는 거의가 다 깨어져 있었다. 그런 기차에 “chair car”라고 씌어있는 칸과 씌어져 있지 않은 칸이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기차에도 의자가 있는 2등 칸과 의자가 없는 3등 칸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인도인 현지 가이드는 아주 새파랗게 젊은 학생이었는데도 능숙하게 짐꾼들을 불러서 우리 짐을 지우고 대합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대합실은 낡은 철제 의자가 30-40개 있는 지저분하고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지만 1등표를 가진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플랫폼의 세멘트 바닥에 괴로운 자세로 앉고, 누워있는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대합실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일찌감치 역에 나갔고, 기차가 연발했기 때문에 그 악취 나는 대합실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
3시 45분 출발예정인 델리행 침대차는 결국 6시 반에 도착했다. 쿨리(짐꾼)들이 가방을 두 개씩 포개서 머리에 이고 하나는 끌거나 팔에 걸고 운반해서 기차에 올려놓아 주었고, 짐들은 침대 맨 아랫단 밑에 밀어넣어졌다. 모두들 침대 번호를 확인하고 더럽고 허름한 침대에서 14시간을 버틸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기차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30분 이상을 지체해서 7시에야 기차는 출발했다. 야간열차의 낭만은 어디에도 없었다. 침대차가 독립 칸으로 구성되어있지 않고 다 개방되어 있는데, 통로 한 쪽으로는 삼단 침대가 마주보고 있어서 여섯 개씩, 그리고 좁은 통로를 격해서 벽 쪽으로는 2단 침대가 연이어 있었다. 침대차의 표를 사기가 어려워서 사람들이 한 달 전부터 표를 예매하기 때문에 일행이 붙은 자리를 살 수가 없어서 서너 그룹으로 나뉘어졌고, 생면부지의 인도인들과 아래 윗 침대, 마주보는 침대를 써야했다.
그토록 지저분한 침대차일망정 인도인들은 중상류층이 이용한다고 하는데도 나와 언니의 침대 맞은편에는 매우 무식해 보이는 거구의 인도 남자 두 사람이 꺼멓고 큰 맨발을 뻗치고 앉아서 큰 소리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3단 침대 쪽은 가운데 단을 접어 올려야 아랫단에 사람이 앉을 수 있고, 세 단을 다 펴면 어떤 단에도 고개를 펴고 앉을 수 없는 구조였다. 여행사가 제공한, 침대차의 주방에서 나온 저녁식사는 카레국물 같은데 삶은 계란 두 개와 무슨 소스를 얹은 밥이었는데 냄새가 역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맞은 편 자리의 두 남자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어서 주고 싶기도 했지만 그랬다가 혹시 친근감이라도 표시할까 두려워서 현지가이드의 지시대로 주방에서 다시 가져가도록 그냥 바닥에 내려놓았다. 인도에는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이 별로 없는데, 기차는 그냥 그 자체가 쓰레기통이었다.
창문을 열 수 없게 되어있어서 올라타는 순간부터 호흡이 괴로웠는데, 백 여명이 모포를 펄럭이고 냄새나는 음식을 먹고 하니 정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런데 기차는 가는 시간보다 서 있는 시간이 더 긴 것같이 생각되었다. 승객을 태우기 위해서 오래 정차하는 것이 아니고 선로가 하나뿐이어서 교차하는 기차를 보내기 위해서라는데, 한 번 교차하는데 몇 십 분씩 걸려야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인도 기차의 화장실은 밑이 뚫려 있어서 용변이 선로위로 그냥 배출되는데, 그토록 잦고 오랜 정차 시에도 화장실 사용이 금지되는 것 같지 않았다.
기차는 결국 그 다음날 3시 5분에 델리 역에 도착했다. 연착한 시간을 합해서 23시간 20분만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중에, 하루 걸려서 온 거리가 500km였다는 말을 듣고 허탈했다. 델리 시내에서 아주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5시가 되어서 그날의 델리관광 스케쥴은 모두 포기하고 공항으로 직행해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미리 알았다면 야간열차는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다면 10년을 벼르고 기대했던 인도여행이 ‘앙꼬 없는 찐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인도의 야간열차에는 낭만은 없었지만 현실이 있었다. 물론 인도에는 더 참담한, 극한적인 현실이 있다. 그 현실도 가능하다면 대면하고 싶다. 그러나 주간에, 화장실을 사용을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시간만큼만. 오늘 “기아대책”에 후원아동을 한 명 늘려달라고 했다. (2007년 3월호)

- 고려대 교수, 영문학
- 월간 <<방송문예>> 2006.3 - 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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