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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생각한다는 데 있다고 답한 사람이 데카르트(1596~1650)였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그의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생각하기를 그치면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소멸한다.
데카르트 명제에서 `반대`를 대입시키면 `나는 반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로 된다. 요즘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세력의 존재 뿌리가 정(正)을 부정하는 반(反)에 있다. 반대하다는 입장, `안티(anti)`가 그들의 성장토양이었다. 지난날 군사권위주의 시대는 그들에게 성장하기 알맞은 풍토를 제공했다. 기존의 정치 경제 체제가 잉태한 모순(비민주ㆍ부조리ㆍ비효율)이 잡초 들판을 이루었을 때 그것을 제초하는 데 일조한 안티 세력의 공적은 인정할 수 있다.
안티 세력의 문제는 진화거부 본능에 있다. 곤충의 경우, 일생주기에 따라 모습을 바꿔야 성충이 된다. 그러나 안티는 집권에 성공하고 난 다음에도 안티로 머물고자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 활기, 응집력의 샘물이 메마르기 전에 지속적으로 반대할 대상을 발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나라의 중심을 장악하고서도 마치 과거처럼 체제 밖에서 핍박받는 사람들로 머물고 있는 것처럼 무언가 반대운동을 벌이는 시늉을 계속해야 한다. 그 시늉이 실패할 때 안티의 존재 뿌리가 시들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전략적으로 공격대상을 선택한다. 동서고금 모든 나라가 다 그러하듯이 사회구조는 밑바탕이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피라미드를 닮았다. 아래는 사람이 많고 위로 사람이 적다는 뜻이다. 대중의 인기몰이에 뜻을 둔 정치인들이라면 위를 깎아내리고 아래를 감싸는 듯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비전 있는 소신 정치인이라면 위를 치켜세우면서, 그들의 노력의 과실을 키워 그 혜택이 아래로 나누어지도록 배려한다. 소신이 지나치게 굳으면 독재자 소리를 듣게 되고, 물렁하면 반짝 인기 끌다가 무능자로 낙인 찍히게 마련이다.
요즘 한국경제 돌아가는 꼴이 심상치 않다. 그것은 바로 안티들 등쌀에 경제활동능력이 뛰어난 기업인들의 사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사상 초유로 2000억달러 이상의 수출신장을 가져온 주역이 대기업인데도, 그들 손발 묶는 조치에 골몰하는 것이 안티 정부다. 제조업 공동화에 이어 교육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대입제도 표류에서 보듯이 정부는 평준화에 집착하고 있다. 수도이전 계획이 좌초했지만 행정기관 이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안티들은 마치 법 위에 존재하듯 언동한다.
이 모든 일들은 안티 근성 때문이다. 일류대 출신보다 아닌 사람이 더 많으니까, 서울 거주자보다 지방 사람이 더 많으니까, 기업인보다 노동자가 더 많으니까 소수를 치면 다수의 박수를 받는다는 정치 계산을 깔고 있다.
안티들 머리에 적의 적은 우방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얼마 전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SWJ) 사설의 지적이 바로 그랬다. 서울 정부가 평양을 두둔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공감하는 내국인이 많았다. 발끈하는 여권의 반응을 보면 역시나 하는 의심이 깊어진다.
집권세력에 코드 맞추기 열풍이 거세게 분다. 군 장성들도 예외가 아닌가 보다. 며칠 전 휴전선 철책선에 난 구멍을 민간인의 월북 탓이라는 국방부 발표는 서해 북방한계선 발포사건, 동해 잠수함 침투사건 뒤의 일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간첩 아닌 국민이 보안법으로 고통을 겪지 않는다. 방송매체가 친정부 일색인 상황에서 정부에 비협조적인 신문이 있어서 균형된 뉴스를 접하게 된다. 언론개혁이 언론탄압으로 비추어진다.
안티의 한계는 안티의 티를 벗는 순간 존재기반이 소멸한다는 데 있다. 국민이 공감하는 비전 있고 책임 있는 구성집단이라면 안티가 `프로(pro)`로 변신해 중심세력으로서의 책무를 자각하고 나라의 핵심가치를 지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안티로 남아 있으려니까 그들이 반대했던 비민주, 비효율, 비리를 스스로 되풀이하게 된다.
개혁, 그것은 좋은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훼손하는 일을 개혁의 이름으로 추진하는 결과는 개선이 아닌 개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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