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살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범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그 여운과 향기가 뒷날까지 오래 남는다.

그러나 오늘날 나라를 책임진 정권부터가 품위상실증에 걸린 탓일까,각 분야에 기품있는 인사가 드물고 이에 따라 우리 사회 전반이 거칠고 상스러워져 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 법조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때로는 한술 더 뜬다. 사법부의 높은 분이 다른 법조 직역(職域)을 마구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키고,검사가 피의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원색적 대화가 녹음되어 공개되기도 했다. 고위 법관이 브로커와 관련된 비리혐의로 구속되는가하면,급기야 무슨 변호사가 백주대로에서 골프장 사장을 납치하는데 앞장서는 등 해괴한 일들이 연달아 터졌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법조인들 가운데 극히 일부이고,주변에서 존경을 받는 법조인도 적지 않다. 문제는 평소에도 법조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한 터에 이런 몇몇이 들어 법조 전체의 품격을 여지없이 망가뜨리고, 사법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 된다.

최소한 나라의 지도자들만이라도 좀더 기품 있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고,법조,특히 법관이나 검사 등 소위 ‘판관’(判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남의 잘못을 다스리거나 시비를 심판하는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에게서 보통을 넘어서는 품격을 기대한다. 그들의 모습이 시정잡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면 누가 그 권위와 판단을 수긍하겠는가.

우선,판관은 공사(公私)생활 간에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 대체로 말이 많은 사람은 좀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다. 법정(法頂) 스님의 말씀처럼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 수 있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거르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히 사건 관계인은 판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면서 온갖 촉각을 곤두세우고,순박한 국민은 그들의 말을 곧 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판관의 말은 천금의 무게를 가져야 한다. 검사는 공소장만으로만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만으로만 말한다는 법언(法諺)도 이런 맥락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더구나 저잣거리에서나 쓰는 막말,지혜는 부족한데 소신만 가득찬 말,쓸데없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부아를 지르는 말은 지도자들이 입에 담을 일이 못된다.

둘째로,판관은 가난을 견뎌낼 수 있는 체질을 갖춰야 한다. 그것이 싫으면 과감히 옷을 벗고 변호사를 하거나 사업을 시작할 일이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부(富)까지 차지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세상 인심이 그런 것까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를 거슬러 패가망신하는 공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이 오늘날에도 절실하다.

끝으로 판관은 사람을 가려 사귈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져야 한다. 마음의 형평과 판단에 나쁜 영향을 미칠 소지가 있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특별한 용건없이 판검사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려는 사람치고 문제아 아닌 사람이 없다. 지난날 많은 ‘게이트’의 주인공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판관은 본래 고독한 직업이다. 외롭게 사는데 이골이 나야 한다. 온갖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세상 재미 다 보고 살 수 없는 것이 판관이라는 자리다.

오늘날 법조가 진정한 권위와 품격을 복원하는 일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법조인 한사람 한사람이 사고와 언행을 신중히 하는 한편 과욕을 버리고 외로움을 잘 견디면서 묵묵히 본연의 업무에 전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면 구태여 판사실 복도에 차단문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유치한 방법을 쓰지 않더라도 법조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 변호사, 전 법무부차관
- [SUNDAY 중앙 칼럼] 2007/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