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살며생각하며> 봄비
정진홍   |  2007-05-03 06:55:42  |  조회 3005 인쇄하기
휴전 직후, 서울에 처음 온 시골아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서 울역에 도착하자마자 그 아이는 또래 아이들한테 끌려가 있는 돈을 다 털렸다. 진눈깨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문득 그 시골아이는 생각했다. “날이 화창했으면 없었을 일일거야!”

대학생들은 교복을 입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교복값이 없어 두 달 남짓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는데 동복은 그처럼 더 칙칙하게 무거워지고 있었 다.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 ‘환한 옷’을 입은 여대생이 막 대문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도대체 학교에 가는 건데 저렇게 전송을 하다니!” 하고 생각했다. 낯설기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가 사라지고 부모가 들어간 대문에 걸린 문패를 보면서 그 아이는 “서울에 자기 집을 가지고 자기 문패를 달 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모두 그런 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는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서울아이들은 달랐다.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은 아주 달랐다. 머리도 좋고, 아는 것도 많고, 생각도 번듯하고, 진지했다. 아니, 그 아이들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꿈도 구체적으로 지닐 수 없어 아예 꿈이 없어 절망조차 모르던 시골아이는 서서 히 절망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어떤 아이인 지 알겠구나!” 그 아이는 그렇게 혼자 되뇌었다.

버스 요금이 없으면 걸었다. 점심 값이 없으면 굶었다. 몸이 아 프면 조금 울었다. 그러나 외로움은 견딜 수 없었다. 서울아이들은 사람을 쓸모를 재어 만나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그 훌륭한 아이들 앞에 나서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럴수록 그 아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북에서 1·4후퇴 때 갖은 고생을 다하시 면서 청계천에서 폐품 장사를 하시던 그 아이의 같은 과 친구 어 머니가 가끔 불러 자기 아들과 함께 그 아이에게 저녁을 먹이셨 다. 두께도, 크기도 그 어머니의 고생한 손바닥만한 햄을 지글지글 구워 주셨다. 배불러 행복했다. 그때만, 그리고 그때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워할 수 있을 때만, 그 아이는 웃었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때, 이를테면 교정의 라일락 꽃 향기가 진동하거나 은행잎들이 지천으로 떨어져 바람에 휘날릴 때면, 그리고 버스 요금이 아직 몇 푼 남아 있을 때면, 그 아이는 강의실에 들어가지도 않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하루 종일 종점에서 종점을 오갔다. 그러면서 그 아이는 자신이 낭비하는 삶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기와 그것과 상관없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또 하나의 자기를 모두 안고 알 수 없는 분노가 안에서 이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미움의 대상도 분명하지 않았다. ‘너’이기도 하고 ‘그들’이기도 했다. ‘나’이기도 했고, ‘전쟁’이기도 했다. ‘젊음’이기도 했고 ‘서울’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스스로 생각했다. ‘누구든, 무엇이든 미워하지조차 않는다면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세월이 그 아이를 끌어왔는지, 아니면 그 아이가 세월을 타고 흘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참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 아이 는 이제 서울노인이 되었다.

그 노인은 서울역 뒷골목에 어떤 아이들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서울에 살지만 모른다. 그 노인은 늘 스스로 말한다. “참 좋아 졌지. 열심히 일했어, 나도!” 그리고 이런 말도 하곤 한다. “ 교복이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개성이 신장되고, 자기 마음대 로 옷을 입을 수 있으니 패션감각도 다듬어지고, 스스로 우아할 수 있으니 말이야!”

가끔 그 노인은 진심으로 힘주어 이런 말도 한다. “집 없는 것, 게으른 탓이지. 누구는 태어날 때 집 지니고 태어나나? 그리고 싹수가 있는 훌륭한 아이는 훌륭한 대접을 받아야 해. 그것이 정의인 거야!” 그 서울노인은 자신의 삶을 가끔 되돌아보기도 한 다. 이른바 ‘춥고 배고팠던’ 세월과 ‘바로 그래서 외로웠던 세월’을 되살피기도 하는 것이다.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 도 한다. 철없이 모든 것을 미워하고 대상도 분명치 않은 분노를 사르며 살던 세월이 부끄러워진다. “내가 참 어리석었지. 이렇게 감사한 것이 삶인데!” 그 노인은 그렇게 말하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노인은 조그만 어느 잡지에서 자기를 묘사한 글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아니라 자기의 경험 이 그대로 드러난 어떤 아이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이다. 어느 아 동보호기관에 봉사를 나가는 한 대학생의 글은 이러했다. “나는 거기 있는 아이들에게 무언지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몇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면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제각기 자기 소원을 이야기했는데 별것이 아니었다. 색연필이 갖고 싶다든지, 손전등이 있었으면 좋겠다든지 그런 것이었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저하고 하루 종일 버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갔다 왔다 해주실래요?’ 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종점에서 종점을 두 번 왕복하기 전에 나는 그 아 이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그는 저리게 외로웠던 것이고, 그 외로움이 저리게 나를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서울노인은, 서울노인이 된 시골아이는, 자기의 감사가 얼마나 독선적이었는지를 느꼈다. 바닷가에 닿는 전철 노선이 있었다. 그 노인은 그것을 거저 타고 종점을 왕복해보리라 다짐했다. 바 다는 거울처럼 자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회한과 부끄러움이 일었다. 하지만 종점에서 집으로 되돌아오는 것마저 몸이 견디 지못했다. “참회의 기회조차 이제는 잃어야 하나?”하고 그는 말 했다.

며칠 전, 서울노인은 미국에서 일어난 슬픈 소식을 들었다. “버스 종점, 종점의 왕복….” 그는 그렇게 혼자 말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았다. 꽃바람이 아름답게 시원했다. 시골아이는 기 도하듯 말했다.

“비야 오거라. 봄비야 쏟아져 내리거라….”

- 한림대 과학원 특임교수, 종교학
- 문화일보 2007-04-28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532 허영교수 “재판관련 헌법적 문제제기 적극 수용을”  관리자 07-06-22 2904
531 내 아버지는 올드 라이트 -정길홍  관리자 07-06-22 2896
530 과거는 역사 속에 묻자던 鄧小平  1  김경한 07-06-20 3229
529 핏줄의 긍정적 힘 확인한 조승희 사건  3  김경한 07-05-09 3507
528 <살며생각하며> 봄비  정진홍 07-05-03 3005
527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 던진 과제  서지문 07-05-02 3234
526 10년의 회환, 되풀이 되나  김병주 07-05-01 3384
525 반기문 총장의 개혁 드라이브  박수길 07-05-01 3109
524 ‘문학청년’ 그리고 ‘검찰 30년’ (문화일보 '문화초대..  김경한 07-05-09 3434
523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인터뷰 기사  김경한 07-04-23 3532
2122232425262728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