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의 교황께서 마침내 속내를 드러내셨습니다.
가톨릭 이외의 어떤 종교도 바르지 않다고 다시 확인하셨고, 가톨릭 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온전한 종교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이제까지 가톨릭이 애써 지켜온 다른 종교들과의 화해의 몸짓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느 종교치고 자기가 유일하고 절대적이라고 하지 않는 경우가 과연 있기나 한지요.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있는지요.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다른 종교들을 다 인정하고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다른 종교의 종교다움을 승인한다는 것인데 그 일이 자연히 자신의 절대성 및 유일성과 충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종교간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 실은 종교의 자리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을 수행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흔히 불교는 다르지 않으냐고 하시지만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도량이란 실은 자신의 가르침 안에서의 수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깨닫는 경지에 이르면 분별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데 하는 것이 타종교 수용의 논리인 것을 감안하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불교적 수용인가 하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무릇 종교는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가 내게는 유일한 아버지'라고 하는 선언과 종교가 자기 스스로 절대적이고 유일하다는 주장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절대유일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도 아닙니다. 종교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물의 개체적 실존은 그러한 고백에 의하여 지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의 실재가 '내 아버지는 나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아버지이므로 네 아버지는 실은 가짜다'라고 하는 선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는 그 사람에게 절대적이고 유일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내 아버지의 절대성에 근거하여 부정하는 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른바 '절대성 또는 유일성의 논리'입니다. 앞에서 계속해 절대성과 유일성을 함께 사용했습니다만 실은 그 둘 사이에는 개념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절대성이라는 말에는 하나라는 수자적인 개념이 실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가 수자적인 것으로 이해되면서 오직 하나라는 유일성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수용됩니다. 수자는 무수한 실재를 전제하고 헤는 단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든 무한이든 수라는 것은 이미 절대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라는 선언은 절대적이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우리는 여럿 중의 하나인데 그 하나의 가치는 내게 절대적이라는 뜻에 머뭅니다. 그러므로 절대는 수를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수량적인 개념(numerical concept)이 아닙니다. 이 둘의 혼동은 이른바 범주론적 과오(categorical fallacy)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달리 말하면 수자는 인식의 내용이지만 절대는 고백의 내용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과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가 신을 일컫는 보편적인 언어인 '하느님'을 굳이 '하나님'으로 바꾸어 신의 절대 유일성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그것은 참 안타까운 신의 훼손입니다. 신을 수자로 바꾸어 많은 수의 하나로 여기게 되는 것이니까요. 우리 말의 '하나'라는 개념의 넓은 함축을 전제해도 이미 수량화한 신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다원문화 속에서 직면하는 개개종교의 자기정체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온전한 인식을 방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원문화 속에서 단원의식을 가지고 적응하려니 억지가 솟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정당화의 논리를 자의적으로 재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그저 사유나 논의의 수준에서 머문다면 그것은 풍요로운 사상을 구축하기 위한 적절한 재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그러한 종교의 배타적 절대성의 주장이 살육을 초래하는 현실에 이른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그리고 지금도 이 참상을 겪고 있습니다.
평화는 하나가 되어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다 지우고 이룩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각기 여럿이면서 서로 어울려야 그것이 평화입니다. 종교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 하나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입니다. 그것이 종국에는 싸움을 일으킵니다. 개개 종교가 그 출발이 다르다면 종착점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삶을 물었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죠.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서로 다른 종교끼리 조화로운 어울림을 살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로 모일 텐데 지금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인식에 기초한 공허한 주장일 뿐입니다. 여전히 절대적 유일성의 배타적 태도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종교의 안에 깊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티칸 공의회의 그 확트인 정서를 지닌 가톨릭이 지금 그 속내를 드러내듯이 말입니다.
공자님 말씀대로 和而不同하는 것이 진정한 和이지 말을 꾸며보면 和而相同은 和가 아닙니다. 평화는 다름의 공존입니다. 동질화를 통한 효율적인 지배나 통치가 평화가 아닌 줄은 이미 일제말기의 일본의 행태속에서 철저하게 겪지 않았습니까.
자기 정체성의 승인을 위한 자기 정체성의 주장은 불가피합니다. 내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식의 언어로 발언되기보다 고백의 언어로 발언됩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스스로 승인해야 비로소 인간은 성숙한 존재이게 됩니다.
내 애인만이 가장 예쁘고, 내 애인 만이 내게 있는 유일한 여자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네 애인은 추하고, 네 애인이 예쁘다고 하는 네 말은 거짓이거나 어리석거나 잘못된 진술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네가 네 애인을 유일한 여자라고 하는 고백이 참으로 참담한 저주받을 발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발언이 혹 그 사람의 애인을 감동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덜 큰 사람'이거나 '미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삶의 '상식'입니다.
때로 상식의 허구와 기만성을 철저하게 뒤엎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데도 이런 경우에는 그저 소박하게 상식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참 귀하다고 느껴집니다.
종교들이, 종교인들이, 언제 소박한 상식인으로, 아니, 종교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는지,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