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좁아졌습니다. 밖에 나들이가 쉬워졌습니다. 올 여름에도 국민대이동이라고 할 만한 여행객이 공항을 드나들 것입니다. 한 때는 외국에 다녀 온 사람이 우러러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이 이곳에 머물러 사는 사람이 귀해 보입니다. 세상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공연히 심각한 체 하는 언급인지는 몰라도 생각해보면 바깥나들이란 결국 좁아지는 세상에서 낯선 것과의 만남이고, 그렇게 만난 낯선 것 이해하기고, 나아가 그 낯선 것들과 친해지고 어울려 살기위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다른 언어, 다른 역사, 다른 몸짓, 다른 생각 틀과 부닥쳐 그것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다가가 익히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그 다름을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낯선 곳을 휘젓고 다니면서도 낯선 것을 부닥쳐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생소한 것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별로 없습니다. 좀 과장을 한다면 고추장이나 김을 싸가지고 나가 그것 먹다 옵니다. 밤새도록 우리끼리 술 먹고 놀다가 낮에 여행하는 동안에는 차 안에서 잠만 잡니다. 눈만 뜨면 보이는 낯선 경관인데도 만날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들이를 하고 왔는데도 남는 것은 찍은 사진에 나온 자기들 얼굴을 보며 동행들과 키득거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낯가림’인지 모르겠습니다.
제법 그 낯가림을 수줍은 겸양이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문제될 까닭은 없습니다. 좀 세월이 가고 만남이 잦아지면 지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진지한 만남은 피하면서도 우리 것을 최고라고 우기면서 뽐내고 우쭐하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습니다. 남의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 것이 지고한 것이라는 주장과 나란히 다른 것들은 모두 형편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야 한다고 하는 이상스러운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애국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곱게 보려 해도 열등감이거나 피해의식에서 나오는 반응이고, 성숙하지 못한 몰골을 드러내는 부끄럽고 치사한 일이지 애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기야 개항이후가 겨우 한 세기인데 바깥나들이가 세련되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세월이 문제가 아니라 끝내 달라지지 않는 우리 문화의 수준, 또는 우리 의식의 구조인 것 같습니다. 올림픽을 치른 것이 벌써 20년 가까운 옛날입니다. 그런데 외국 노동자들에게는 존칭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셨습니까?’라든지 ‘이렇게 하세요.’라고 하는 말을 그들에게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오만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못나서 그런 것 아닐까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여러 해전에 인도의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 모든 아픔에서 풀려나는 지혜를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처음자리’에 서는 감동은 사뭇 경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청인 듯 문득 찬송가 소리가, 그것도 우리말로 들렸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여기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이루었습니다.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팔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분노 때문도 아니고, 부끄러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상식 없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긴 공포가 거기 환한 웃음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지금 우리의 더운 여름을 불안과 분노와 연민과 원망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문화의 자화상이 그러합니다. 다름과 직면하여 살아야 하는 세계에서 낯가림과 오만의 이 기이한 병존을 살아가는 우리 문화의 못난 수준이 문제입니다.
*(한국일보 2007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