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주어진 시간 5분 안에 10문제에 대한 답을 작성해야하는 ‘나의 사망기’를 대하게 되었다. 그의 사망 원인은 . . . ; 그의 유족은 . . . ; 그의 경력은 . . . 따위의 질문 다음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 . . 한 사람이라고 기억할 것이다”라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서슴없이 ‘선량한’이라고 쓰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곧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떠오르고 약간 민망하고 허전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전혀 선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을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고 평소의 소원도 ‘좀 더 선량해졌으면’이 아니라 ‘조금 더 머리가 좋았더라면’,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인데 왜 ‘사망기’에는 ‘선량한 사람’으로 기억되리라고 쓰고 싶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아마도 내 자신이 어떤 망자에 대해서 회고할 때 머리 좋은 사람이나 유능한 사람보다도 ‘선량했다’고 기억되는 사람을 가장 절실히 추모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모두 죽은 다음에 친지들에게서 진심으로 추모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는 동안에는 나의 욕망충족에 급급해서 사후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을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가끔 나 또한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할 때는 남에게 남길 추억보다는 업적을 남겨야 하겠다는 조급함이 앞선다.. 그래서 더 큰 ‘업적’을 이루게 해 줄 더 좋은 두뇌와 더 뛰어난 능력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업적’을 이루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오래 기억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씁쓸한 기억을 남길 일도 서슴지 않을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머리나 재주는 기본적으로는 타고나는 것이어서 우리가 노력으로 보탤 수 있는 여지가 비교적 적고 따라서 아쉽지만 머리가 나쁘거나 재주가 없어도 본인의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선량함도 어느 정도는 타고나는 것 같이 생각될 때가 있다. ‘구제할 수 없는’ 사악함이나 심술을 타고 난 것 같은 사람을 볼 때 미워해야 좋을지 불쌍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선량함은 노력으로 증진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이 노력을 우리는 늘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룬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 그런데 재물이나 지위 심지어는 건강도 한 번 획득하면 영원히 누릴 것처럼 그런 것을 획득하기에 급급하다. 가끔은 죽음은 약속을 하고 방문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원치 않아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음을 상기해 보는 것도 바르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고려대 교수, 영문학
- 성숙한사회가꾸기모임, <<성숙의 불씨>> 6호, 2007.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