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로 며칠간 산속에 들어가 신문도 TV도 보지 않고 휴대전화마저 꺼버렸더니 모처럼 세상이 조용했다. 서울로 돌아온 날 저녁 어느 병원 영안실에 문상을 갔다가 우연히 두 사람의 국회의원과 합석했다. 그들은 각기 반대되는 캠프에 줄을 서고 있는 모양으로, 앉자마자 서로 가시돋친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내 고성과 언쟁으로 발전했다. 상가의 막소주 몇 잔과 격양된 감정으로 핏발 선 그들의 눈에서 짙은 적의가 내비쳤다. 장소도 장소고 주위의 시선도 따가웠지만 그들의 언쟁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러고 보니 정치하는 사람들은 휴가도 없이, 많은 시민이 떠나버린 무더운 도회에서 그들만의 싸움을 계속해온 모양이다. 무슨 X파일이니, 어느 동네 땅이니, 아무개 목사 관련이니 하나같이 역정나는 묵은 문제들이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선거풍토에 정책대결은 실종돼버렸다. 누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상대방과는 어떻게 다른지, 이런 문제는 중요 관심사가 못 된다. 더러 신문에 쌍방의 주장을 비교하는 도표 따위가 보도돼도 그 차별성도 진지성도 공허하기만 하다. 토론회나 합동연설회는 흔히 쌍방 지지자들 간의 고성과 멱살잡이가 더 크게 부각될 뿐이다.
선거운동도 “내가 이렇게 잘 하겠으니 나를 찍어 달라”고 호소하기보다는 “저 쪽이 저렇게 나쁜 사람이니 찍어서는 안 된다”는 소위 네거티브 캠페인이 주류를 이룬다. 선거의 속성상 상대방에 대한 어느 정도의 비난과 비판은 불가피하겠지만, 거기에도 금도와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어 주객이 전도되면 정치가 품격을 잃고 추악해지고 만다. 더구나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떠들어놓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의 작태가 지금도 횡행한다. 지난 대선 때의 가증스러운 김대업 사기극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가 또다시 이런 것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걸핏하면 명예훼손 따위로 고소·고발을 일삼는 모습 또한 좀스럽다. 그런 것은 대권을 놓고 건곤일척의 대전을 벌이려는 사람들이 할 일이 못 된다. 가사 아랫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려고 들어도 야단쳐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이러한 고소·고발에 검찰이 기다렸다는 듯이 무슨 특수부 인력을 대거 동원해 수사에 나서는 것이 지혜로운 일인지도 의문이다. 기왕에 수사를 시작한 검찰로서는 가장 이른 시간 내에 가부간 명쾌한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과거처럼 수사를 질질 끌어 그것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면 검찰은 또 한번 씻지 못할 과오를 범하게 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선거 때마다 일회용 정당을 급조하는 병이 이번에도 영락없이 도졌다. 분간하기도 어려운 여러 갈래의 사람들이 탈당·합당·재탈당·창당 등 갖가지 기이한 체위를 구사하며 여름 내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그러다가 며칠 전 그들이 만들어낸 무슨 통합신당인가의 실체를 들여다보니, 그것은 국민으로부터 버림받아 존립의 위기에 처한 권력 주변 세력들이 성형수술로 얼굴을 뜯어고치고 간판을 바꾸어다는 한판의 깨춤에 불과했다. 이런 것이 21세기 한국 정당정치의 현주소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정당을 무슨 소모품쯤으로 알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이들은 서로를 언필칭 ‘당원동지’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같이하는 뜻은 과연 어떤 것일까. 더구나 그 안에는 20명도 넘는 올망졸망한 사람이 ‘대권주자’를 자처하고 있다. 필경 지금부터 TV마다 그들의 신물나는 얼굴 내밀기 경쟁과 전방위 비난·비방전이 전개될 것이다.
이래저래 이 늦여름은 더욱 덥고 더욱 답답할 모양이다. 철새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남 욕하는 일을 정치인 양 착각하는 무리들은 언제쯤이나 사라질 것인가. 더러는 상대방을 좀 칭찬할 줄도 알고 중간중간 유머도 좀 구사할 줄 알면서도, 결연하고 일관된 자세로 국민을 아우르고 그들에게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넣어줄 그런 지도자는 어디에 숨었는가. 이런 기다림은 한여름 밤의 꿈일 뿐인가.
-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한국 휴머니스트회 회장
- <<중앙 SUNDAY>> 2007/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