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대통령의 깊은 신임속에서 미국의 외교정책을 사실상 주무리고 있는 라이스 국무장관은 외교란 단순히 거래(Deal making)가 되어서는 안되며 성공적인 외교를 위해서는 자신이 협상하고 있는 문제의 전략적, 역사적 맥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라이스 국무장관은 금년 1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쿠웨이트를 방문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중동문제는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지만 냉전이 붕괴된 1989년까지 어떤 정치인도 독일통일을 예견치 못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분위기가 성숙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노대통령의 남북정상 회담을 위한 평양방문을 부시 행정부는 내심 어떻게 받아들일까? 조야에서 나오는 반응들은 조심스러운 환영과 함께 경계와 냉소의 기미 마저 감지될 수 있다. 이번 정상회담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으로 기록 될지, 아니면 일부 세간의 우려대로 불과 4여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에 영향을 미치고 흔히 실패한 정책으로 불신받고 있는 햇볕정책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한차례 더 동원하기 위한 단기차원의 정략적 선택이 될 지는 정상회의 구체적 결과가 나와야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밝힌 “역사가 저에게 부과한 몫을 잘 판단하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다짐은 고무적이다.
외교란 국가 이익을 추구하기위한 방법이지만 효과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경지를 넘어 동맹국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평가와 지지를 필요로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선택에 중장기적인 국가이익 그리고 지도자의 철학과 비전을 담아내야 한다. 따라서 매일 새로운 이슈거리를 찾아 진행하는 소위 “과정의 외교”(process diplomacy)는 의심과 불신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역사적 맥락 속에서 거대한 흐름을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위에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노력이야말로 외교협상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소라 할 것이다.
8.28 남북정상회담은 시기와 장소 등의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한과 주변국 모두에게 또 지역의 안정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다. 노 대통령 특유의 자신감과 집념 특히 한국의 경제적 지원 능력 등이 김정일위원장으로 하여금 완벽하고 투명한 핵 포기를 위한 구체적 약속, 예를들면 NPT체제의 조속한 복귀, 금년내 핵 시설과 프로그램의 부능화 완료 등의 조치를 취할 것에 합의토록 한다면 그러한 합의는 여야를 초월하여 온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한편 핵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없이 남북경제공동체 구성을 위한 소위 마샬플랜(Marshall plan)식 대규모 경제지원을 약속하고 내실없는 평화선언 또는 거의 국경 관념이 되었고 서해의 안보에도 중요성을 갖는 북방한계선(NLL)등을 건드릴 경우에는 국내적으로 심각한 국론분열을 이르키고 2.13합의에 기초한 비핵화 로드맵실천에도 오히려 장애요인이 될 것이 분명하다.
과연 현 시점이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적 시기인지를 판단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견이 존재할 것이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또 남북관계가 직면하는 도전에 대해서는 앉아서 기다리기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발사 등이 조성한 불안한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보환경 속에서 좋은 의도만으로도 정책적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것이 남북관계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정책의 선택과 협상에는 신중함과 엄정한 책임이 뒤 따라야 한다. 노무현대통령이 임기를 앞두고 긍정적인 유산을 남기고 싶은 심정은 이해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국민은 여야를 초월한 국민적지지와 열망속에서 또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하여 역사 앞에 떳떳이 책임질 수 있는 정상회의 결과를 기대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세계일보 8/20자>
박 수 길 고려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