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과 빚꾸러기
빚이라는 말은 원래 남에게 갚아야 할 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나 은유적으로 쓰일때는 갚아야 할 은혜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나는 은행빚이 너무 많아서 평생 벌어도 다 갚을수가 없다."고 할 때는 전자의 경우로서 대개 양자간의 단순한 금전상의 채권채무 관계에 불과한 것 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사회에 진 빚이 너무 커서 평생을 갚아도 다 갚을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은 후자의 경우로서 유,무형적 의미를 다 포함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사전에는 빚을 많이 진 사람을 낮잡아 부를 때 빚꾸러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빚꾸러기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대하여 피해를 끼치는 존재이므로 못난사람이다. 그래서 "빚물어 달라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속담이 나온 것 같다.
내가 빚꾸러기에 대한 자각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77년 부장판사로 승진한 나에게 단독집무실과 운전기사가 딸린 관용차가 제공된 후 부터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로부터 이만한 대우를 받고도 법관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사회에 빚을 지게 되는것이 아닌가 하는 자각의식이 들기 시작했다.
못난 빚 꾸러기와 나쁜 빚 꾸러기
능력이 없어서 남에게 빚진 돈을 갚지 못하고 있는 채무자의 경우는 빚 꾸러기의 가장 단순한 행태이다. 그것은 금전상의 채무에 불과하고 그 피해범위도 특정한 채권자에게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빚 꾸러기는 무능한 사람 취급은 받지만, 나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공적, 사적 영역을 막론하고, 어느 기관의 최고책임자가 그 책무를 게을리 하거나 잘못 수행한 경우에는 그 피해가 그 기관전체에 미침은 물론 나아가 사회 전반에까지 누를 끼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피해의 파급효도 위에서 본 단순한 빚꾸러기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크게 미친다. 예컨대 정부가 국가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여 임기5년 동안에 160조 이상의 재정적자를 발생시켰다면, 납세자들이낸 아까운 혈세를 무용하게 낭비한 잘못에 그치지 아니하고, 또 다시 앞으로 그 재정적자를 매꾸어야 될 조세부담을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 체 덮어쓰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과다한 재정적자의 누적은 국가를 빚 꾸러기로 만들어 대외 신용등급이 나빠지는 등 여러 가지 간접적 피해가 발생되어 국민전체의 경제활동에까지 피해를 끼친다. 또 정부가 경제정책을 잘못하여 인플레가 심하게 되거나 경제가 나빠지면 그 여파는 기업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일반 시민이나 근로자들의 가계에 까지도 직,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IMF사태 때 우리국민들은 모두가 그대로 앉은자리에서 재산이 반으로 줄어드는 피해를 입은바 있다. 이와 같이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이 그가 담당하고 있는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사회가 제도적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유형무형의 혜택이 무용한 낭비가 될 뿐 이 아니라, 나아가 사회전체에 새로운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동안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그것이 특정한 상대이든 사회전체이든 그가 받은 것이 그가 해준 것보다 많은 사람은 모두 빚꾸러기로 분류하고 싶다. 공사영역을 막론하고 사회지도층의 지위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그 사회의 존속발전에 필요한 기능을 하라고 부여된 지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지위에는 많은 물적, 제도적 지원이 수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자기가 잘한 경우에는 공도 크지만 잘못한 경우의 피해는 그 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을 항상 겸허하게 명심하고 맡은바 책무를 잘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경우는 무능한 빚꾸러기의 경우이므로 다음에서 보는 나쁜 빚꾸러기와는 구별되어야 하다. 모든 빚꾸러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는 존재라는 면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으므로, 빚꾸러기 된 자는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루 속히 빚을 갚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이고 법적인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빚꾸러기 중에는 아예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거나,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거나 미안한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빚꾸러기들을 많이 본다. 뿐만 아니라 빚쟁이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재산을 은닉, 도피하는 등의 적극적인 채무면탈행위까지도 한다. 이들은 단순한 못난 빚꾸러기가 아니라 나쁜 빚꾸러기들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과거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직무상 잘못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우선 대 국민사과를 하고 앞으로 개선하여 잘 해나가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치사회에는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 졌다. 인간은 누구나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잘못 할 수 있는 위험성도 항상 안고 있다. 따라서 정치지도자급인사들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함은 물론 나아가 책임을 지겠다고 겸허하게 나서야 한다. 그러한 책임의식(빚 꾸러기의식)을 가져야만 그들을 믿을 수가 있고, 또 앞으로 그들에게 다시 일을 맡길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책임을 은폐하거나 상대방에게 전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다반사로 연출하고, 충언을 해주는 언론에 대하여 오히려 시비를 걸고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으며 국력을 탕진한 일이 많았다. 심지어 잘못을 계속 반복하는 오기를 부리며 오히려 국민의 공론을 나무란 일도 있다. 이 정도의 빚꾸러기 행태는 나쁜 빚꾸러기의 단계를 넘은 무서운 빚꾸러기라고 해야 될 것 같다. 그들의 이러한 나쁜 빚꾸러기 행태는 구체적인 당해 행위로 끝나지 않고 전 국민과 후세들에게 그러한 나쁜 행태를 오염시키는 무서운 악영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일생을 살면서 빚 꾸러기신세를 면치 못한 사람이 자기의 2세를 잘못 길러서 후손들까지 사회에 누를 끼치는 빚꾸러기로 살게 했다면 그는 참으로 무책임하고 못난 빚꾸러기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더욱이 공적 영역의 나쁜 빚꾸러기 지도자들이 저지른 나쁜 선례를 후세에까지 오염시키고 피해를 대물림 했다면 그것은 나쁜 빚꾸러기를 넘어선 더욱 가공할 빚꾸러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절대로 지도자의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전국의 지방 법원에는 빚을 갚지 못하여, 부득이 파산신청을 하는 딱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그 각 개인의 문제를 넘은 우리사회전체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빚꾸러기가 된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본인의 무능함이나 게으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각계각층의 지도자급 빚꾸러기들 특히 나쁜 빚꾸러기들은 파산 신청하러 오는 그 “못난” 빚꾸러기들이 혹시 자기들의 직무수행의 잘못으로 양산된 빚꾸러기가 아닌지 냉정하게 성찰해 보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나도 빚을 다 갚지 못한 빚꾸러기다.
나는 직업변호사를 은퇴한 후에도 내가 설립한 법무법인 태평양으로부터 품위유지에 부족함이 없는 연금을 받으며 편안히 제 2의 인생을 향유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의 현역 법조인 시절,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 하나님과 우리사회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는 우리사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아직 다 갚지 못하고 있는 빚꾸러기라는 의식을 떨칠 수가 없다.
그래서 현역 법조인 시절 다 갚지 못한 우리사회에 대한 빚을 은퇴 후 에라도 조금이나마 더 갚기 위해 금년부터는 좀 더 열심히 노력해야 되겠다. 명색이 이 사회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타어난 사람이 사회에 누를 끼친 빚꾸러기 신세로 인생을 마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태평양 명예대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