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에 관한 보도 즉 어느 누가 어떤 내용의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과 방송의 뉴스 시간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형법 제126조는 ‘검찰, 경찰 기타 범죄 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범죄 수사의 직무를 행하는 자 등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것을 형벌로 금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위 형벌 규정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이 규정을 적용하여 처벌한 사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수사직무수행자들이 이 규정을 철저히 준수하여 왔기 때문일까?
그러나 언론 보도에 나오는 피의사실과 그 내용은 검찰이나 경찰 등 수사기관의 관계자가 밝힌 바에 따랐다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내용과 수사 진행의 상황까지 상세히 보도하는 것을 보면 그 보도의 취재원이 대개 수사직무수행자임을 짐작하게 한다. 만일 수사직무수행자가 취재 기자에게 피의사실을 알리거나 관계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놓아두어 그것이 보도 되었다면 그러한 행위는 피의사실공표죄의 범죄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피의사실공표죄는 현행 형법이 제정되기 전의 구형법이나 일본 형법에는 규정이 없는 범죄이다.
이 죄는 명예훼손죄와는 그 보호법익이 다른 것인데 자칫 이를 유사한 범죄로 인식하여 피의사실의 공표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위법성이 조각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전자는 수사의 공정과 원활이라는 국가적 법익을 그 주된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인 명예라는 개인적 법익을 그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으므로 양자는 그 죄질 및 차원이 다른 범죄이다.
형법이 명예에 관한 죄와 달리 피의사실공표죄를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죄의 장(章)에 규정한 것은 이처럼 양 죄의 본질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피의사실의 공표를 이에 관한 별도의 처벌규정이 없는 일본에서와 같이 명예훼손의 측면에서 취급하려고 한다면 이는 우리의 실정법을 무시한 잘못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피의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명예훼손죄에 있어서의 사실 또는 허위의 사실과는 달리 수사기관이 어느 범죄가 범하여 졌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어 이를 수사의 대상으로 삼기로 사건부에 등재함으로써 성립하는 개념이다. 즉 피의사실은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됨에 따라 증거가 확보되고 형벌청구를 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판단되면 검사는 법원에 공소를 제기하는 것인데 그때에 피의사실은 비로소 공소사실이 되고 그 공소사실이 법원의 공판절차를 거쳐 적법한 증거에 의하여 사실로 증명되면 비로소 범죄사실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사실이 수사의 결과 증거가 없거나 기타 사유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검사는 무혐의처분이나 기타 불기소처분으로 피의사건을 종결한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태에 있는 피의사실을 공소제기 전에 더욱이 증거 수집을 하기도 전에 수사직무수행자들이 이를 공표하고 나면 공표자는 공표의 책임감에서 여론을 의식하고 공명심에 자극되어 수사의 공정을 잃기 쉽게 되고 피의자 등 이해관계인들은 수사에 대비하여 증거를 인멸하는 등 원활한 수사를 저해할 염려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여부가 밝혀지기도 전에 피의자의 명예 등 인격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해 대립 당사자에게 악용의 소지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형법은 수사의 공정과 원활이라는 국가기능과 함께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사직무수행자의 피의사실 공표행위를 범죄로 규정하여 형벌로 금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피의사실공표죄는 그 자체가 수사의 공정과 원활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주된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고 또 피의사실이 진실한 사실인지 여부는 성질상 장래에 밝혀지게 예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위법성이 조각된다는 논리는 당초부터 성립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의사실공표죄의 규정이 속하고 있는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죄의 장(章)에는 명예에 관한 죄의 장(章)에 규정된 형법 제310조와 같은 위법성의 조각에 관한 규정이 없는 것이다. 1992. 7. 6. 제출된 정부의 형법 규정안에서 피의사실공표죄의 단서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때에는 벌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을 신설하려 하였으나 입법화 되지 아니한 점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사기관이 세인의 이목을 끄는 사건일수록 수사에 착수하면서 피의사실을 언론매체에 흘려 보도하게 하고 심지어 수사의 진행 상황까지 출입기자들에게 브리핑한다는 보도도 가끔 접하며 나아가 피의사실과 함께 소환에 응하는 피의자의 영상까지 방송매체에 들어나게 허용하는 것을 보면서 피의사실공표죄의 처벌규정은 이미 사문화 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오늘날 세인의 이목을 끈 흉악범에 의한 살인사건이나 숭례문 방화사건 등의 수사 과정이 피의자의 얼굴이 가려진 채 방영되자 경찰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여 언론에 보도하면 어떤가에 대한 논란이 또다시 등장하는 것 같다. 혹자는 피의자가 자백하고 확실한 물증이 있다면 경찰이 피의자의 얼굴을 가려줄 필요가 있느냐고 하고 또는 중범죄자의 초상권보다도 범죄예방의 공익이 크다느니, 혹은 온 국민의 관심사가 되는 공익적 사안으로 그들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피의사실공표죄의 법익을 명예훼손죄나 초상권 침해와 같이 개인적 법익이라고 오인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 피고인도 아닌 피의자인 단계에서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은 명백히 피의사실공표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범죄는 공익과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사직무수행자가 범죄예방의 공익을 위하여 흉악범인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는 기실은 호기심의 충족이나 궁금증을 풀어보자는 것이고 범죄예방의 목적을 내세우는 것은 구실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미 당해 피의자가 수사기관에 체포 구금된 이상 그 피의자에 의한 동종의 범죄는 저지를 수 없게 되어있고 제3자의 모방범죄예방은 그 피의자가 기소되어 엄한 처벌을 받음으로써 그 일반 예방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특정한 범죄의 피의사건에 관하여 수사직무 관련자들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을 허용할려면 이는 형법상의 피의사실공표죄에 대한 예외에 해당하므로 특정한 범죄를 한정하여 법률로써 이를 규정하여야 할 것이다.
피의사실공표죄는 국민의 알 권리의 보장에 바탕을 둔 언론보도기관의 표현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다는 입법론적 의견도 있지만 이 규정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수사직무수행자들이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며 언론기관은 필요하다면 수사직무수행자 이외의 다른 취재원을 통하여 피의사실과 수사상황을 취재하여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인 때에만 이를 보도하고 수사기관이 수사권을 적정하게 행사하는지 감시하면 될 것이다.
이처럼 피의사실의 공표를 금하는 실정법이 엄존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법률규정의 규제 대상인 수사직무수행자가 이를 위반하는 행위를 하고 또 국민이 이를 그대로 용인하는 것은 법치주의의 포기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언론기관은 가장 손쉬운 취재원의 하나를 잃을 염려가 있으므로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리는 현재의 상황을 마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법률규정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법률의 개정절차에 의하여 이를 바로잡아야지 처벌 법규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그대로 둔 채 특히 공무원이 이를 위반하는 일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변호사 / 전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