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으로 배우는 역지사지
허경호 (경희대 교수·언론소통학)
“공화당 지지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통령 영부인으로 8년간 백악관에 머물고 민주당 여성 대통령후보로까지 나서게 한 학생시절의 경험은 ... ”
필자는 최근 한 보수 신문이 주관한 역지사지 토론의 사회를 맡았다. 최근 여야는 물론 정부와 시민단체 및 종교단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4대강 사업에 대해 여야의 국회의원들이 서로의 입장을 바꿔서하는 토론이었다. 이 같은 형식의 토론을 시도했던 취지는 마치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서로 막무가내인 여야에게 상대의 입장에서 논제를 접근해 봄으로써 대치국면을 완화시키고 상호이해의 폭을 넓혀 사회통합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여야 국회의원 한 사람씩을 불러놓고 역지사지 토론을 시킨다고 4대강 사업에 당장 무슨 변화가 생길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첨예한 이슈에 대해 야당 국회의원이 나서 4대강 사업이 왜 필요한가를 말하고 여당 국회의원은 이 사업에 왜 반대하는가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여야 국회의원이 사전에 합의한 역지사지 토론의 규칙이 없었다면 이런 장면을 목격하기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흔히 소통기법 훈련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 중의 하나가 소위 감정이입(empathy) 기법이다.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상대의 느낌을 체험해보는 기법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일상의 갈등상황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바로 “당신의 입장은 이해하겠는데…”라는 선행문장이다. 얼핏 보면 상대의 입장에 서 본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상대를 더 몰아붙이기 위한 전략적인 언술에 지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솔직히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입장에 서 보는 것보다는 촌각을 아껴 자기 자신의 입장에 대한 근거와 반박논리를 개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화당 힐러리가 민주당 후보가 된 사연
토론 훈련을 하다보면 자신의 신념에 기반을 둔 토론을 할 때도 있지만 그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토론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입장에서 토론훈련을 하다보면 신념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훈련에서도 그런 경우를 목격한다.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인 《살아 있는 역사》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고교시절 정치교과를 가르쳤던 제럴드 베이커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대통령 후보 모의토론을 열면서 학교에서도 이름난 공화당 지지자였던 힐러리에게 당시 대통령이자 민주당 후보였던 린든 존슨의 역할을 맡기고 그 반의 유일한 민주당 지지자였던 엘렌에게는 공화당 후보였던 골드워터의 역을 맡겼던 것이다. 둘 다 모욕감을 느껴 베이커선생님께 항의했지만 입장을 바꿔서 토론을 해봐야 시야가 넓어지고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승복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놀라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힐러리는 도서관에서 민주당 강령이나 백악관 성명서는 물론 존슨 대통령의 민권과 의료보험에 관한 견해를 공부하면서 투자하는 시간이 아까워 분통을 터뜨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민주당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중에 민주당 대통령 영부인으로 8년간 백악관에 머물지도, 민주당 여성 대통령후보로 나서지도,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과 미국의 국무장관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친구였던 엘런 역시 공화당 지지자로 변신했다고 한다. 물론 당사자들이 고교생의 신분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들의 변신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필자는 이런 것이 바로 토론의 힘이라고 본다. 아무리 고교생이라고는 해도 지지하는 정당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바로 상대의 입장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에서 진정한 역지사지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단계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 이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전략적인 언사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주변에서 부쩍 토론문화의 부재, 토론능력의 부재를 한탄하는 소리를 듣는다. 토론능력이란 입장이 다른 사람과 건설적이고 협동적으로 소통하여 상호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초적인 민주시민 역량으로 이 같은 능력을 갖추고 있을 때라야 비로소 상생, 소통 , 선진의 정치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 학교에서 토론하는 방법이나 문화를 교육시켜왔는가 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대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토론식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 고교나 대학에 와서 토론을 잘 할리 없고, 사회로 나와서 토론을 잘할 수 없는 것이다.
토론교육 없이 선진국 진입 어림없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세계 12-3위권이라고 한 지가 벌써 10여 년 전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했다고 보는 경우는 없다. 나는 단언 컨데 우리의 현재 교육방식인 비교와 평가를 위주로 한 주입식교육제도를 고집하는 한 결코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되는 상대평가와 양적평가가 학교교육을 넘어 공무원 선발은 물론 대부분의 기업의 인재선발에 까지 고착된 현재의 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선진국 진입은 요원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초등학교에서부터의 수업방식을 토론식 수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토론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주제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며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또한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며 우호적인 학습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 특히 정해진 정답을 찾기보다는 급우들과 더불어 정답을 만들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토론을 통한 교육은 단순한 암기와 단편적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남과의 소통을 통하여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토론을 통해 어릴 때부터 남과 소통을 통하여 배우며 다름을 음미하고 역지사지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여 줄을 세우지 않고 개인의 특장에 맞는 상담을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절대평가와 질적 평가이다. 이를 위해 교사의 역할은 관찰과 상담이 되어야 한다. 토론식 수업은 바로 이 같은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는 교육방법이다.
흔히 토론식 수업하면 질서가 없고 수업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교수법으로 인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이는 토론에 대한 이해와 안목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다. 토론식 교육방법은 철저한 준비와 더불어 교사의 엄격한 관찰이 요구되는 교수법이다. 이 같은 토론식 교육방법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예비교사들에게 토론식 수업의 교수법에 대한 충분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한 현재의 교사들에게도 연수를 통한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토론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발견하는 방법으로 제시했던 문답식 논증법(dialectic)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편에서는 논제에 대한 찬성 혹은 반대 주장을 편 후 그 같은 주장의 근거를 밝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 같은 주장의 근거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추궁해 나가는 과정에서 더 나은 주장 혹은 진리가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 같은 과정에서 상대는 나의 적이 아니라 내 주장이나 근거의 오류를 지적해주고 더 정교한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협조자요 조언자로 인식하는 자세가 생기는 것이다. 즉, 토론은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인식하게 해 준다. 그러나 이 같은 토론문화나 능력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장기적이고 누적적으로 경험이 쌓였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국민이 초등학교에서부터 토론식 수업을 통해 토론역량을 갖출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면 너무 요원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