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의 망신뿐인가?
이철영<경희대학교 객원교수,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으로 사회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정부가 이번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리더십이나 외교적 역량 못지않게 정치권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으로 사회가 한동안 떠들썩했다. 언론들은 사건 발생 직후 침입자들의 정체가 "무기 수출입 거래와 관련된 경쟁국 스파이이거나 한국·인도네시아 간 경제·군사 협력을 견제하려는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가 이 사건에 국정원 직원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커지자 신문, 방송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국제적 망신당한 국정원"이라고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운 건 국정원이나 외교부뿐만이 아니다. 이 사건의 정치적인 파장에 가슴을 졸일 여당과 청와대, 그리고 이 사건이 우리나라 국익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전체 국민 모두에게 당혹스러운 일이다. 궁여지책으로 외교부는 기자들에게 "이번 사안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것이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 고려를 해달라"며 보도 자제를 요청하는 등 파문을 조기 수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중앙일간지(2011.2.25.자)에 한 우익단체가 "흥신소보다 못한 건 국정원이 아니라 언론과 정치권이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국정원의 한심한 실수보다 더 한심한 것이 이 사건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태도라는 요지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국가정보기관 종사자들은 "익명에의 정열(passion for anonymity)"을 최고의 명예와 보람으로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를 위해 일한다. 1961년 우리나라의 국가정보 기구인 중앙정보부가 창설될 당시의 부훈(部訓)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이었다. 그 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에 '정보는 국력이다'로 바뀌었다가 10년 만인 2008년에 국가정보원의 원훈(院訓)이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으로 변경되었다.
과거 중앙정보부의 부훈(部訓)이나 새로 바뀐 국정원의 원훈(院訓)은 익명성을 우선으로 하는 정보 활동의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정보기관 요원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거나 위장을 하고 활동을 하며, 국가에서 해외로 파견되어 일하는 정보 요원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는 것은 모든 나라가 서로 다 알면서 묵인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공식적으로 신분을 위장하는 것을 '공식 위장(official cover)'이라고 하며, 정보기관 요원이 해외에서 정보 활동 중 문제가 생길 경우 외교관 신분 보장을 요청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나라 국정원의 수장이 스스로 '익명성'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한 꼴을 보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극찬했던 김만복 국정원장은 재임 중 아프간 인질 석방 협상에 국정원 직원과 함께 선글라스를 쓰고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선글라스맨'이란 비난을 받았고,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과 악수하면서지나치게 허리를 굽히는 등의 돌출 행동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김 원장은 지난 대선 전날인 2007년 12월 18일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김양건 통전부장에게 대선 결과 및 차기 정부의 대북 정책 예측 등의 국가 기밀을 누설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화록을 고의로 언론에 흘리기까지 한 사실이 밝혀져 결국 역대 국정원장 최초로 '정보누설'을 이유로 경질되면서 국정원을 국내외에서 망신시키고 국정원 조직의 사기와 자부심을 뭉개버렸다.
이런 사람이 느닷없이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 2011년 2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반도 상황은 이명박 정권이 남북 관계를 악화시켜 온 결과이며 연평도 포격은 이명박 정부의 '대결적 대북정책'이 초래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해 '폭침' 대신 '침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조사 결과도 대부분 부정하고,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는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북한 김정일 간의 대화 내용까지 이 기고문을 통해 공개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김 전 원장은 국가정보원 퇴직자 모임인 사단법인 양지회의 회원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이번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이 국정원 직원에 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수장이 이끌어 왔던 우리 국정원이 급기야는 우리나라 수도 한복판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 특사 숙소를 털다 현장에서 덜미가 잡히는 코미디를 저지른 것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정보전을 수행해야 할 국정원 요원들이 자국 땅 안방에서 가장 기초적인 정보 임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나사가 풀린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정보활동의 '익명성'이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하고 일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사건은 흔적을 남기는 것은 고사하고 한 나라의 정보기관이 홈 그라운드에서 정보 도둑질을 하려다 상대에게 현장에서 들킨 것이다. 그야말로 국정원 원훈(院訓)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에서 들킨다"라고 고쳐야 할 판이다.
오늘(3월7일) 아침 신문과 방송에 우리나라의 고고도(高高度) 무인정찰기(글로벌호크) 도입 및 운영과 관련한 군 기밀이 중국에 의해 해킹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국가 간의 정보전쟁에 있어서 상대국의 중요 정보를 빼내기 위한 도청과 자료의 탈취, 복사, 해킹 등의 방법은 전 세계 정보기관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각국의 정보기관들은 상대 국가들로부터 이런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는 사실을 서로 알면서도 각자의 실리를 위해 적당히 넘어가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혼란시키기 위해 고의로 역정보를 유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이 상대방에게 노출되면 정보망과 정보 활동에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이번 외국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처럼 상대방에게 현장에서 발각되는 경우에는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정부가 이번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숙소 침입 사건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리더십이나 외교적 역량 못지않게 정치권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우익단체의 광고가 지적하듯이 이 사건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과 언론의 보도 태도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를 우선 신중하게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사건에 있어서도 야당은 정부와 여당을 비난하는 데 주력하여 국익에 반하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 준다는 책무를 앞세워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국익이나 국민의 인권은 뒷전으로 하고 특종 경쟁에 급급하는 듯하다. 이번 사건처럼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비밀 활동이 국내외로 노출되는 민감한 사건에서조차 국정원 직원의 숙소 침입 상황을 그래픽으로 상세히 설명까지 해가면서 보도경쟁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를 돌아봐야할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해 국정원이 비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한편, 국가의 핵심 정보업무를 수행해야 할 국정원이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언론과 국회를 비롯한 우리 국민들이 국정원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 또한 중요할 것이다. 국정원은 국익을 위해 아무리 큰 성과를 올려도 그 업적을 공표할 수 없는 정보조직이다. 국정원의 정보요원들은 애국적 헌신을 바탕으로 그야말로 "음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런 조직이 그 동안 우리나라의 국익을 위해 묵묵히 많은 일을 했을 것으로 믿기 때문에 국정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사건에 관한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국정원 간부들의'NCND'(neither confirm nor deny: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 입장에 대해 분통을 터뜨린 여야 의원들이나 이와 같은 국정원의 태도를 비난하는 듯한 보도를 하는 언론은 과연 국정원에서 어떤 다른 답변을 했어야 옳을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정보활동 중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것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이번 사건을 빌미로 정부와 국정원에 대한 비방과 책임공방을 계속한다면 이는 현 정부나 국정원에 망신을 주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치부를 드러내 국익을 크게 해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오죽하면 인도네시아 당국에서조차 우리의 입장을 배려하는 듯한 발표를 했을 것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