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을 회상하며
굿 소사이어티 회원 박준병
(예)육군대장
3선 국회의원
서경대 석좌교수(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때 나는 대전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의 적극적 지원과 모택동의 확고한 후원 약속 하에 최첨단 현대 무기로 중무장 한 후 6.25 당일 새벽 4시경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하였기 때문에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계속 속수무책으로 밀리다가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7월15일 가족과 함께 끝없는 피난민 대열에 끼여 걸어서 대구까지 갔으며 다시 8월 15일 경남 밀양으로 내려가 밀양천 다리 밑에서 동생이 얻어온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비참한 피난생활을 하였다.
9월 15일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나는 1년 10개월 사병생활을 하다가 52년 7월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 하였다.
낙동강 왜관의 다리가 헌병에 의해 봉쇄되어 포성이 요란한 가운데 동생을 업고 헤엄쳐 도강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며 51년 봄 3군단 배속 되었던 나는 중공군의 춘계공세로 군단이 와해되었던 현리 전투를 체험하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절감한 바 있었다.
개전 초기 왜 우리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 까지 후퇴 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성찰해보아야 한다.
1945년 8.15 해방직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하에 자기의 집권계획에 방해가 되는 요인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사실상 한반도의 북쪽을 장악하고 있다가 1948년 9월 북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표명하였으며 수행하였던 박헌영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밀고 내려가면 남한의 30만 명 남노당원이 일제히 일어나 봉기 할 것입니다” 라고 김일성의 남침책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스탈린은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38선은 소련과 미국이 합의하여 결정한 분할선 임을 말하고 답변을 유보하였으나 10개월 후 인 1950년 1월30일 김일선의 남침계획을 승인하였다. 그것은 1949년을 전후한 기간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49년 6월 30일 주한미군이 철수완료 하였으며 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선포하면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은 제외된다고 하였다.
1949년 7월 소련은 그처럼 소망했던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였으며 1949년 10월 장개석군을 중국 본토에서 몰아낸 모택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 하였다. 이에 힘을 얻고 남침을 승인한 스탈린은 1950년 4월 극비리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에게 모택동과의 협의를 지시 하였으며 5월 13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모택동을 방문하여 협조를 요청하였다,
별도 경로로 스탈린의 승인을 확인하였던 모택동은 미국이 개입하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6. 25 전쟁 개전시 북한군의 병력은 15만 여명이었으며 그중 4만 5천여 명은 모택동 휘하에서 중일전쟁 그리고 1945년 이후 장개석군과 싸워 전투경험이 풍부한 한인 중공군으로 중국의 공산화후 북한군에 편입된 요원이었다.
1948년 소련군이 공식으로 철수한 이 후 에도 3천여 명의 소련군 고문단이 교육훈련을 담당하였으며 김일성은 주 1회 정도 북한 점령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스티코프 북한주재 소련 대사에게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이에 비하여 우리 한국군은 총 8만여 명이었으나 한 대의 전차도 없는 취약한 군 조직이었으며 특히 3만 5천여 명은 소총만 갖은 비무장상태이었다.
김일성의 무모한 도발로 시작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인명피해는 남북 합쳐서 수백만 명이 살상되었으며 재산피해는 모든 건물의 40%이상이 파괴되고 전국토가 황폐화되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6.25전쟁을 회상 하면서 미국, 소련, 중국 북한에서 발견된 많은 전쟁 자료들을 면밀히 검토하여 전쟁의 실상을 연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김정일 집단은 6.25 전쟁의 피해에 대한 죄의식은 고사하고 국민은 굶어죽이면서도 아직도 적화통일의 망상을 버리지 않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전법을 개발하면서 대한민국을 전복하거나 파괴하는데 필요한 요원들을 양성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보유는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북한의 핵보유가 미국의 적대행위에 대한 방어용이라 주장하지만 한국에 대하여서는 공격용이다.
북한이 핵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여도 관리에 문제가 생기면 그 재앙은 우리나라에도 미칠수 있다.
북한의 핵을 폐기시킬 수 없다면 우리도 핵을 개발하여 전쟁의 억제력을 확보 하여야 한다.
우리가 결정만 한다면 2~3년 내에 우리도 핵개발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원료를 갖고 있다.
핵개발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북한의 핵 폐기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도 우리의 입장에 동조하도록 꾸준히 설득해야 한다.
이미 민주화 되어 언론의 자유가 확고하게 보장된 우리 사회는 지금 모든 문제에 관하여 지나칠 정도로 과열된 백가쟁명의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안보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열세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 전쟁의 피눈물 나는 체험을 교훈으로 삼아 온 국민이 철통같이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는 이 땅에서 제2의 6.25가 발발되지 않도록 사전에 막아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