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식과 공교육
이철영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1년 전 전세계는 일본 동북부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의 참상에 경악했다. 또한 전세계인들은 대지진의 참화 속에서 일본인이 보여준 자제력과 남을 배려하는 미덕에 감탄했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속에 흔히 볼 수 있는 약탈, 폭동, 무질서 등의 공황(恐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부서진 슈퍼마켓 앞에서 수백 미터의 줄을 서서 새치기나 불만의 소란조차 없이 차분히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의 시민의식과 침착한 모습은 전세계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전세계의 언론들은 일본인의 인내와 질서를 '인류정신의 진화'라며 극찬했다.
쓰나미가 몰려 닥치던 와중에도 마을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대피방송을 하다가 실종된 20대 여성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고, 난민 임시수용소를 방문한 총리에게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 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서는 한 일본인 남성의 모습을 보고 경찰서장을 포위하고 구타하는 폭력시위대를 가진 우리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2009년 11월 부산 사격장 화재로 10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숨졌을 때에도 부산에 온 유가족들은 목놓아 통곡하거나 소리치며 한국 당국을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는 것조차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원망과 슬픔을 눈물로 삭이면서 자제하는 것이다.
이런 일본인의 자제력과 시민의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본인은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가 생활화 되어 있어 남을 대할 때 지나칠 정도로 예의가 바르다. 사회생활에서는 인간관계와 집단적 조화를 중시하며, 개인이나 가족보다 회사나 사회가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일본의 문화는 남을 배려하고 자신을 최대한 절제하는 '수신(修身)의 문화'이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 것과 '준반(順番)'(차례를 뜻하는 일본말)의 중요성을 먼저 배운다. 이런 문화와 교육을 통해 일본인은 자연스럽게 성숙한 시민의식을 터득하게 된다.
작년 10월 AP통신 등 미국 매체들은 미국의 한 버스 속에서 찍힌 CCTV 동영상을 소개했다.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버스를 몰던 한 여성운전기사가 운행 중 우는 아기의 엄마에게 “시끄러워 운전을 못하겠네”라고 소리치다가 아예 버스를 세운 뒤 아기 엄마에게 “아기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버스를 운전하지 않겠다”는 폭언을 내뱉었다. 결국 아기 엄마가 다른 승객들을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내릴 수밖에 없게 되자 승객들이 “아기가 운다고 내쫓아서 되겠느냐?”라고 버스기사에게 항의했고, 버스기사는 “그럼 당신들도 내리든지”라고 되받았다. 승객들은 결국 모두 버스에서 내려버렸다. 전세계 네티즌들은 평범한 미국시민들이 보여준 시민의식에 찬사를 보냈다.
작년 7월 노르웨이 연쇄테러범 총격사건으로 77명이 숨진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오슬로 시민들은 분노와 항의의 시위 대신 시민 스스로 ‘시민추모대회’를 열어 15만 추모 인파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와 국민화합을 염원하는 평화의 집회를 가졌다. 집회에 참석한 왕세자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지만 관용과 자유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함”을 호소했고, 시민들은 무력한 대처로 비난 받던 경찰에게도 꽃을 건네며 노고를 격려했다. 불행한 참사를 국민화합의 계기로 승화시킨 성숙한 시민의식의 한 단면이다.
서구사회의 시민의식은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 윤리를 근간으로 하는 에티켓과 준법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양 에티켓의 기본은, 첫째,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둘째, 남을 불쾌하게 하지 않는 것, 셋째, 내 몫 이상을 탐하지 않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통해 에티켓과 준법정신을 배우고 사회생활을 통해서 더불어 사는 지혜와 예의를 체득함으로써 성숙한 시민의식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2009년 용산재개발지역에서 무지막지한 폭력과 방화로 농성자 5명과 경찰 1명이 숨진 사건을 주도한 전철연은 당시 일부 종교계와 합세하여 1년이 다 되도록 장례식도 치르지 않으면서 인도(人道)를 점거하고 정부와 국민들을 괴롭히더니 후한 보상금을 받아낸 후 슬그머니 꼬리를 감췄다. 그런 전철연이 현재 용산역 앞 재개발 3구역에 벌써부터 “갈 곳 없는 철거민 여기가 무덤이다”,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날 수는 없다”, “제2의 용산참사 현재 진행 중”이라는 등의 섬뜩한 현수막을 걸어놓고 또 다른 폭력시위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느닷없이 지난 2월 7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폭력·방화로 6명을 사망케 한 수감자 8명 전원의 사면을 요청하는 건의서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처럼 우리사회 전 계층에 걸쳐 곳곳에서 억지와 궤변이 판치고 있다. 우리의 시민의식은 예의와 절제, 공중도덕과 질서의식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사회나 정직과 덕행(德行), 준법정신과 에티켓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사회의 시민의식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헌법 위에 ‘떼법’이 군림하고 무교양이 판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수준이며 시민의식의 수준이다.
작년 3월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은 우리나라 청소년이 문화·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이웃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공동체의식’ 면에서 세계 최하위 수준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2009년 “국제교육협의회(IEA)”가 세계 36개국 중학교 2학년 학생 14만여 명을 설문 조사해 작성한 ‘국제 시민의식 교육연구(ICCS)’ 자료를 토대로 세계 36개국 청소년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을 계산한 결과, 한국 청소년의 점수는 1점 만점에 0.31점으로 35위에 그쳤다고 한다. 특히 한국 청소년은 사회역량지표 중 '관계 지향성'과 '사회적 협력' 부문 점수가 0점으로 36개국 중 꼴찌로 나타났다.
‘세계화’와 ‘다문화’를 키워드로 하는 글로벌시대를 이끌어갈 우리 청소년의 공동체의식이 세계 최하위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지만, 이는 경쟁지향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사회분위기와 가정과 학교에서의 인성교육을 도외시한 입시위주 교육이 초래한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서구화 과정에서 인(仁)과 충효사상을 근본으로 한 유교윤리가 퇴색하여 부모와 지식간에 권위와 효도의 위계가 무너지고 인간관계에서 믿음, 겸양, 양보의 윤리가 무너졌다. 1974년에 채택된 고교평준화 정책은 대학진학 위주 학업으로 공교육의 황폐화 및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교육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인성교육 부재의 주입식 학교교육과 부모의 자녀 과잉보호는 학생들이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시민의식을 터득할 기회를 아예 박탈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남의 얘기를 들을 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무례한 독불장군들을 키워내고 있다. 이들은 결국 나라나 사회는 고사하고 가족도 이웃도 친구도 안중에 없는 비사회적, 반사회적인 이기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요즘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도 시민의식과는 거리가 먼 학부모들이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왕따’ 가해자 부모들이 "한 대 때린 게 무슨 폭행이냐?", "다른 애들은 우리 애한테 맞고도 잘 놀았다"라는 등의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피해자 집에까지 찾아가 “죽여버리겠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한다. 부모들이 이 지경이니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거나 성희롱하고 학부모가 교사 머리를 발길로 걷어차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노인에게 순서를 양보한 자녀를 그 자리에서 나무라는 젊은 엄마도 있다. 자녀의 교육은 자녀 앞에서 모범을 보이는 부모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부모들로부터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도덕성과 시민의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시민의식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는 마음가짐과 생활태도이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민주시민의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올바른 시민의식의 정착 없이는 민주법치사회를 기대할 수 없다. 민주시민에게는 준법정신, 적극적인 권리의 행사와 사회적 의무의 이행, 자유의 올바른 행사 등이 요구되며 이를 자발적으로 준수하는 정신이 민주시민의식이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타락과 시민의식의 붕괴는 공직자의 부패와 경거망동, 정부와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 낮은 투표율, 병역 기피와 탈세 등 애국심의 실종과 극단적인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와 폭력시위의 난무, 패륜과 가정폭력, 교권의 붕괴와 청소년 범죄, 불량식품과 유언비어의 범람 등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난다.
벌금형을 받고 출소한 후 개선장군이나 된 듯 국민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전횡을 일삼고 있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낯뜨거운 근무성적으로 법관재임용에서 탈락한 후 “헌법소원” 운운하는 판사와 상식에 반하는 판결과 경망스런 막말을 일삼는 일부 법관들, 국익은 뒷전으로 하고 한·미 FTA 문제를 총선전략으로 내세워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민주통합당, 야당을 좇아 엉거주춤한 복지공약을 내놓고 표심(票心)을 살피고 있는 새누리당, 국방, 민생, 제도개선 관련 중요 법안들은 내팽개치고 의원정수를 300명으로 늘리는 법안을 전격 처리한 국회의원들, 승부조작으로 얼룩진 프로스포츠계와 이들의 반칙과 배신에 무감각한 스포츠팬들, 대리시험으로 성적조작이 만연하는 대학가…… 이들 모두가 이 사회에 만연한 도덕적 해이와 시민의식 붕괴의 심각한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민주사회의 공교육의 과제는 국민 모두가 동등한 자유를 누리는 인격체이자 사회구성원이라는 의식을 지닌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공교육이 시민교육(civic education)이다. 시민교육은 국가가 국민들에게 국가의 책임과 의무를 이해시키고, 시민들로 하여금 삶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인간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길러주는 시민의 사회화 교육이다. 이에 비해, 학교교육 이전의 유아교육과 학교교육 이후에 이어지는 평생교육을 사회교육(social education)이라 하며, 성인(成人)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이라는 점에서 ‘성인교육(adult education)'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1982년 말에 최초로 ‘사회교육법’이 성문화된 후 1999년에 ‘평생교육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2007년 말에 개정된 ‘평생교육법’이 발효되었다.
우리나라 사회교육의 역사를 돌아보면, 광복 직후에는 성인인구의 78%에 달하는 문맹을 퇴치하기 위한 기초교육이 우선과제였다. 그 후 5•16군사정권 출범 이후 ‘재건국민운동’이 사회교육으로 추진되다가, 1960년대 말에 ‘새마을운동’으로 계승되어 1970년대 전반에 걸쳐 농촌개발을 위시로 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20세기 말에는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평생에 걸친 학습이 요구되는 ‘지식기반 사회’가 도래하여 기업을 필두로 정부, 공공기관, 사회단체 등 모든 기관에서 전체 고용자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확대하였다. 이처럼 사회교육은 당 시대의 사회적 필요에 따라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내용 면에서도 기초교육, 도덕, 교양, 사회, 전문기술, 체육, 예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21세기에는 글로벌시대의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과 세계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교육이 요구된다. 세계시민의식이란 세계를 전세계인이 더불어 사는 하나의 사회로 인식하고, 정의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지구촌의 다양한 정치·사회·경제·문화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기여하려는 미래지향적 의식이다.
최근 서울에서의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포장마차의 바가지 횡포에 이어 2km 거리에 ‘33만원’의 바가지요금을 뜯어낸 택시기사 소식으로 일본 현지 네티즌들이 격분하고 있고, 태국에서는 한국의 한 남성 댄스그룹의 몰상식한 언행으로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반한(反韓)감정이 들끓고 있다. 국익과 국격(國格)을 손상시키는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 실종과 무지와 무교양의 전형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엄마가 ‘아프리카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죽기도 한다’고 했다”면서 물 한 방울을 아끼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구의 숲을 보존해야 한다”며 화장지를 반으로 잘라 아껴 쓰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꽃피워야 할 세계시민의식의 싹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념집단들과 이해단체들이 공권력을 농락하며 법질서를 흔들고 있고, 황폐화한 공교육과 왜곡된 자녀사랑이 청소년을 병들게 하고 있으며, 폭력적 컴퓨터게임과 음란, 불법도박 사이트들이 인간성 상실과 도덕성 타락을 부추기고 있다. 초등학생태반이 애국가 가사를 잘 모르는 한심한 현실보다 이런 현실에 무감각한 학교와 학부모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우리의 미래가 암담하다. 이 사회의 이념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민주시민으로서의 국가관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세계관을 심어줄 시민교육과 사회교육 제도를 수립하여, 시민의식이 붕괴되고 무지와 억지와 폭력이 판치는 망국적 증상을 시급히 치유해야 한다. 선진국이란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생각과 삶의 격(格)이 높은 나라이다. 이 사회의 희망의 싹들이 고사하기 전에 그야말로 거국적인 ‘새마음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것이다.
찜통 속 미지근한 물 속에 들어앉은 개구리는 물이 끓어 죽게 될 때까지 물의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병들고 기형화 되어가는 현상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거나, 이런 현실을 부정하거나 외면한다면 우리나라의 이념적 정체성과 이 사회의 전통과 도덕, 조직과 문화 등이 통째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방관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