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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곳 베이징(北京)의 인민대학 캠퍼스 앞을 지나게 돼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대부분 낡은 시멘트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검박하다 못해 좀 삭막한 곳이어서 ‘인민대학’이라는 명칭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서관 앞에 고대 복장을 한 사람의 동상이 있어서 마오쩌둥(毛澤東)이 아닌 것 같은데 누구일까 하고 보았더니 뜻밖에도 공자(孔子)의 동상이었다. 인민대학에 공자의 동상이라니! 정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배합이 아닐 수 없다.
공자의 가르침의 핵심이 애민(愛民)사상이므로 공자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존숭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중국의 오랜 봉건주의·관료주의 체제가 유교적 이념을 근간으로 유지됐기 때문에 문화 혁명 당시 공자는 중국 계급 제도의 원흉으로 타도의 대상이었다. 1966년에서 76년 사이에 곳곳의 공자 유적은 파괴됐고, 학계는 공자가 노예 제도를 옹호하고 특권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려 했다는 등의 억설로 공자를 매도했다. 그 이후 공자가 차츰 명예를 회복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인민대학의 도서관 앞에서 공자님을 만난 것은 정말 의외였다.
사람들은 공자가 군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철저한 계급주의자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공자는 백성의 안위를 통치의 제일 목표로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제후가 그를 과격한 급진주의자로 위험시하고 등용하기를 거부했다. 당시는 전국 시대로서 여러 작은 나라들이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고 해서 전쟁이 끊임없었다. 따라서 통치자들은 군사력·경제력의 기반으로서 백성을 확보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백성을 편안하고 풍족하게 살게 하는 것을 최우선 의무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끊임없이 전쟁과 노역에 동원되고 통치자에게, 그리고 정복자에게 살육과 수탈을 당하는 것이 힘없는 백성들의 속절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수양을 통해 덕을 길러 관료로 등용되면 자신의 안락을 구하지 말고 불쌍한 백성을 편안케 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공자가 군주에게 충성하라고 강조한 것 역시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공자의 시대는 형식상으로는 주나라의 황제(당시는 천자)에게서 봉토를 받은 여러 제후들이 중국을 나눠 다스렸지만 주나라는 유명무실해졌고 여러 나라들이 서로 침략하고 정벌하는 전국 시대였다. 국제적인 질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왕실의 형제들 간에, 숙질 간에, 심지어 부자와 모자 사이에도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일이 빈번했다.
공자가 군주에게 절대 충성을 하라고 한 것은 그러니까 군주를 쉽게 갈아치울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면 나라의 혼란이 끝이 없고, 군주가 자주 바뀔수록 백성의 피탈과 고난은 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덕과 식견을 갖춘 군자가 담당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제창한 것이다.
사람들이 공자에 대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오해는 공자의 시대는 단순한 시대여서 사람들이 자기 수양을 하고 덕을 쌓기가 쉬웠는데 현대는 복잡한 시대라서 살기가 바빠 덕을 쌓고 수양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시대야말로 생업은커녕 귀족 계급도 생사가 불안한 시대였다. 시대가 살벌하고 백성은 의지할 데가 없었기 때문에 공자는 자신의 안락과 영달을 초월해서 절대적인 덕을 베풀 수 있는 인물을 길러 내려고 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수천 년 봉건 사회에서 억눌린 민중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혁명이었지만 국민의 과반수가 아직 빈곤선(貧困線)에 있는 중국에서 민중의 권리는 많이 취약하다. 그러니까 인민대학 학생들이 공자의 애민사상을 제대로 배워 중국의 지도자로 성장한다면 중국을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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