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義人)과 잡배(雜輩)
이철영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 진보학생운동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었던 김중태 전 서울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회장이 박근혜 대통령후보 지원에 나섰다. 서울대 재학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수차례 투옥된 후 미국으로 강제추방 당했다가 박 대통령 서거 후 1980년에 귀국한 박 대통령시대 최대 피해자인 원로 진보인사가 새누리당선대위 부위원장 직을 맡은 것이다.
“진보를 가장한 퇴보주의자들이 무슨 이 나라의 주체인 것처럼 떠들어요……”
우리나라 진보운동권 1세대인 김중태 부위원장이 지난달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들에게 거침없는 일격을 가했다:
“발걸음(步)이 앞으로 나아가면(進) 진보(進步)인데 나는 진보의 중요한 것이 발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봐요...... 발걸음이 나아가니까 진보는 진봅니다. 명목상으로는 진보지만 실질적으로는 퇴보라는 말입니다...... 밥도 못 먹이고 굶어 죽는 김일성 일당들 지지하는 게 무슨 진봅니까? 저건 퇴보(退步)란 말입니다! 그런데 진보를 가장한 퇴보주의자들이 무슨 이 나라의 주체인 것처럼 떠들어요...... 뭐, 중부 경찰서 유치장 일주일 살다 나온 사람이 내가 유신의 최대 피해자다...... 이거 국민 기만에요...... 김일성이 무덤에 가서는 절하는 인간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무덤에 가서는 절도 안 하면서 김대중 대통령 무덤에만 절하고 노무현이만 찾아 다니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겠다, 이 말이 됩니까?” (2012. 10. 12. TV조선 대담 내용 발췌)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몰고 갔던 박 대통령의 업적에 대해서도 “산업화의 일등공신이라면 아무래도 박정희죠. 개인 박정희, 그 다음에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라든지 또 정주영 회장 이런 분들이 이 나라 산업화의 일등 공로자들입니다. 그런데 전부 이분들이 이뤄낸 성취는 다 무시하고 말이지, 민주화 투쟁만 앞세워가지고는 이거 안 된단 말입니다.”라고 소신을 밝혔다. 박근혜 후보에게 유신독재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재벌을 경제독재의 원흉쯤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요즘 선거판 분위기 속에서 진정 의인(義人)다운 용기이다.
애국의 변(辯)이 잡배들의 궤변에 묻힐 순 없다
의인이란 불의에 굴하지 않고 옳은 일에 몸을 사리지 않는 의(義)로운 사람을 말한다. 이에 비해 사람 같지 않은 잡스러운 짓을 서슴지 않는 자들을 잡배(雜輩)라 한다. 시중을 떠돌아다니며 말썽을 부리는 방탕한 무리를 시정잡배(市井雜輩)라 하듯이,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있는 엘리트그룹에 속하면서 시정잡배와 같은 짓을 일삼는 부류를 엘리트잡배라 할 것이다. 권력의 단맛과 정치적 이권에 빠져 국가와 국민의 미래와 이익을 외면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정치잡배(政治雜輩), 정치가나 정권과 결탁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는 정상배(政商輩), 국익이나 국격(國格)은 안중에도 없이 무책임한 보도를 일삼거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막말을 쏟아내는 언론잡배(言論雜輩), 그리고 오만과 편견으로 시정잡배 수준의 막말을 일삼는 일부 법조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엘리트잡배이다.
‘가카새끼 짬뽕’ 패러디물로 유명해진 이 모 부장판사가 “’시정잡배’의 눈높이에서 재판을 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려 스스로 시정잡배 판사가 됐고, 법관재임용에 탈락한 ‘가카의빅엿’ 서 모 판사는 야당국회의원이 되었다. 최루탄 투척 ‘열사’ 국회의원은 재선되었고, 6·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 말할 수 없다는 전 야당대표는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섰다. 국회 국감에서는 31세의 민주통합당 김 모 의원이 90이 넘은 '살아있는 6·25 영웅' 백선엽 장군(예비역 육군대장)에 대해 "잘못된 과(過)를 가지고 있는 이 ‘민족 반역자’가 대한민국 국군 지도자로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이 야당의원은 자신의 트위터에 "언젠가부터 북한이 더 믿음 가"라는 글을 올렸으며,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다음에 술 먹을 때 채찍과 수갑 꼭 챙겨 오길, 간호사 옷하고 교복도", "일단 채찍, 수갑, 개목걸이, 양초 준비해주시고 비디오 카메라도 있어야 할 듯…… 난 몸 좋은 사람 좋아하니까" 라는 등 변태적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글을 트위터에 여러 차례 올렸다고 한다. 국회의원은 고사하고 과연 정상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인지조차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기 폴리페서(polifessor)의 망언
진보세력들이 야권후보단일화를 압박하고 있는 가운데, 단일화를 안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사람이 나타났다. 정치깡패나 조폭이 아니라 조국(서울대 교수)이다. 지난 봄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과 ‘나꼼수’ 멤버 김용민 후보 등의 후원회장을 맡고 본업이 의심스러울 만큼 선거에 깊게 관여했던 조국 교수가 지난 10월 "두 후보가 모두 등록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제가 무슨 일을 할지 모르겠다"며 "친구·동료·선배 등을 동원해서 광화문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하고 촛불시위를 주동할 것"이라고 했다.
야권후보단일화로 진보진영이 집권하기를 바라는 조국 교수의 조바심은 이해할 수 있지만, 법을 가르친다는 대학교수가 정치적인 이슈로 촛불시위를 주동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월조대포(越俎代庖)’(주: 축관(祝官)이 제수 준비에 불만을 가지고 자신이 주방으로 들어가 요리사의 역할을 대신하여 제사를 망친다는 뜻으로, 직분을 벗어나 남의 일에 주제 넘는 참견을 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을 풍자하는 고사성어)의 망동을 부리겠다는 망언이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아예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아니면 법을 전공한 교수답게 처신하는 게 조국 교수가 택일해야 할 길일 것이다.
연출된 이미지가 실체와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 덕에 소설가, 연예인, 개그맨 등 다수의 팔로워를 가진 인기인들이 정치사회적 문제에도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연출된 이미지나 개그 수준의 궤변이 실체와 진실을 압도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조국 교수의 도가 넘는 언행도 그의 ‘스펙’과 연예인 같은 번듯한 용모 덕분에 젊은이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대 전상인 교수는 올 대선 관련 칼럼에서(<재>굿소사이어티 이슈레터 11월호) “캠프정치의 안방을 이른바 ‘폴리페서(polifessor)’가 차지하는 것도 시나브로 한국정치의 정석(定石)처럼 되고 있다…… 대통령의 자격과 조건을 갖추기 위한 준비나 경험, 혹은 경륜 따위는 별로 중요한 변수가 아니다…… 지금은 이미지나 레토릭이 실체나 진실을 능가하는 감각과 매력의 시대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판단이 오직 재미에 달려있는 '연예사회'(the show business society)’다”라고 지적했다. 대선캠프에서 저마다의 목청을 높이고 있는 폴리페서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 안철수 후보가 “선거법을 한 줄만 고치면 되는데”라며 투표시간 연장을 위한 국민입법청원운동에 들어갔다. 우선, 지난 40여 년간 시행되어 온 투표시간을 이번 대선 전에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의 설득력이 부족하다. 비정규직과 자영업자의 투표기회 확대 운운하지만 대선투표일이 공휴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 논리도 맞지 않는다. 간단히 고칠 수 있는 수많은 법안들이 왜 국회에서 오랜 세월 잠자고 있는지 안 후보가 알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대통령 선거일은 대통령 취임 시부터 이미 정해져 있고, 대통령선거 예비후보자 등록이 ‘선거일 전 240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늦어도 이 때부터 투표일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투표를 안 하는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투표일을 “보너스 휴일” 정도로 생각하거나 투표에 무관심하기 때문이지 투표시간이 짧아서 투표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작년 무상급식 관련 서울시주민투표 당시 조직적으로 투표불참운동을 벌였던 민주통합당이 이제는 국민의 참정권 확대라는 명분으로 안 후보와 함께 투표시간연장을 외치고 있다. 결국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투표불참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투표시간연장운동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지 국민의 참정권 확대는 명분일 뿐이다. 문·안 두 후보 모두 투표시간연장이 무산되더라도 이 문제로 여당을 압박하면서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국민을 호도(糊塗)하려는 꼼수가 아닌가?
허황된 공약(空約)들로 삼인성호(三人成虎)를 꾀하는가?
대선 후보들의 공약(公約) 대부분이 실현가능성이 낮거나 재원 마련 대책이 막연한 ‘포퓰리즘’ 수준이라는 지적 속에, 문재인·안철수 두 후보가 후보단일화 본격 협상을 앞둔 지난 11월 11일 무더기로 선거공약을 쏟아냈다. 안 후보는 850개의 실천 공약을 책으로 내놨고, 문 후보도 117개 공약을 발표했다. 그리고 사흘 뒤 안 후보는 단일화협상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후보들의 정책이나 비전에 관한 토론이나 공방도 없이 각 후보가 일방적인 주장만 쏟아내는 가운데 문·안 두 후보간의 후보단일화 여부에만 전국민의 관심이 쏠려있다. 두 후보간에 후보단일화가 성사된다면 그들이 내놓은 공약의 상당수는 사라질 것이 뻔하다. 결국 두 후보 측이 후보단일화 협상의 기선을 잡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공약(空約)들을 남발하여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전략가들의 책략을 편집한 《전국책(戰國策)》에 삼인성호(三人成虎: “夫市之無虎明矣。然而三人言而成虎”)란 말이 있다. “시장에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세 사람이 호랑이가 있다고 같은 말을 한다면 호랑이가 나타난 것으로 된다”라는 의미이다. 즉,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말하게 되면 진실로 믿게 된다는 뜻이다. 이합집산과 이전투구가 난무하는 정치판에서는 진정한 애국의 변(辯)이 설 자리를 잃고 엘리트잡배들의 그럴싸한 궤변들이 국민을 현혹시킨다. 선거판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