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라는 주홍글씨
-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복거일著
조우석 문화평론가
얼마 전 불거진 동영상 '백년전쟁' 파문이 보여주듯 대한민국 현대사를 보는 사회 일각의 자기비하의 시선은 실로 뿌리가 깊다. '백년전쟁'은 대선 정국이 한참이던 지난해 11월 유튜브 등 인터넷에 공개된 뒤 조회수가 300만을 넘어섰는데, 내용은 지독하게도 거칠다. 건국과 부국의 주역들을 비난하는 용어도 실로 조야하기 짝이 없다. 문제는 왜 이런 논리 이전의 논리인 하수도 논리가 쉽게 사그러들지 않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건 젊은 층과 문화계에서 폭넓게 공유하고 있는 반(反)대한민국, 반 건국사의 정서를 반영한다. 지난 세기의 우리 현대사를 저항 세력과 협력 세력 사이의 싸움으로 설정하고,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을 '친일파=협력 세력'으로 매도하는 집단심리는 그만큼 위력적이다. 그런 병리학적 집단심리는 결코 예외적인 게 아니다. 한국사회라는 덜 성숙한 나라에서는 꽤 자주 현실정치에서도 그게 큰 이슈가 된다. 지난해 말 대선 생방송 TV토론에서 박정희를 친일파라며 몰아붙였던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가 그 경우다.

친일파에 부르르 떠는 낸시랭, 이정희 그리고 박원순
최근 우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팝아티스트낸시랭 일행도 그렇다. 그들은 육영수 여사 사진 앞에서 가운뎃손가락 욕설을 날리고, 육 여사와 박근혜 대통령 사진 위에 인공기를 걸어놓고 조롱했다. 정신착란 수준의 정치의식을 노출하는 무리, 그래서 정상적 시민의식에서 한참 먼 이들이 어디 그들뿐이랴?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그 행위를 주도했던 인물이 좌파 예술단체 민예총의 간부 출신인 최범이며, 그는 다시 서울시장 박원순과 다시 연결된다. 이게 아찔하다.
최범과 박원순, 둘은 좌파 문화단체-시민단체 출신으로 기본 코드가 같다. 왜 이런 종류의 사안에 박원순이란 이름이 등장해야 하는가? 서울시정을 책임진, 비중있는 인사인 그가 대한민국 건국사에 부정적 인식을 가졌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점은 전 대통령 노무현과 거의 샴쌍둥이 수준인데, 박원순은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출범과 운영에 깊숙이 간여해왔던 위험인물이다. 어쨌거나 오늘 이 지면에서 중요한 건 박원순-이정희-낸시랭 류의 인물들이 남을 공격할 때 구사하는 최대 무기가 친일파란 욕설이라는 점이다.
친일파, 그건 거의 '저주의 주홍글씨'인 셈인데, 이게 역사를 보는 균형 잡힌 시선도 아니라는 건 상식이다. 밑도 끝도 없는 친일파 논란, 거듭해 덧나는 이 상처를 종합적으로 성찰할 순 없을까? 그 사안을 정면에서 다룬 책은 무엇이 있을까? 그게 의외로 많지 않다. 부정적 에너지가 온통 쏠려있는 복잡한 역사현안에 대한 통찰을 기대할만한 책이 풍요롭지 못하다는 게 빈곤한 우리 지식사회의 현주소이다. 다만 그걸 정면에서 다룬 게 소설가 복거일이쓴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21세기의 친일 문제> (북앤피플)이다.
언제적 책인가 할 것이다. 맞다. 꼭 10년 전 나왔던 같은 제목의 책 개정판이다. 10년 전에 펴냈던 단행본에서 개진했던 논리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 희한하다. 책 자체가 갖는 설득력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반 대한민국의 정서를 앞에 눈치나 보고 있는 이들이 수두룩한 형편에서 복거일이란 존재는 실로 고맙다.아시다시피 그는 전통 경제이론에 정통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전파에 앞장 서는 보수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다. 비겁하지 않으면서도 지적인 정교함을 갖춘 그런 인물이 열 배수만 있어도 지식사회의 불균형이 이토록 심하지 않을텐데 하는 안타까움마저 있다. 특히 특정사안에 대한 시시비비를 떠나 조금 더 거시적인 시야를 담보로 한 문제제기는 그만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경우 펴내는 것 자체가 용기일 것이다. 자칫 친일파 옹호의 헛소리로 비춰져 돌팔매질을 당할 소지도 적지 않다.
비겁하지 않으면서도 지적인 보수인사 복거일
"친일행위와 친일파의 처벌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은 여전히 높다. 그들은 그런 처벌이 우리사회를 개선하고 발전시키는데 긴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그런 주장은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하는 질문조차 좀처럼 제기되지 않는다. "(2012년 초판 서언)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는 친일파를 둘러싼 비분강개형의 논리가 많은 경우 비약이거나 논리가 취약하다는 점을 아주 점잖게 지적한다. 이를테면 친일행위는 또렷이 정의될 수 있고, 그런 행위를 한 이들을 명쾌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논리 자체가 꽤나 무리라는 걸 저자는 보여준다. 더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후손인 우리들이 친일행위와 친일파들의 죄과를 묻고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적 도덕적 권위가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개선과 발전에 필수이며, 큰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속화(俗化)되고, 맹목적인 민족주의 충동 그리고 현대사에 대한 괜한 분노가 그걸 당연시했을 뿐이다. 이런 복거일의 주장은 책 출간 10년이 지난 지금 크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지난 정부가 이미 충분한 사회적 교훈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숱한 사회적 논란 속에 등장해 활동했던 각종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이 보여준 것은 그런 작업이 엄청 소모적이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 대목은 국제학계에서는 확인된 사안이기도 한데 그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단행본 <세계의 과거사 청산>(안병직 엮음, 푸른역사 펴냄)에 소상하다. 그런데도 왜 아직까지 친일파 논란은 거듭될까? 아니 친일파 시비를 거는 쪽의 세력이 줄기는커녕 더욱 만만치 않을까? 이게 관건인데 필자는 두 개의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선 대한민국 건국세력의 직무유기이다.
친일파 문제가 끊임없이 덧나는 상처가 된 것은 건국세력이 충분한 대항논리를 만들고 그런 시민교육을 통해 사회주류를 형성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탓이다. 대한민국 건국을 비하하는 세력이 그만큼 집요하다는 뜻도 된다. 복거일을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있지만, 친일파 논란이란 사안이야말로 현대사를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예민한 최전선임을 지금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1910~45년 일제 식민지배 당시 이뤄진 근대화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규명이 요구된다.이 사안에 대한 규명이 쉬울 리 없는데, 저자는 뜻밖에도 계량적 접근을 한다. 혹독했다는 식민통치 시기 조선인의 삶의 질이 과연 어땠을까를 점검하기 위해 그가 주목한 것은 인구 변동이다. 합방되던 1910년 조선인은 1300만 명을 살짝 넘겼다. 정확하게는 1312만 8780명이었다. 놀라운 것은 일제말에는 거의 두 배로 늘었다는 점이다.1942년을 기준으로 2552만 5409명인데, 일본 본토나 대만 등지에 있던 인구를 합치면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경이로운 수치인 2.09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보여주듯 거의 모든 식민지는 원주민의 인구가 줄어든다. 종주국의 약탈 때문이다. 그걸 빼고라도 20세기 전반 아시아의 인구 증가율이 0.84이고, 당시 세계 전체는 0.85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는 더블 그 이상이었다는 얘기다. 17세기 후반 이후, 즉 조선조 후기 조선인들의 인구 증가율이 0.12였다는 것도 함께 기억해둘 일이다.
자기관리 부족이 불렀던 100년 전 역사실패 인정을
이런 설명은 실로 아슬아슬한 대목이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일제의 통치가 근대사의 축복이었다고 말하려는가?"하는 역습을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한국인은 아직도 그런 단순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이젠 그로부터 벗어날 때이다. 쉽게 말하자. 조선왕조 후기는 턱없이 무능했다. 일제가 우리를 삼켰다기보다는 우리의 역사 실패가 외부로부터의 침탈을 불렀다. 그게 진실에 가깝다. 조선은 자생적,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가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탁월한 저술 <콜로서스>를 쓴 역사학자 니얼퍼거슨의 말대로 "역사는 진공을 싫어한다." 자기 관리 능력이 결여된 우리가 휘청대고 역사의 진공을 만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 빈칸을 채운 게 일제였다고 이해하면 된다.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다. 건국 이후 우리의 거대한 성공은 실로 축복이었다. 그걸 기꺼이 받아들일 때 일제 강점기의 경험을 새로운 사건으로 볼 여유가 생긴다. 더욱이 복거일은<죽은 자를 위한 변호>의 개정판 서문에서 한반도 주변을 크게 보기 위한 전략적 마인드를 새삼 주문하는데, 이 또한 설득력이 크다.
이런 얘기다. 중국이 빠르게 커나가는 와중에 이웃 일본과의 전략적 협력을 하는 탄력성을 갖는 것은 우리 생존에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생각하면 할수록 해방된 지 20년인 시점에서 국민정서라는 걸 거슬러 올라가며 한일간 국교정상화에 성공한 박정희의 대국적 시선은 거듭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친일행위와 친일파 문제는 아직도 덧나는 상처이다. 정치인들은 반일 감정을 부추겨서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불릴 생각만하다. 친일파를 발굴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되읽어야 할 책으로 이 책이 요긴한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