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한 판결
이철영 <(재)굿소사이어티 상임이사, 전 경희대 객원교수>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2013년 세계부패척도” 조사 결과 우리 국민은 정당이나 국회는 물론 공무원, 언론, 경찰보다 사법부를 더 부패한 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정당과 국회의 온갖 몰염치에 익숙해진 우리 국민들이 사법부의 납득할 수 없는 판결에 더욱 흥분하고 분노하는 것은 아직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사법부가 가장 공정하고 엄격한 기관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법정에서 법관뿐만 아니라 사법보좌관 및 법원사무관 등까지 법복을 입도록 한 것은 법의 엄정함과 법관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것보다는 재판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개인의 이념, 정치적 성향, 기호, 편견, 인간관계 등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법복 속에 덮어버리고 오로지 법으로만 판단하고 판결하라는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재판에 3심제도(三審制度)가 운용되는 것도 법관의 주관이나 편견을 최대한 배제하고 끝까지 법으로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법관이 법보다 자신의 소신(所信)을 앞세워 판결을 내린다면 3심제도도 무의미해지고 이 사회의 법치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개인적 감정이 실린 괘씸죄를 적용하는 판사들
위층 주민과의 다툼 후 시정잡배 수준의 보복행위를 저지르고 판사직을 물러난 ‘가카새끼 짬뽕’ 부장판사는 재임 시 SNS를 통해 ‘시정잡배 눈높이로 재판을 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고, ‘가카의 빅엿’ 파문을 일으킨 후 야당국회의원이 된 서기호 판사는 퇴임 후 2012년 9월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출연해 "법에 없는 감정이 실린 괘씸죄를 적용해 판결하는 판사들도 있다"고 고백했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에 대한 징역 1년의 실형 확정에 대한 개인 의견을 말한 것이지만 아래의 사례들을 비춰보더라도 근거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2007년 말 서울중앙지검의 한 젊은 여성 검사는 가족간 재산권 다툼에 기인한 진정(陳情)사건에서 피진정인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혐의로 기소(起訴)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친 한 중소기업의 해외부동산투자에 대해 “횡령 및 재산국외도피의 의도(意圖)가 있었다”며 회사의 대표를 기소한 것이다. 2009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는 이 사건 피고인에게 “징역 5년에 95억여 원 추징”의 중형을 선고하고 피고인을 법정구속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항소심(抗訴審)은 같은 해 8월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이어 2010년 7월 대법원에서 피고인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결국 죄 없는 국민 한 사람이 8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됐고, 그와 회사는 엄청난 소송비용과 손실을 떠안았다. 사건담당 검사와 1심부장판사의 감정, 편견, 진실 왜곡, 외국법에 대한 무지 또는 법리 오해 등 외에 무슨 다른 사연이 있을 수 있을까?
위 항소심에 증인으로 나섰던 필자는 위 사건 당사자 가족간의 민사소송 항소심에도 피고측 참고인으로 참여했다. “주주권(株主權)확인 및 주권(株券)인도(引渡)”소송 1심 재판에서 원고의 거짓말이 인정되어 원고가 패소(敗訴)한 항소사건이다(2009. 1.). 서울고법 민사10부는 4회에 걸쳐 조정(調停)만 하다가 재판장이 교체된 후, 후임재판장이 양측의 법정(法廷)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6회에 걸쳐 변론을 끝냈으나 결심(結審)을 미루고 다시 조정을 시작했다(주: 재판에서 변론을 끝내는 것을 ‘결심’이라 하며 통상 결심공판 뒤에는 선고공판이 따른다). 그 후 재판장은 2012. 6.까지 무려 1년 7개월간 9회에 걸친 조정을 강행하다 결심도 하지 않은 채 또 자리를 옮겼다. 다시 새 재판장 주재로 2회의 재판을 마친 후 재판에 지친 소송당사자들이 결국 소(訴) 취하(取下)를 결정했다. 주식증여과정의 적법여부를 가리는 단순한 항소사건에서 양측이 4년에 걸쳐 법정에 제출한 서면(書面)만 무려 90건에 달했지만 결국 법원의 판결은 없었다. 소송당사자들은 재판으로 5년 동안 엄청난 소송비용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서로간 분노와 원한만 키우며 허송세월 한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과연 이 소송뿐일까? 이 나라의 법원이 법관을 위해 존재하는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지가 의심스럽다.
민사 소송은 “양측 변호사들만 승소하는 재판”?
민사소송에서 판사가 조정(調停)을 통해 당사자간 합의를 압박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이론적으로, 합의는 항소(抗訴)나 상고(上告)를 없애 재판을 줄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소송을 걸면 뭔가 얻는다는 생각을 부추겨 소송을 남발시킬 우려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합의는 재판부, 원고측 및 피고측 변호사 3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최선의 해법이다. 재판부는 판결문 쓰는 번거로움이나 상급법원 판결을 신경 쓸 일 없이 사건을 종결하게 되고, 양측 변호사는 모두 승소(勝訴)의 성공보수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업으로 치자면 최상의 동업(同業)이자 담합(談合)인 셈이다. 이 때문에 민사소송은 “양측 변호사들만 승소하는 재판”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조정을 통한 합의의 대부분은 원고와 피고 모두 또는 한 쪽이 불만을 가지면서도 재판부의 위압에 눌려 마지못해 하게 된다. 법원이 민사소송에서 조정을 고집하기 보다는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것이 합당한 것 아닌지 숙고해야 할 것이다.
근래에 들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요한 형사사건들에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계속 나오면서 판사의 이념적, 정치적 성향과 자질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얼마 전 불법 방북자의 김일성 시신 참배에 대해 ‘동방예의지국’ 운운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이 논란을 일으키더니,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가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비례대표후보자 경선과정에서 대리투표를 한 통진당원 45명에게 무죄를 선고해 비난의 소리가 들끓고 있다.
정당 내 대리투표가 '통상적 대리투표'라니!
이 판결을 내린 재판장은 '정당의 비례대표 경선'에 있어서 선거의 4대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명시적 규정'이 없고, '조직적 행위'가 아닌 가족•친척•동료 같은 신뢰 관계자들간의 '통상적 대리투표'이었기 때문에……”라는 논리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기괴한 논리를 수긍하는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우선, '통상적 대리투표'라는 말 자체가 선거의 4대원칙(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예외를 인정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더라도 통상적으로 인정되는 대리투표가 있다는 전제의 궤변 아닌가? 대학에서 과대표(科代表)를 뽑는 같은 과의 대학생들이나 반장을 뽑는 같은 반의 초등학교 급우들도 재판장이 얘기하는 ‘신뢰 관계자들’에 해당할 것이며, 그렇다면 이들이 대표자를 뽑는 선거에서 대리투표로 몰표를 던져도 문제가 없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정당 내 경선투표에서 특정인을 국회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불법적으로 대리투표를 행한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면 이 나라의 헌법정신과 기준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번 판결 이전의 '통진당 부정경선'과 관련한 다른 모든 재판들에서는 피고인들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부산지법은 "대리투표를 허용하는 명시적 규정이 없는 한 대리투표 자체를 허용할 수 없다"며 유죄를, 대구지법과 광주지법도 "헌법에 규정된 민주적 선거의 기본원칙은 근대선거제도를 지배하는 원리로, 간접적으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당내 경선도 예외가 아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이정희 통진당 대표는 “정치검찰이 법적으로 이 문제를 수사하거나 또는 재판 받게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판결로 분명해졌다”고 주장했고, 김재연 대변인도 “시간은 결국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가려주었다”며 의기양양했다. 이번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의 과거 판결 사례들을 살펴보면 이런 황당한 판결의 배경을 대충 엿볼 수 있다.
법보다 자신의 이념, 신념, 성향에 따른 판결
문제의 부장판사는 2010. 2. 춘천지법에 재임 중 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 실시를 거부한 전교조교사 4명에 대한 해임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인천지법 부장판사로 재임 중 2012. 10. 공직선거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새누리당 박 모 의원에게 당선무효에 해당하는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뒤이어 2012. 11. 총선과 당내경선을 앞두고 같은 당 상대예비후보 지지자를 매수한 혐의로 기소된 민주당 최 모 의원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2012. 12. 국가보안법•반공법위반 혐의로 12년 넘게 복역한 피고인에 대한 재심에서는 조사과정의 가혹행위를 들어 무죄를 선고한 후 피고인에게 “법원을 대표해 사과 드리고 사법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들 판결의 경우, 당선무효형이 선고된 새누리당 박 의원은 2013. 1. 25. 항소심에서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는 벌금 80만원으로 감형되었고, 무죄를 선고 받았던 민주당 최 의원에게는 2013. 6. 27. 항소심에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벌금 300만원이 선고되었다.
몇 가지 판결 사례만으로 법관의 성향이나 잘잘못을 논할 수는 없겠지만, 서기호 전 판사의 말처럼 판사가 “법에 없는 감정이 실린 괘씸죄를 적용”하거나 법보다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적, 정치적 성향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등 법치를 통해 나라의 안보와 치안을 지켜야 할 사법부가 오히려 나라의 법치를 흔드는 판결을 내놓는 것을 국민이 방관해서는 안 된다.
법으로 논죄(論罪)하는 것이 법치의 기본인데…
내란음모로 조사를 받고 있는 이석기 의원과 수하 RO조직원들은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 과정에 시종 묵비권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런 부류의 피의자들이 신사적인 질문에 순순히 답변하리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 때문에 공권력의 무리한 조사방법에 대해 ‘수사기법(搜査技法)’이라는 관대한 표현이 용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나라 역사를 통틀어 사법부의 ‘판결기법(判決技法)’이란 단어는 존재한 적이 없다. 판결은 기법이 아니라 법에 의거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판사가 소송당사자들에게 막말을 해대거나 윽박지를 일이 없는 것이 재판이고, 민사소송에서 판사가 판결 대신 합의를 강요할 일도 아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가 높아가는 건 법관들이 법 대신 자신의 신념이나 소신에 따라 국민을 논죄(論罪)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회한(悔恨)일 것이다. 법관들이 시위장(示威場) 피켓 속의 현대판 ‘열사(烈士)’들처럼 “진보열사(進步烈士)의 거사(擧事)”의 심정으로 판결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법관이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판결을 정당화하는 법을 스스로 만드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판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사법부 수장(首長)의 의중(意中)이 궁금하다. “위기 때마다 내게 상처를 준 건 적들의 거친 말이 아니라 친구들의 침묵이었다 (In the times of crisis I was not hurt by the harsh words of my enemies, but by the silence of my friends)”,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우리 국민들이 법관의 판결을 불신하고 분노하는 위기의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