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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의 경제학
서지문   |  2005-10-14 12:53:20  |  조회 2076 인쇄하기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래시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어떤 물건을 조금 유심히 보면 사라고 강요하고, 값을 물어보고 사지 않으면 얼마면 사겠느냐, 안 살 것을 왜 값은 물어보았느냐고 욕하는 상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살 때는 교환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바꾸러 가면 짜증을 내고 다른 물건의 값을 턱없이 높여 손해를 보게 하기 일쑤였다.

백화점도 내가 어렸을 때는 시장보다 조금 덜 불편한 정도였다. 처음에는 온갖 사탕발림으로 구매를 유도하다가 물건을 사지 않으면 태도가 싹 달라지고, 샀던 물건의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하면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대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이제는 재래시장에서도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욕먹는 일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요즈음은 재래시장을 즐겨 찾는다. 백화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점원들의 친절도는 꾸준히 향상했는데 근래에 와서는 백화점의 모든 점원이 손님이 매장에 들어서면 반갑게 맞이하고, 그냥 둘러보기만 하고 나가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쇼핑 되세요”하고 노래 부르듯 말한다. 아마 외환 위기(IMF) 시절에 백화점들이 생각해 낸 생존 전략이 아닌가 싶은데 불황에도 고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게 하는데 한몫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상인들이 친절하면 고객의 기분이 좋지만 그보다 점원들 자신이 기분이 좋고 덜 피곤할 것 같다. 고객을 오로지 이윤 생성의 수단으로만 본다면 매장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피곤하고 따분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나의 역할을 손님들에게 기분 좋게 나의 상품의 장점을 인식시키고 자주 들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호스티스(안주인)로 생각한다면 나의 일에 대한 자긍심도 가질 수 있고 근무가 훨씬 덜 귀찮고 덜 피곤하지 않겠는가.

예전에 우리나라 관공서의 직원들은 (나의 기억으로는) 하나같이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민원인을 무조건 고압적인 자세로 대하고 필요한 설명도 마지못해 하거나 묻기 전에는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저 사람들도 친구와 만나면 재미있게 환담도 하고 가족에게는 애정을 베풀기도 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예전에는 어떤 일을 위해 필요한 서류가 너무나 많았는데 (예를 들어 여권을 발급받자면 10여 개의 증빙 서류가 필요했다) 그래서 무슨 수속을 하려면 여러 군데서 수모를 당할 것을 생각하고 신경이 먼저 피로했다. 그래서 마침내 여권을 받아 출국할 때는 쇠사슬을 끊고 탈출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민원인에게 하루 종일 불쾌하고 강압적으로 대한 그 하급 관리나 사무원들 자신은 피곤하지 않았을까. 그때는 관(官)의 위세가 워낙 세던 때라 민원인들이 고분고분했지만 개중에는 참지 못해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다수의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가.

내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관공서나 일반 사무실에서 창구 직원이 보인 친절함과 유쾌함은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미국을 선진국으로 인식하게 됐고 미국인을 현명한 국민으로 부러워하게 됐다. 최근에는 가까운 이웃 나라에서 몇 달을 보냈는데 창구 행정의 불친절과 비효율을 보고 들었던 정이 뚝 떨어졌다.

지금의 선진국들도 충분히 민주화되기 전에는 관공서의 횡포와 오만이 심했다. 독일에서 1970년대 대민(對民) 창구 행정을 친절화하기로 한 이후에 공무원들 자신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훨씬 높아지고 해고의 불안이 대폭 감소했다고 한다.

우리의 생(生)은 우리가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불행하고 불안한 것이고,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유쾌하고 안전한 것이 아닐까.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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