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 받드는 법을 모르는 한국사회
- 사회통합 구심점 기회 놓친 고(故)채명신 장군 추모
조우석 <문화평론가>
고인의 생전 소망대로 국립 현충원의 일반 병사 묘역에 묻힌 채명신 장군의 부음 기사를 접하는 순간 가슴 뭉클했다. 지난 해 11월 26일자 아침 신문을 읽으며 자꾸만 눈물이 번져 앞이 뿌옇게 변했던,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장군 출신이 일반 병사 묘역에 묻히길 원했던 사례는 건군(建軍) 이래 처음이라던데, 그만큼 감동이다.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살아있는 모델이지만, 울림은 그 이상이다. 한국사회에 흔치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기도 하다.
세상과 작별하는 모습이 이토록 찡했던 경우는 어떤 성직자, 어떤 정치인에게서도 자주 없던 일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장군 채명신을 떠나 보내는 한국사회의 방식이 너무 서툴렀기 때문인데, 신문 방송의 고식적인 보도 태도부터 우선 잘못이다. 한마디로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려는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동안 헝클어져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더 없이 좋은 호기, 민(民)과 군(軍) 사이의 공감대를 확인하는 최상의 기회를 저들은 스스로 놓쳤고, 그래서 하루 이틀의 감동에 그치고 말았다. 그게 속 상하다.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 못하는 우리사회
물론 국내 최대일간지라는 A신문의 경우 부음기사로 2면 거의 전체를 할애했고, 이튿날 사설로 다시 다뤘다. 국내 일간지 중 앞서가는 편집이 분명하지만, “신문의 얼굴인 1면은 뒀다가 뭐에 쓰려고?”하는 지적을 나는 하고 싶다. 그 부음기사로 1면 전체를 덮었을 경우 장군의 마지막 선택이 또 한 번 돋보이고, 지면은 보석처럼 빛났으리라. 한 사회의 성숙은 그런 정화(淨化)의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기회에 밝히지만, 이튿날 사설도 문제가 있었다. 범용(凡庸)하고 밋밋한 문장의 나열에서 최소한의 감동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살아서는 명장(名將), 죽어서는 대한민국 호국의 신.” 최소한 이 정도의 레토릭이 나왔어야 하지 않았을까? 상식이지만, 뉴스마다 정보마다 담아내는 방식과 그릇이 달라야 정상인데, 국내 일간지는 그게 없다. 기계적 균질함이란 죽은 균형에 불과하다. 충격을 받은 것은 정작 따로 있는데, 그건 공영방송 KBS 9시 뉴스였다. 장군의 부음기사를 뉴스의 마지막 시간에, 그것도 자막으로 처리되는 다섯 개 토막소식의 하나로 전하는 게 전부였다. 관련영상도 없이 여성 앵커의 아나운스먼트가 전부였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론 기술자’들의 테크니컬한 실수일까?
아니다. 그 이상의 고질적 문제가 있다. 한국 언론의 어젠더에서 국가수호와 안보, 그리고 애국심 문제는 정작 빠져있다. 그래서 타계한 전쟁영웅에 대한 홀대가 나오는데, 조선조 이후 21세기 지금까지 지속되는 주자학적 숭문(崇文)사상이 바탕엔 깔려있다. 그게 대한민국 지식인 그룹의 평균적 멘탈리티이기도 하다. 정치학에서도 군사•안보•외교는 상위정치(high-politics)로 분류한다는 상식을 기회에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한국사회를 이끌 주류(主流)집단을 포함해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웰빙 바람에 어울렁 더울렁 산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현주소는 혹독하게 말해 난민촌인데, 우리의 구조적인 특징은 우리가 잘 안다. 지식인사회는 ‘진보 강박증’에서 사로잡힌 채 역사의 큰 수레바퀴를 돌리는 대국(大局)의 미래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쳇바퀴 도는 이 나라의 전문가 바보들인 그들은 대중에 영합하는 좌클릭으로 치닫는데, 겨우 투정하고 징징대는 걸 비판이고 대안이라고 여긴다. 그 결과 사회엔 역사 허무주의가 가득하다. 건국 이후 현대사에 대한 자기비하에 반(反) 기업심리가 기승을 부린다. 사회 갈등이라는 기회비용은 그래서 발생하지만, 이걸 치유할 시민교육의 부재는 더욱 뼈아프다.
채명신 장군의 마지막 선택은 이런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좋은 계기였다. 그가 최고의 군인이라는 찬사만은 아니다. 그 정도 너비의 삶과 죽음을 보여준 인물이 다른 분야에도 적지 않을 텐데, 그걸 적절한 기회에 실물크기로 보도하는 것 자체가 훌륭한 사회교육의 과정이다. 그 반대로 언론이 다른 사안을 두고 필요 이상의 갈등을 증폭시키는데 코를 박다 보니 국내 신문 방송은 공론장(公論場)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사회에 꼭 필요한 의제(議題)를 던지는 역할과 통합적 기능은 언감생심이다.
고인의 향기 담긴 회고록 <베트남전쟁과 나>
이런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방법의 하나가 반복하지만, 채명신 장군의 타계 뉴스를 뉴스답게 다루는 것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장군의 인품과 군인다운 생사관을 확인하고 싶어서, 고인의 향기를 다시 음미하고 싶어서 <베트남전쟁과 나-채명신 회고록>(팔복원 펴냄)을 다시 읽었다. 갖고 있는 책은 2010년에 나온 6쇄본인데, 처음 나온 것은 2006년이다. 그 전에 장군은 <사선을 넘어>라는 기록물을 1994년에 펴낸 바 있다. 그건 자신이 4•3폭동을 진압하는 국군의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4•3사태 증언에 충실하다. <사선을 넘어>가 젊은 초급장교로 경험한 건국 전후 증언인데, 안타깝게도 그 책을 구해 읽지는 못했다.
전국의 수백 개 헌책방을 연결한 인터넷 중고서점에도 단 한 권을 찾아볼 수 없는데, 애당초 적게 팔렸다는 얘기다. 그래도 <베트남전쟁과 나-채명신 회고록>에는 <사선을 넘어>의 일부 내용을 암시해주는 대목이 있다. 자신이 4•3사태 때 골육지정(骨肉之情)의 리더십으로 지휘했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는 대목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포함된 육사(국방경비사관학교) 5기생들이 졸업한 건 4•3사건 3일 뒤였는데, 바로 제주도 9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 발령을 받았다. 소대원은 42명. 도착 직후 대면한 그들 병력은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는 자세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소대원의 84개 눈초리를 잊을 수 없다. 그 눈초리는 소대장에 대한 애정이라 호기심의 눈빛이 아닌, 증오에 찬 살기등등한 눈초리였다. 저주의 눈빛, 그것은 공산주의자에 세뇌 당한 눈초리였다. 그날 나는 숙소로 돌아와 두려움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위기 때마다 나를 구해주신 것으로 확신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31쪽)
그의 증언이 정확하다는 걸 당시 다른 지휘관들의 증언과 비교하면 금세 확인된다. 기도하는 과정에서 마침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 그 말을 소대장 채명신은 실천하며 부하들의 마음을 파고들어갔다. 그런 부드러움, 그리고 골육지정의 리더십이 성공적인 작전수행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렇다면 훗날 월남전에서의 지휘지침, 그리고 사랑하는 병사들과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장군의 마지막 선택이란 우연은 아닌 셈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얼굴 사진을 새로 봤다.
우리가 아는 이른바 무골(無骨) 타입은 아니다. 외려 부드러운 얼굴 선에서 전형적 장군의 모습을 떠올리긴 어렵다. 실제로 그는 모태 신앙의 기독교인이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참고로 백선엽 장군 역시 그러했다. 술 담배를 멀리했고, 부하들에게 욕설조차 하지 못하는 부드러운 타입이다.) 그런 그가 술을 마신 것은 육사 시절 그의 교관이었던 선임 장교 박정희와 어울리는 자리를 포함해 몇 차례 되지 않는다. 6•25때 그가 유격전을 이끌던 백골병단을 지휘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다.
모태 신앙에 술을 입에 대지 않던 생전의 고인
작전 수행을 마치고 강릉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는 국군 9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당시 사단 참모장이었는데, 그를 만나는 순간 너무 반가웠던 채명신은 눈물까지 글썽거려야 했다. 무뚝뚝하던 박정희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오늘 같이 기쁜 날 술 한 잔 해야지.”라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 채명신이 입고 있던 야전점퍼는 인민군의 피까지 묻어있었다. 그걸 본 박정희는 선뜻 바꿔 입자는 제안을 했다. “아니 이렇게 더러운 걸….” “그게 기념 아닌가? 역사적인 점퍼인데.”
이 책 앞 대목에 나오는 이런 일화를 읽으며 금세 가슴 덥혀진다. 전쟁터에서 선임과 후임 사이에 교환되는 신뢰와 전우애, 확실한 국가관, 생사를 넘나드는 남자다움의 가치…. 그런 채명신은 1965년 주월 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에 임명돼 1969년까지 4년 가까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지휘하면서 당시 한국사회에 인지도를 높였다. 월남전 당시 채 장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지시하는 등 덕장으로 군 안팎의 존경을 받아왔던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다. 당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면서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이 용병(傭兵)이니 뭐니 하는 소리가 시민단체와 학계에 등장했고, 근거 없는 양민학살 소문이 돌았다. 이런 소동은 모두 좌파의 스승 격인 <우상과 이성>의 저자 리영희의 악영향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데, 그가 이 책<베트남전쟁과 나-채명신 회고록>을 준비한 것도 그때의 충격 때문이었다. 서문에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 장군의 강한 분노와 절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2005년 11월17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주관으로 실시된 베트남전쟁에 대한 학술회의에서 김진선, 한홍구 등의 주제발표를 듣던 그 장면이 되살아났다. (그날 주제발표는) 분명 역사의 왜곡이며, 참전 전우에 대한 모독이었다. ‘강대국 미국이 약소국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에 왜 한국군이 말려들어가야 되는가’라는 대목에선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가 치밀었다. 계속 이어지는 주제 발표자의 뜻밖의 발언은 이곳이 대한민국의 국방부 산하기관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의 궤변과 이적(利敵)발언으로 이어졌다.”
장군의 말은 계속된다. “이래서 나는 회고록 집필을 결심하였다. 글을 쓰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이 대한민국 역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정당성과 당위성을 국민과 후대에 알려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의 말대로 베트남전 참전 당시 한국군은 양민 보호 우선주의를 실천했고, 국가 이익 제일주의를 앞세워 지휘했다. 장군의 회고는 소박하면서도 진실된데, 그게 진실이다. 구체적으로 파월 초기부터 장병들에게 전투수당의 80% 이상을 고국에 송금하도록 권장했다. 그러고도 남은 돈으론 TV 구입을 권했다.
영웅을 기리는 TV 다큐멘터리 보고 싶다
그걸 들고 귀국하면 농촌 부모들이 얼마나 좋아했을 것이며, 혹시 되팔아서 돼지 여러 마리를 사서 기를 수 있고, 그게 부농(富農)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내가 아는 당시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당시 시골에서 자란 나는 당시 베트남에 간 군인을 형님으로, 자식으로 둔 이웃집의 활짝 피어나는 분위기를 잘 안다. 장군의 증언은 이렇다. “미군들 주둔지 근처에는 술집과 매춘부들이 우글거렸으나 한국군 주둔지 부근에는 단 한 곳의 술집이나 매춘부가 얼씬 못했다. 근검절약을 실천하여 고국에 송금한 액수가 권장 목표치를 상회, 83%선을 계속 유지했다. 그러하다 차츰 증가하여 1969년에는 92%까지 증가했다. ”(497쪽)
장군 채명신의 스토리는 그 이상이다. 그는 당초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전투병력 파병 반대 의견을 피력했던, 담대한 군인이다. 무조건 반대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효율을 높일까를 연구하는 충정에서 나온 문제제기였지만, 국익과 현실 사이에서 고심참담하던 군 통수권자에게 전투병력 파병 반대 의견은 실로 충격이었다. 그런 진통과 고려를 거쳤기 때문에 우리의 해외 첫 파병은 성공을 거뒀다. 미군사령관이 쥐고 있는 작전지휘권을 가져온 것, 그래서 작전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그의 적극적인 의견개진 덕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채명신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에 관한 정보의 보물창고이다. 하지만 그의 타계를 전후해 충분히 조명되지 않고 넘어갔고, 며칠 동안의 감동에 머문 감이 없지 않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장군 채명신을 다룬 양질의 TV 다큐멘터리가 그의 타계 1주기를 전후해서는 등장하길 나는 기대한다. 대부분의 채널들이 시시덕거리고 웃고 떠드는 예능에 매달리고, 무책임한 시청률 놀음을 계속하고 있지만, 공영방송이라는 KBS까지 묻어갈 순 없다. 그들의 균형감각과 양식 회복을 나는 원한다.
아울러 방송정책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위원회라는 곳도 정신을 차리길 기대한다. 그들이 본연의 기능만 극대화해도 방송 콘텐츠가 저 지경에 이른 건 어느 정도 걸러내고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덧붙여 이번 기회에 채명신 장군을 다룬 양질의 전기 평전물도 서점가에 등장했다는 굿 뉴스도 듣고 싶은 마음이다. 목표는 간단하다. 채명신 장군을 계속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아까 언급한대로 살아서는 명장(名將), 죽어서는 대한민국 호국의 신, 그렇게 만드는 게 포인트다. 특히나 사회통합의 상징인 영웅이 없는 한국사회에서는 그게 급선무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