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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도 ‘행복추구권’을 갖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일까. 고대 노예 사회에서는 물론 중세 사회까지도 평민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했으므로 행복에 대한 욕구는 강했을지라도 행복추구권은 감히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본주의의 발달로 만인의 인권사상이 형성되지만 신이 정해 준 위치에서 분복(分福)대로 사는 것이 미덕이라는 신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진취적이고 모험심이 강한 개인들의 행복 추구 행위가 항해술을 발달시키고 교역을 확장하고 농업 혁명과 제조업을 일으켜 근대 국가·근대 경제·근대사상을 생성했고 행복 추구는 만인의 당연한 권리로서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에 명기되게 된다.
행복추구권은 그것이 개념으로 명확히 정립되고 공인된 이후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행복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급속도로 발전시켰다. 많은 사람이 보다 나은 삶, 의미 있는 성취를 추구하면서 기술이 발달하고 상업·산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 생활수준과 의식수준이 향상하면서 정치적인 의식도 높아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획득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행복 추구를 권리로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처럼 느끼며 그것의 노예가 됐다. 근대의 초기에는 행복추구권이 어려운 일에 도전하고 목표를 위해 모든 장애를 극복하는 성취 지향적인 삶을 만들어 냈는데 이제 압제도 사라지고 물자가 풍부해지고 나니까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 때문에 불안·초조에 시달리며 허둥거린다.
내가 행복한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확인이 용이한 성공이나 출세·치부, 그리고 쾌락 추구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려고 한다. 선진국 국민뿐만 아니라 이제는 개도국 국민들도 주말에는 무엇이건 주중과 다른 활동을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그래서 주말에도 일하면 무언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취미·오락 등 여가 활동이 중요하게 됐는데 이제는 독서·음악 감상 등의 정적(靜的)이고 심신 휴양적인 취미는 ‘색깔 없는’ 취미가 됐다. 운동도 테니스·탁구보다 자극적이고 위태로운 번지 점프·빙벽 타기 등이 ‘화끈’한 취미로 남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2차, 3차, 4차를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디스코텍에서는 밤새 춤추고도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냥 아직 지각이 덜 들고 체력이 남아도는 청소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은근히 이런 콤플렉스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서구인들의 섹스에 대한 집착은 과도함을 넘어 우매(愚昧)함에 이른지 오래다. 기독교적인, 특히 청교도적인 본능의 억압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성해방은 이제는 도를 넘어 강박 관념이 됐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미국인들은 한 달쯤 데이트 상대가 없으면 자기 비하감과 우울증에 빠지고 성적인 파트너가 많은 인생이 풍성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아직도 이 세계에는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행복추구권을 주장할 수조차 없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행복추구권의 무절제하고 어리석은 행사가 큰 불행과 정신적 황폐화를 낳고 있으니 아이로닉하고 죄스러운 일이다.
행복은 쾌락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나비처럼 자극적인 쾌락을 좇다가 허무와 비탄만을 안지 말고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삶을 진정한 축복으로 만들 것이 무엇인지를 심사숙고해 결정하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것이 확실한 행복 예약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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