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칼럼 ▶ 회원칼럼
士大夫다운 양계
서지문   |  2005-10-14 12:54:46  |  조회 2290 인쇄하기
죄인의 아들, 살인자의 아들, 정신병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쓰고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여 왕위에 오른 개혁 군주 정조(正祖)가 머리 좋고 학식 깊고 백성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그들을 구제하려는 사명감에 투철한 청년 다산 정약용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정약용은 자신과 이상이 완벽히 일치하는 현군(賢君) 정조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는가?

정약용은 유학자였지만 정조의 화성 축조를 위해 기계공학을 연구, 기중기를 설계했으며 암행어사가 돼 민정을 살펴 보고했고 정조는 정약용에게 이런저런 직책을 맡기며 재상감으로 길렀다. 다산에게 정조는 자신을 알아주는 어버이 같은 존재였고 같은 이상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함께 나라를 바로 세울 동지였다.

그러나 정조가 아깝게도 49세의 나이에 사망하고 그가 그토록 힘겹게 견제했던 수구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정약용은 서학(천주교도) 도당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고 형 정약전과 함께 머나먼 유배 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셋째 형 정약종은 혹독한 고문에 끝내 목숨을 잃었다.

절해고도 흑산도로 유배를 가는 형과 강진의 주막에서 단장(斷腸)의 이별을 하고 다산은 강진에서 주막의 뒷방을 얻어 거처하게 된다. 지금은 죄인을 수감하면 적어도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해 주지만 그때는 유배된 죄인은 낯선 만리타향에서 스스로 숙식을 조달해야 했다.

한창 학문적으로 무르익고 관리로서 옳은 정치를 실행해 나가고 있던 정약용이 서른 아홉의 나이로 죄인이 돼 가족과 이별하고 땅 끝에서 편히 몸을 누일 곳조차 없게 됐으니 그 좌절과 슬픔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그러나 다산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슬픔을 위로해야 했고 사춘기의 아들들이 폐족(국가적 죄인의 집안으로 몰락한 양반)으로 과거(科擧)도 볼 수 없는 처지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고 몸가짐을 바로 할 수 있도록 독려해야 했다.

그래서 다산은 유배지에서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은 묻어 두고 아들들에게 늘 바르게 처신하도록 편지마다 당부했는데, 그냥 막연히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어른을 공경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으로 누구에게는 어떻게 하고 어떤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하라고 적어 보냈다.

즉, 과거를 목표로 공부하는 사람은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없으니, 지금 과거를 볼 수 없게 됐지만 오히려 더욱 학문에 힘쓰기를 간곡히, 누누이 당부했다. 또 아들들에게 시와 문장을 써 보내게 해 그 표현과 생각을 하나하나 논평해 줘 아들들의 마음이 학문에서 떠나지 않고 생각이 고귀한 곳을 지향하도록 인도했다.

둘째아들이 생계를 위해 양계를 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는 양계를 그냥 생계의 수단으로 하지 말고 농서(農書)를 잘 읽고 좋은 방법을 골라서 시험해 보고 여러 방법으로 닭이 편안하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기를 것을 당부했다.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 보면서 짐승들의 성정을 파악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래서 닭들에게 제일 적합한 양계의 방법을 찾아내고, 양계를 위한 경(經)을 저술해 볼 것을 권했다. 그것이 보통 농부와 다른 사대부가 양계하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억울한 귀양살이와 중도에서 망가진 자신의 삶과 꿈에 대한 회한을 접어 두고 아들들을 격려하고 인도하면서 유배지에서 500권의 저서를 저술한 정약용은 우러러보기에도 눈부신 선인이다. 역경에서 위대해질 수 없는 우리는 순경(順境)에서 성실함만이라도 갖도록 해 보자.
      
굿소사이어티
덧글쓰기 | 전체글 0개가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0/1200 bytes  
 
82 역사의 아이러니  서지문 05-10-14 2066
81 모두가 자본주의 탓?  서지문 05-10-14 2025
80 제우스신의 명령  서지문 05-10-14 2169
79 자유와 윤리의 조화  서지문 05-10-14 2032
78 선진국의 조건  서지문 05-10-14 2118
77 士大夫다운 양계  서지문 05-10-14 2290
76 행복추구권  서지문 05-10-14 2251
75 칭찬을 받는 자세  서지문 05-10-14 2221
74 친절의 경제학  서지문 05-10-14 2075
73 출세와 돈과 자존심  서지문 05-10-14 2162
71727374757677787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