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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100년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대중용 밥집의 생활사
조우석 <문화평론가>   |  2015-01-22 13:16:05  |  조회 2036 인쇄하기
근현대 100년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주던

대중용 밥집의 생활사

 

<백년식당(요리사 박찬일의 노포 기행)> – 박찬일 著



조우석 <문화평론가>

 

 

새 책 <백년식당>(중앙M&B)이 책이 꽤 읽을만하다는 말을 지난 연말 이후 만났던 여러 사람에서 전했다. 그걸로 선물도 여러 권 했다. 책 선물이란 게 해보면 막상 힘든데 “이게 상대방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다. <백년식당>은 그런 부담이 없어 좋았다. 먹고 마셔서 즐거운 얘기는 보편적이니까. 게다가 글과 책 편집 역시 고급스러웠다.


문제는 책 제목이나 표지만 훑어본 뒤 "그래 보니 침샘 자극용 맛집 소개서 아니냐"는 눈길이다. 이탈리아로 3년 유학을 다녀온 현직 요리사가 썼기 때문에 글의 깊이가 좀 다르다고 해도 상대가 크게 감동하는 것 같지 않다. 사실 저자 박찬일(50)은 잡지 기자로 일하던 중 "돌연 요리에 흥미를 느껴" 유학을 다녀왔다. 그때 상대방에게 이렇게 찔러놓아야 호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걸 대화 중에 깨달았다.


"지난 100여년 근현대사가 이 책에 적절히 녹아있다니까요. 우리 동시대인들과 앞 세대는 무얼 어떻게 조리해 먹고 살아왔을까? 그런 거죠. 그래 보니 설렁탕, 해장국, 냉면 이야기라고 하겠지만, 참 따듯합니다. 대중음식, 서민음식으로 본 영화 '국제시장'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대중음식, 서민음식으로 본 영화 '국제시장' 버전


사실 우리에겐 책에 관한 한 엄숙주의 풍토가 있다. 책이란 무언가 거창한 것을 다뤄야 한다는 것, 소재부터 그래야 한다는 선입견이다. <백년식당>을 손에 쥔 사람은 누구라도 그 나름의 암시와 정보를 얻어가겠지만, 엄숙하고 딱딱한 걸 좋아하는 독자들의 기대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사회학자 전상인(서울대 교수)이 몇 해전 펴낸 책 <아파트에 미치다>의 서문에서 국내 학계 엄숙주의 풍토에 대한 정문일침을 이렇게 놓은 바 있다.


“우리 학계는 통이 큰 편이다. 관심은 계급구조•세계체제•민족문제 같은 주제에 쏠려있다. 일상세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학계가 전장화(戰場化)하고 황폐화되니 ‘배우고 때로 익히는 일’이 즐거울까?”


그때 그는 이런 지적도 남겼는데 역시 정곡을 찌른다. “우리 학계는 스토리가 부족하고 디테일이 취약하며 모국어의 미학 또한 아쉽다.” 출판행위도 그러하고, 일간지 서평 역시 마찬가지다. 남은 건 2.5류(流)의 어설픈 교양주의뿐이니 독자들이 자꾸 책에서 등을 돌린다. 생활 따로, 의식 따로의 그런 의식구조에서 <백년식당>같은 책은 일간지 서평으로도 잘 다뤄지지도 않는다.


그까짓 식당 얘기? <아파트에 미치다>가 기억해둘 만한 아파트의 사회학 쪽이라서 즐겁고도 유익했다면, <백년식당>은 보기 드물게 식당의 문화사-일상사에 도전했다. 그래서 책의 카피대로 “한 입을 베어 물면 한 시대가 입 안에 들어오는 느낌이면서도 따듯하고 즐겁다. 책 뒤에서는 이보다 멋진 레토릭 하나를 만날 수 있다. “한 그릇의 청진옥 해장국을 먹는 것은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필자 경우 "맞아, 맞아" 하면서 읽다가 두 꼭지를 남겨두는 중대결심을 했다. 이 맛난 걸 아껴서 먹자는 심정이었는데, <백년식당>은 노포(老鋪), 즉 오래된 식당 19곳 탐방이다. 대구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 ‘옛집식당’의 육개장, 서울 ‘우래옥’의 평양냉면, 부산 '할매국밥’의 돼지국밥 등이 소개된다. 절묘한 게 한 끗 차이다. 이 차이가 문화사-생활사로서의 식당 얘기와, 그렇고 그런 맛집 소개서를 결정 짓는다.


클래스가 다른 문화사-생활사로서의 식당과 서민의 삶 얘기


즉 <백년식당>은 고단했던 근현대 속에서 서민들의 먹을거리와 대중식당의 사회문화사 쪽을 훑는다. "음식의 역사는 곧 사회사"(104쪽)이라는 저자의 단언도 그렇지만, 부산의 대중식당인 마라톤집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산에 부산만의 민속박물관이 세워진다면, 반드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요소가 가득한 집이다."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주인공 덕수의 삶처럼 이 책 역시 전쟁-피란-근대화로 이어지는 격동기가 이 대중식당(마라톤집)의 내력과 메뉴에 모두 배어있고, 부산 사나이들의 추억이 담겨있으니 당연한 소리다. 무슨 소리인가? 번화가 서면에 1959년부터 자리 잡은 마라톤집에서는 메뉴판에 술안주인 '마라톤'이 1만3천원이고, '재건'이 1만400원 하는 식으로 쓰여있다.


전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쇼트닝 기름을 프라이팬에 잔뜩 두른 뒤 조개 등 해물을 섞어 만든 해물전이 '마라톤'이다. 역사가 좀 되는 이 집에서는 주인이고 손님이고 마라톤이라고 하면 서로 통한다. 알고 보니 '재건'은 해물볶음인데, 이것도 1960년대 당시 손님들이 "해물전만 하지 말고 한 번 볶아보라"고 해서 탄생했던 메뉴다. 그런데 왜 '재건'이고 ‘마라톤’이지?


손님들이 그렇게 붙였다. ‘재건’의 경우 1060년대 초 박정희의 혁명정부가 "재건합시다!"를 당시 인사말로 삼는 바람에 재건주택, 재건담배 등이 쏟아질 무렵 해물볶음도 덩달아 재건이 됐다. 그게 반세기 넘는 지금껏 유지된다는 게 신기하다. 이 집보다 훨씬 전인 1932년 창업한 서울의 유명한 추탕집 용금옥도 그렇다.


20년 전 <용금옥 시대>라는 책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이 식당엔 야당 정치인과 남북한 교류의 흔적이 배어있는 ‘역사적 밥집’이다. 1953년 휴전회담 때 북쪽 대표가 "용금옥 지금도 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지만, 시인 정지용, 공초 오상순, 소설가 박종화 등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그 이전 1970년대 초 남북회담 때 저쪽의 부수상 박성철도 용금옥의 안부를 물었던 것을 필자는 그때 신문에 접했다.


샤르트르가 찾던 그 카페, 그리고 시인 정지용의 단골집 용금옥


프랑스 파리의 카페가 유명한 건 철학자 샤르트르 등 유명인들의 흔적 때문인데, 그 동안 우리는 그런 스토리를 살뜰히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백년식당>은 귀한 기록인데, 이 책의 효용은 또 다른 게 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가 일제시대 사회경제사 연구의 텍스트로 쓰이듯, <백년식당>도 20세기 한국인 생활사의 증언으로 활용될 것이다.


20세기 평균적 한국인들은 밥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에 관한 훌륭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그릇의 청진옥 해장국을 먹는 것은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조금 전 훌륭한 레토릭을 소개했지만, 저자는 그 대목에서 이런 탁월한 문제제기도 한다. 청진옥 등은 한갓 밥집의 차원을 넘어 이미 공공재(公共財)의 하나로 봐야 한다는 대목이다. 혹시 엄숙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당신에게 그의 육성을 들려 드린다.


"청진옥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중요한 우리 노포다. 그 가게가 자기 자리를 잃고 개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각형 빌딩 한 구석에 놓여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책임 같다. 우리는 이런 공간을 공공재로 보기 시작했다. 여담인데, (청진옥이 본래 있던 공간인 서울 종로) 피맛골이 사라진 발단과 경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조사하고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막판에 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게 맛집 소개 이상의 책 <백년식당>의 맛인데, 무엇보다 이 책을 읽는 순간 행복해진다. 그 점 보장한다. 아까 지난 연말에 다섯 권을 구입해 다른 책과 함께 친구들에게 나눠줬고 했는데, 그건 그들이 이 책을 읽고 필자처럼 즐거워할 것이란 확실한 느낌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삶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이런 게 21세기 독자친화형의 책이 아닐까?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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