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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장병의 2004년 여름나기
서지문   |  2005-10-14 13:01:41  |  조회 2185 인쇄하기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견디기 어렵게 땀이 흐른다. 예년에는 무덥다, 무덥다 해도 폭서(暴暑)라는 탄식은 흘러나와도 혹서(酷暑--가혹한 더위)라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는데, 올 여름은 정말 혹독한 더위인 것 같다. 나는 집에 가만히 있어도 이렇게 더운데, 뙤약볕 아래서 훈련을 받는 장병들은 얼마나 더울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짠하고 송구스런 마음이 든다.

이렇게 무더운 여름은 사람의 품위유지에 치명적인 적이다. 재치로 유명했던 어떤 원로교수님은 아들을 혼인시킬 때 ‘난 며느리하고는 절대 한 집에 못 살아. 여름에 빨가벗고 있어야하니까’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러고 보면 에어콘도 선풍기도 없던 옛날에는 시부모들이 한여름에 며느리 앞에서 어떻게 품위를 유지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시부모의 불편함을 어떻게 며느리의 고난에 비기랴.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장가를 든다’는 말이 시사하듯) 남성들이 처가에 들어가서 살았다고도 하지만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당연한 관습이었던 조선조의 며느리들은 삼복더위에도 하루 종일 부엌 속, 화덕 앞에서 일하다가 땀 범벅이 된 몸을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잤다. 샤워시설 같은 것은 물론 없었고, 여인들도 가끔 개울에서 목물을 하기는 했지만 남의 며느리된 몸으로 자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위만이 시집살이의 문제였겠는가. 시부모 분부 받들기, 뜻 맞추기, 시어머니의 학대, 시누이의 구박, 끝없는 가사노동, 넉넉하게 먹지 못하는 배고픔 등등 시집살이의 고통은 아마 요즘 군복무의 어려움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정해진 기한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위를 필사적으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시집살이를 하는 조선의 며느리들만은 아니었다. 내가 영국의 국제세미나에서 만난 어떤 짐바브웨(옛 로디지아) 출신의 영국인은 자기 할머니는 그 뜨거운 남부아프리카에서 여름에도 한 번도 ‘코르셋’을 벗은 적이 없다고 했다. ‘코르셋’은 요즈음은 몸매를 예쁘게하기 위해서 입는 속옷이지만 원래는 맨 살의 질감이 옷 아래로 드러나지 않도록 ‘숙녀’의 몸을 꼭꼭 묶는 갑옷 같은 속옷이었다.

영국출신의 로디지아인이라면 농장의 주인마님이었을 터이니, 흑인 노예나 머슴들 앞에서 마님으로서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그 더운 여름에도 갑옷같은 코르셋을 벗지 못한 것이리라. 나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 대농장의 주인마님 노릇도 호강스러운 것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상민이 돈을 벌어서 양반의 지위를 사려고 하는데, 양반이 되면 여름에도 아무리 더워도 버선을 벗지 못하고 밥을 먹을 때도 의관을 정제하고 소리나지 않게 점잖게 먹어야된다는 말을 듣고 그런 양반은 안 하겠다고 하는 것이 나온다. 양반이 못된 짓을 많이 했지만 양반의 흉내나마 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이 가혹한 여름에, 양반의 특권도 농장주 마님의 호사도 못 누리면서 왜 두꺼운 위장복을 입고 땀을 억수로 흘려야하나,하는 의문이 들면 긴 한복입고 화덕 앞에서 폭포수 같은 땀을 흘리던 조선시대의 조상할머니들을 기억해 보자. 그리고 문약한 양반들이나 섬세한 서양의 숙녀들도 참았던 더위니까 대한민국의 건아는 능히 견딜 수 있다고 다짐해 보자.

군 복무가 이런 혹독함을 다 참고 견뎌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군복무를 거친 사람은 위기와 시련에 굳건히 대처할 저력을 갖게된다. 이 무자비한 더위에 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더위와 겨뤄 이기면 앞으로 생의 여러 험한 고비에서 2004년의 여름을 떠올리며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병 여러분의 건강과 건투를 간절히 빈다.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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