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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백의 아내
서지문   |  2005-10-14 13:03:33  |  조회 2002 인쇄하기
요즈음은 흥미를 끄는 영화가 나와도 영화관에 가기가 번거로워 비디오 테이프로 나오면 봐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려서 또는 바빠서 못 보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황산벌’이라는 영화는 마음먹고 영화관에 가서 보았다. 이 영화를 소개한 신문 기사를 읽고 계백의 아내가 죽기 전에 계백에게 항의하면서 한 대사를 정확히 듣기 위해서였다. 유년 시절 백제의 마지막 장수 계백 장군이 신라군과 필사의 결전을 하러 황산벌로 나가기 전에 혹시라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처자를 죽이고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생 잊지 못할 감동을 느꼈다. 어른이 되고 투철한 여성주의 사상을 갖게 된 후에도 계백 장군의 이야기는 반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 일화는 물론 가장이 가족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 관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오늘날의 법의식에서 보면 계백의 행위는 살인죄에 해당된다. 역사 패러디물인 영화 ‘황산벌’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김유신·김춘추가 개인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대중 조작을 통해 성취한 것으로 상정하고, 역사적 대업(大業)이라는 것이 사실은 일부 권력자의 욕망 충족을 위해 수많은 민중이 희생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용기라든가 순국이라든가 애국심 같은 가치는 희화화됐는데 이 영화에서 계백의 아내는 계백이 신라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나가기 전에 처자를 죽이려고 칼을 빼자 “내 알토란 같은 새끼들 절대 못 죽인다”면서 반항하고, 계백이 “남자는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면서 순순히 죽기를 요구하자 남자들이 바로 그 이름 때문에 망하는 것을 모르느냐고 조소한다.

계백 장군이 이 영화에서처럼 단순히 사후의 명성을 얻기 위해 처자를 죽이려 한 것이라면 백제 시대의 여성이 자아의식이 없었다 하더라도 필사적으로 반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옛날 계백 장군의 아내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고 믿는다. 남편이 얼마나 비장한 심경으로 가족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계백이 자기의 처자를 자기 몸보다 몇 배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감히 죽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처자도 죽일 수 있는 냉혈한도 있지만 계백은 그런 인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계백의 부하와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가 숭고한 우국충정에서 애지중지하는 처자를 죽였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황산벌의 신화가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이 됐다고 믿는다. 백제를 정복한 신라는 그 신화를 없애고 싶었겠지만 정복자의 권세로도 말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계백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 행사로서 처자를 죽였다면 그는 영웅이 될 수 없었다. 그가 훌륭하고 용감한 장수였을 뿐만 아니라 (관창을 사로잡았다가 놓아준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깊은 인간애를 지닌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그가 처자를 무한히 소중하게 여긴다는 확신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국운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라도 계백의 행위는 감동을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처자를 깊이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그의 처자는 죽음의 전장에 출전하는 남편과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을 것이고, 모두 그의 행위를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역사의 현대적인 해석이 현실적일 수는 있지만 반드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동은 역사에서 제거돼야만 하는 불순물은 아니다. 계백의 아내는 행복하게 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장병들도 신화는 모두 허구라고 일소에 부치기보다 나의 삶에서 어떤 신화를 창조할 수 있을지를 깊이 궁리해 보면 어떨까?
      
굿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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