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통합의 원년 2013년을 전망한다
- 책임있는 주류(主流)문화 창출은 결국 시민과 지식인의 몫
박성현 칼럼니스트
요즘 국민통합이란 단어가 대세다. 박근혜 당선자(이하 ‘GH’) 자신이 “100프로 국민통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제 국민들이 GH에게 “국민통합을 해 내라!”고 요구할 참이다. 그런데 우리 좀 냉정해지자. 국민통합이란 무엇인가? 국민통합은 대통령만 수행하는 일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용감한 질문만이 문제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1. 국민통합은 사회통합의 대용품
사회과학에는 원래 국민통합이란 용어가 없다. 대신 ‘사회통합’이란 개념이 있다. 사회통합은 사회의 주류문화(mainstream culture)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때 주류문화는 그 사회가 소중히 여기는, 또한 그 사회의 운영원리를 구성하는 근본 가치들(core values)을 포함한다.
솔직히 고백하자. 우리 사회에는 주류문화도, 근본 가치도 확립되어 있지 않다. 조상이 물려준 한식, 온돌, 언어와 같은 훌륭한 문화기반이 있음에도 주류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변덕스런 유행이 있을 뿐이다. 또한 전통 유교 사회의 흔적이 여기 저기 남아 있지만 근대문명에 걸맞은, 정치에 관한 근본 가치는 공유되어 있지 않다. 표를 좇는 정치인들의 공허한 약속과 위험한 선동이 귀 따가울 뿐이다.
이토록 취약한 기반 위에서도 경제는 발전해야 하고 정부는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어차피 당장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통합 대신에 나온 대용품이 국민통합이다. 게다가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근대국가이기 때문에, 시민이란 말보다는 국민이라는 말이, 사회라는 말보다는 국가라는 개념이 더 매력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통합이란 단어를 쓰는 대신에 국민통합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짝퉁을쓰면 대가가 따른다. 부정확한 언어는 부정확한 인식을 만들어 낸다. 언어는 사회를 묶어주는 결합제(bond)이기 때문에 언어를 비틀면 결합제가 약화된다. 사회통합이라 하면 누구도 “대통령 혹은 정부가 몽땅 책임져야 한다”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통합이라 하면 “국가의 지도자, 즉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사회통합에 대한 거의 모든 책임이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대통령이 독박을 쓰게 되고 정치적 불만도 높아지게 된다.
국민통합이라는 단어는 당장은 국민을 묶어주는 비전을 제시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대통령과 정부에 (충족될 길 없는) 과도한 기대를 덮어씌움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지금 정치인들에게는, 표심에 대한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사회통합이란 단어 대신에 국민통합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민, 지식인은 냉정해져야 한다. 정치인은 표심을 좇지만 우리는 진실을 좇기 때문이다. 진실만이 생명이 뻗어가는 길을 비추어 준다. 진실을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 사회에는 주류문화가 취약하다. 따라서 사회통합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사회가 갈갈이 찢겨져 분열되어 있다. 사정이 이같이 위급한 까닭에 사회통합에 대한 손쉬운 짝퉁 대용품으로서 국민통합이란 구호가 대세가 되었다.그러나 과연 대한민국이 짝퉁 대용품으로 충족될 수 있는 수준인가? 아니다. 이 땅은 무엇이든 최고의 품질을 요구한다. 들들 볶고 지져서 기어코 최고의 품질을 만들어낸다. 이 글은 국민통합을 가다듬고 담금질해서 사회통합으로 이루는 길을 더듬는다.
2. 우리사회에 주류문화가 약한 까닭은?
우리 사회에 주류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보다 정확하게는, 무엇이 주류문화의 확립을 가로막고 있을까? 주류문화(mainstream culture)는 곧 문화적 주도권(cultural hegemony)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같은 고도 시장경제 체제는 경찰과 군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믿음, 사고방식, 가치관에 의해 돌아간다. 정신의 힘에 의해 운영된다. 주류문화에 의해 움직인다.
원래는 정신과 문화의 다이내믹이 사회체제를 만들고 발전시키는 것이 정상이다. 18세기에 영국의 산업혁명과 국력 점프가 있기 전에 최소한 오백 년 이상에 걸쳐 정신의 준비가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13세기의 ‘마그나카르타’), 모국어의 확립(9세기경부터 나오기 시작한 영어 성경은 세계최초의 모국어 성경. 13세기 ‘캔터베리 이야기’는 영국 근대문학의 효시), 세계적 희곡(16세기 셰익스피어 문학), 현대자연과학 방법론의 확립(17세기 초), 뉴튼 수학/물리학(17세기 말), 문명에 관한 철학적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18세기 초) 등은 정신의 힘이 어떻게 단련되어 왔는지 보여준다.
온건 개신교인 영국 국교회의 성립(1534)이나 명예혁명(1688)을 통한 의회민주주의의 확립과 같은 사회정치적 변화는 위의 사례에서 보여지는 정신의 힘이 발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이 정신의 힘이 응축되어 주류문화가 된다. 한마디로 주류문화가 사회정치를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주류문화에 의해 나라를 건국하고 경제발전을 이룬 것이 아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걸출한 두 인물에 의한 위로부터의 건국과 근대화였다. 우리 사회의 주류제도권은 사회를 이끄는 주류문화 및 그 문화의 핵심을 구성하는 근본가치를 성숙시킨 사람들이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위로부터의 개혁에 참여하여 뼈 빠지도록 일한 분들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 주류문화가 확립되지 못 했다. 즉 사회정치에 관한 근본가치가 우뚝 서지 못 했다. 이제 이를 해야 할 때이다.
3. 그들의 문화권력은 대한민국을 공짜로 접수했다
80여 년 전, 이탈리아의 천재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A. Gramsci)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
“시장경제 시스템은 자본과 경찰과 군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주류제도권이 이끄는 주류문화(mainstream culture = cultural hegemony)에 의해 유지된다. 주류문화에 대항해서 이를 공격하는 문화 진지를 만들어 진지전(war of position)을 전개해야 한다.”
만약 그람시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위와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웃기는 사회다. 주류문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에는 근대문명을 보듬어 안을 주류문화, 주류가치가 없다. 그런데 경제는 엄청나게 발전해서 풍요로운 사회가 됐다. 이런 기름진 땅에 주인(=주류문화)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주인 없는 기름진 들판을 차지하듯, 우리가 몽땅 먹을 수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주류제도권은 문화와 가치를 만든 적이 별로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명의 걸출한 지도자가 실행한 위로부터의 건국과 근대화를 지지해서 뼈빠지게 일해왔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리더십이었지 주류문화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을 틈타 1990년대 급진 운동세력은 문화 진지를 만드는 데에 올인했다. 역사해석, 문학비평, 영화비평, 엔터테인먼트 비평, 인문학, 사회과학, 언론노조, 방송사, 신문사, 포탈……. 사회주의권이 붕괴했기 때문에 직접적 혁명을 일으킬래야 일으킬 수 없었던 이들은 문화 진지 건설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필자는 이들을 종친초(종북, 친북, 떼촛불 혼합체)라고 부른다.
그람시의 문화 진지는 주류문화에 도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문화 진지는, 주인 없는 기름진 옥토를 밀고 들어가 차지하는 문화권력이 되었다. 국민통합은 사회통합이며, 사회통합은 주류문화의 확립이다. 주류문화를 확립하는 과정은 바로 종친초 문화권력과 경쟁하여 이를 제어하는 정신의 전쟁에 다름 아니다.
4. 투표의 전쟁과 정신의 전쟁
왔다. 보았다. 이겼다. Veni, vidi, vici. 기원전 47년 시저(Caesar)가 한 말이다. 이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다. 베니, 비디, 비치! 어디에 왔는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싼 싸움터에 왔다. 장기적 경제공황에 의해 민생이 찌든 황야에 왔다.무엇을 보았는가? 우리 삶의 번영을 위해 존중받아야 마땅한 근본 가치가 조롱받고 능멸당하는 것을 보았다. 민초를 거짓으로 선동하는 꼴을 보았다.누구에 대해 이겼는가? 대한민국이 가꾸어야 할 근본 가치를 조롱하고 능멸하는 정치 세력에 대해 이겼다. 사람을 개인이 아니라 떼로 타락시키는 정치 선동에 대해 승리했다.
대한민국이 가꾸어야 할 근본 가치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을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삼고, [북]한 전체주의의 자체 붕괴를 민족의 운명으로 예감하고, [자]유민주주의(=개인의 선택/책임 및 사유재산)를 사회의 기본원리로 믿고, [세]계시장을 활기 번영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첫글자를 따서 [대북자세]라고 부른다.
이번 대선은 그 동안 우리 사회를 번영시켜 온 대북자세가 위협당하는 절체절명의 전쟁이었다. 이번 대선 결과는 대북자세를 떼의 선동에 의해 흔들릴 수 없는 가치—공화가치(republican values)로 우뚝 일으켜 세우는 첫 걸음이었다. 공화가치를 믿는 우리는 스스로를 ‘공화주의자’라 부른다. 훗날 역사는 이번 18대 대선을 “공화주의자들이 승기를 잡은 날”이라고 규정할 것이다.
우리의 공화주의는 루소(J. J. Rouseau), 즉 자코뱅(Jacobin=프랑스 혁명을 공포정치로 만든 정파)의 공화주의와 다르다. 그들은 ““민주주의(=머릿수, 떼)의 결정에 절대 복종하는 것””을 공화주의라 불렀다.
우리는 링컨(A. Lincoln)과 토크빌(A. Tocqueville)의 공화주의를 따른다. 우리는 “민주주의(=머릿수,떼)가, 사회와 생명을 번영케 하는 근본원리, 근본가치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을 공화주의라 부른다. 사회는, 떼의 논리가 아닌, 생명번영의 원리를 소중히 섬길 때 크게 발전한다. 섬김은 곧 모심(侍)이다. 이것이 김지하가 그토록 간절하게 모심을 이야기하는 까닭이다. 12.19는 무수한 시민이 대북자세 공화가치에 대한 능멸을 물리치고 섬김을 택한 날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북자세 공화가치를 옹호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방파제와 진지를 만든 날이다.
명확하게 밝힐 일이 있다. 이 전쟁은 새누리당이나 정부가 할 전쟁이 아니다. YS 정부가 가장 잘못한 일은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정부에게는 역사를 바로 세울 자격이 없다. 오직 지식과 콘텐츠를 통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YS가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나중에 과거사위원회니 뭐니 해괴망측한 조직들이 만들어졌다. 종북 단체에 가입해서 활동한 자, 경찰관을 불태워 죽인 자들이 민주화 인사로 둔갑해서 수 억 원씩 받아 챙겼다.
정신의 전쟁은 시민과 지식인의 전쟁이다. 정신의 전쟁에서 사용되는 총알은 콘텐츠(책, 영화,노래, 비평, 역사해석) 이며, 그 총알을 나르는 화약은 소통(방송, 언론, SNS..)이다. 세계 10 위권 안의 경제대국인 대한민국 사회가, 한 줌도 안 되는 종북, 친북 세력에 코가 꿰어 맥없이 질질 끌려다녔던 이유는 단 하나, 콘텐츠와 소통에 있어서의 약점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주류문화가 확립되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대한민국의 공화가치(=우리 삶이 소중하게 아끼고 키워가야 하는 가치)를 담아낸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주체는 시민과 지식인이다. 정부나 새누리당이 아니다.
5. 주류문화가 꿈틀대면 리버럴이 생겨난다
야권 정치인들이 왜 진보 빅텐트 속으로 들어가서 종친초 노릇을 하는 존재가 되었나? 왜 민노총, 전교조, 원탁회의 따위 앞에 굴복하게 되었나? 종친초가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친초 문화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마치 주식 시장의 깡통계좌(leverage)와 같다. 백만원을 주고 주식 1,000 주를 사서 이를 담보로 맡기고 다시 800 주를 더 사고, 이를 담보로 맡기고 다시 640주를 더 사고…….종친초의 리더십 역시 이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전교조, 민노총, 문학비평, 언론노조가 서로를 지탱해서 그 영향력을 점점 키워왔다. 출발은 극소수이지만 그룹이 되고, 세력이 되고, 정치집단을 움직이고…….
이 종친초 문화권력이 장악한 진보빅텐트가 작동한지 이미 20년이 훌쩍 넘는다. 너무 강고하게 작동하고 있어서 ‘합리적 온건 대안세력’(=리버럴)이 성장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리버럴이란 무엇인가? 대북자세 공화가치를 공유하되 상대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선호하는 집단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기준으로 보면 지금 새누리당이리버럴이다. 야권에서 정통 리버럴이 성장해 나오면 새누리당은 '리버럴A'가 되고 야권은 '리버럴B'가 된다. 그 때 대한민국은 두 개의 리버럴 정당이 경쟁하는 사회가 된다.
(보수-진보 구분틀은 아무런 족보가 없는 엉터리 구분틀이다. 보수-리버럴구분틀이 맞다. 우리 사회의 약점은 ‘정통 리버럴’이 없다는 데에 있다. 매우 역설적인 진실이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개혁 리버럴’이었으며 박정희는 ‘군복 입은 개혁 리버럴’이었다. 대한민국은 애초부터 개혁 리버럴의 나라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팸플릿을 통해 설명한다.)
한가지 분명히 할 일이 있다. 필자가 10월에 발표한 ‘이제 보수주의가 탄생한다’라는 팜플렛에서 밝혔듯이, 보수든 리버럴이든, 공화가치를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정치철학의 구분틀에서는 모두 ‘보수주의’이다. 정파로서의 ‘보수’와 정치철학으로서의 ‘보수주의’는 전혀 다르다. 보수주의는 공화가치(=다수결, 즉 떼의 위세로 도전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되는 근본 가치)를 확립하여 생명이 과거-현재-미래를 뚫고 번영하도록 하는 것을 추구하는 정치철학이기 때문이다.
주류문화가 꿈틀대면 진보 빅텐트가 찢어지면서 ‘정통 리버럴’(=리버럴B)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한국 사람들은 빠르게 느끼고 빠르게 바뀌고 빠르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6. GH 정부에 보내는 충고
짧은 충고 두 가지만 하고 싶다. 첫째, 강직하고 실무적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중용하라. MB 정부에서 그런 사람의 예를 들면 김황식, 박재완, 김관진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정성들여 찾으면 상당수 존재한다. 대한민국이 그리 호락호락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입으로 ‘보수’니 ‘우파’니 떠드는 사람에겐 이런 질문을 던지면 된다.
- 당신은 어떠한 실무적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가?
- 당신은 지난 5년간 어떠한 투쟁을 해왔는가? 하고 있는가?
둘째, 교육과 문화 분야에는 반드시 정신의 전쟁을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중용하라. DJ 정부가 왜 이해찬 전 장관을 교육부 장관에 앉혔는지, 왜 박지원 전 장관을 문광부 장관에 앉혔는지, 깊게 이해해야 한다. 교육과 문화의 왜곡이 지금의 2030 세대를 길러냈다. 정부의 교육, 문화 부서는 우리 시민,지식인이 전개하는 정신의 전쟁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부서이다.
7. 새누리에 보내는 충고
짧은 충고 세 가지만 하고 싶다.
첫째, 매서운 실무적 개혁을 추진하라. 예를 들어 ‘교육감 선거를, 정당추천제로 바꾸는 입법활동이다. 예를 들어 북한 전체주의 실무자에 의한 반인도범죄를 낱낱이 기록해 두는, 북한인권법의 추진이다.
둘째, 이미 30년 넘은 전통으로 굳어진 재정건전성을 유지하라. ‘세수와 지출’—살림살이를 지키는 것은 국회다. 국회가 나라 살림을 튼튼히 지키면 세상이 편안해 진다. 지금 당신들이 재정건전성을 파괴하면 젊은 세대가 개고생한다. 그런 비열한 배임행위를 절대로 하지 말도록!
셋째, 정신의 전쟁터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 솔직히 말하자. 새누리당 정치인들은 투사였던 적이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북한 통전부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지금껏 해 온 일은 ‘지역구 선거 비즈니스’였을 뿐이다.
새누리당은 오직 국가경영의 땀냄새 나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온건하고 실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 만에 하나, 파란물감 들인 완장을 서둘러 매고 설치면 이념 코스프레를 한다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투표의 전쟁은 정당의 몫이고 정신의 전쟁은 시민,지식인의 몫이다.
8. 맺음
12.19는 절반의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치권력만으로는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깊게 분열시키고 있는 종친초 세력의 핵심 진지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문화권력이기 때문이다. 12.19는 종친초 문화권력이 만들어낸 정치 쓰나미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방파제를 건설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2.19는 종친초 문화권력을 박살낼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머지는? 정부는 정부의 일, 새누리당은새누리당의 일, 시민과 지식인은 그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해 가야 한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뚜벅뚜벅 국민통합의 길을 가고, 시민과 지식인은 건강하고 진취적인 주류문화와 공화가치를 확립시켜 가야 한다. 투 트랙(two track)이다. 정부에 의한 국민통합이 시민에 의한 사회통합과 조응할 때에만 종친초 문화권력이 제어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국민통합이 사회통합으로 진화하는 코스이다. 국민통합은 사회통합이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역사적 사명—주류문화와 공화가치가 취약한 상태에서 사회를 돌아가게 만드는 것—을 다하고 점차 소멸해 간다. 주류문화와 공화가치의 성장이 일정 수준에 도달할 때 우리는 비로소 북한 전체주의의 자체 붕괴, 즉 급변사태에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다. 거짓과 선동이 문화와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급변사태는 독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 한반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 운명이 우리에게 주류문화와 공화가치를 성숙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