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대기업의 농업진출 찬반논쟁
찬성) 기업농의 큰 꿈 끝내 버릴 수 없는 이유
김정호 한국경제신문 수석논설위원
일본 동북지방의 미야기현은 ‘쌀의 고장’으로 불린다. 완만한 구릉에 물도 좋아 논농사에는 그만이다. 그런 미야기현이 요즘은 ‘실내농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구로카와군오히라무라라는 마을에 수경재배로 야채를 대량생산하는 이른바 ‘야채공장’이 완공돼 본격 가동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다. 인접한 공장에서 나오는 폐열을 사용하는 첫 시설이다. 환경이 초미의 관심사인 일본 사회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따로 있다. 공장의 운영주체가 일본 최대 제조업체인 도요타자동차라는 점이다.
불매운동으로 동부그룹의 유리온실 사업을 포기하게 만든 한국 농민단체들이야 설마할 것이다. 천하의 도요타가 파프리카 농장주일 줄이야. 그러나 사실이다. 도요타는 이미 곳곳에서 대규모 농장을 운영해온 대농(大農)이다.
일본 제조업체 도요타가 야채농을 하는 이유
파프리카만 해도 그렇다. 이곳은 도요타의 파프리카 제3공장이다. 폐열을 실내농장에 적용하는 첫 시도라는 게 다를 뿐, 이곳에서 북쪽으로 40km 가량 떨어진 쿠리하라시에 1,2공장을 두고 파프리카 생산에 나선 건 이미 2008년의 일이다. 도요타는 이렇게 9ha 면적의 파프리카공장에서 연간 1000t의 파프리카를 생산하고 있다. 일본 소비량의 4%나 되는 물량이다. 도미타테크놀러지라는 농산물생산업체에 이은 2위 파프리카 생산업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파프리카만이 아니다. 도요타는 1999년 아오모리현에 야구장 2개 크기의 유리온실을 지어 화훼사업을 시작했다. 조업 1년만에 흑자를 낸 공장이다. 2006년 이바라키현에서 현지 농가와 함께 시작한 어린싹 채소(baby leaf) 재배는 농사에 도요타생산방식(TPS)을 적용한 대표 사례다. 최적화된 노동방식을 채택하고, 새로운 농기구를 개발해 재배기간을 2주일에서 1주일로 줄였다.도요타만이 아니다. 철강업체 JFE스틸은 양상추를 대량 생산해 전국에 공급한다. 경비회사 세콤은 허브를 시장에 내다판 지 20년이 넘었다. 미쓰이미쓰비시 등 종합상사에서 일본 최대 증권사 노무라에 이르기까지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일본 농업의 사정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감소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후계자들은 줄줄이 경작을 포기한다. 자본력과 기동력으로 농업을 산업화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진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는 이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다.만 일본이 다르게 본 것이 하나 있다. 무역자유화를 거꾸로 농업 업그레이드의 기회로 삼아보자는 구상이다. 일본 역시 무역이 아니면 먹고살기 힘든 구조다. 자유화에 적극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농가 피해가 불가피하다면 기업들이 뛰어들어 농업 비즈니스의 비약적인 발전을 일궈보자는 것이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에 따른 농업의 위기를 안전•안심이라는 일본 특유의 부가가치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게 정부-농민-기업의 공감대다. 농업은 기업의 도움으로 경쟁력을 얻어 수출산업화하고, 기업들은 농업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얻는다. 농업과 제조업의 공존 전략이다.
무역자유화는 농업 수출산업화 계기
일본이라고 농민의 반발이 없겠는가. 기업들이 조심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자급률이 낮은 농산물부터 생산한다. 도요타가 파프리카에 손댄 것도 자급률이 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노하우를 이용해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목표다. 공장 폐열 활용 등이 그런 경우다.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한 농작물을 생산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다행스럽게도 일본 농민들은 기업과의 공생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갈등이 없지는 않겠지만, 농민단체들이 불매운동을 벌여 기업이 농사를 포기했다는 소식은 없다.동부그룹 농화학 계열사인 동부팜한농이 유리온실사업에 나서며 농민들에게 내세웠던 상생전략도 사실 일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동부는 한 발 더 나아가 생산된 토마토를 전량 수출하며, 그것도 수출 농가와 경합이 되지 않는 품종만을 재배하겠다고 약속했던 터다. 국내 농가 수출은 거의가 방울 토마토이지만 동부가 수출하려던 건 주먹 이상 크기의 일반 토마토였다. 국내 농가에서 생산하는 분홍빛 토마토(모모타로)를 피해 업소용으로 쓰이는 유럽계 붉은 토마토(다볼)를 택했던 것이다. 농민단체 주장과는 달리 시장이 확연히 다르다.
우리 농업의 최대 문제, 패배주의와 퍼주기 정책
토마토 세계시장은 70조원에 이른다. 국내 토마토 생산량 중 수출비중은 0.4%에 불과하다. 매년 100만달러(11억원) 이상 토마토를 수출하는 농가는 한 곳도 없다. ‘농업의 세계화’를 이루려면 기업영농이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시장에서 다국적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 동부는 이번 토마토 진출이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도 네덜란드 같은 농업강국이 될 수 있다며 농업인들과 토마토를 공동으로 생산•수출하는 상생모델을 만들어 보려 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때 잃어버린 토종 종자기업 흥농종묘를 15년 만에 몬산토로부터 되찾아온 것도 바로 동부였다. 이런 기업을 비난하고 좌절시키면 앞으로 누가 농업에 투자하려 들 것인가. 우리 농업의 최대 문제는 패배주의와 퍼주기에 있다. 농업은 무조건 보호대상이고, 보조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성역으로 여겨져 왔다. 정치인들은 농민단체가 흔들어대는 표에 무의식적으로 꼬리를 흔들어 대고, 정부는 농업과 농민 얘기만 나오면 습관적으로 꼬리를 내린다. 무상지원에다 세제혜택을 내놓기 바쁘다.논이든 밭이든 농사를 지어도 지원하고, 농사를 포기해도 보조금을 준다. 농사가 풍년이면 수매를 더 늘리라고 도로에 쌀을 뿌리고, 송아지가 헐값이 되면 소값 물어내라는 상경 시위를 벌이면 그만이다. 그 사이 보조금의 대부분은 특권층 농민들이 챙겨간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협정이 체결되면 막대한 피해가 우려된다며 농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보상이 돌아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마찬가지다. 정부조차 한•미 FTA 발효 시 미국 농산물 수입이 연평균 4억2400만달러 늘어나고, 국내 농업생산은 8150억원 감소할 것이라고 했던 바로 그 문제의 농업이다. 하지만 체결 1년이 지난 지금 수입은 감소하고, 수출은 5억6592만달러로 8.7%나 늘었다. 수입 감소 원인을 미국의 가뭄 때문으로 돌리더라도 수출 증가는 대미 시장접근성과 가격경쟁력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얘기다. 무역자유화 과정에서 농업피해보상에 200조원 넘게 들어갔지만 우리 농업은 토마토를 수출산업화하겠다는 기업의 유리온실 문을 가로막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수십 년을 일관했던 퍼주기식 농정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다.
나쁜 쪽으로 작용하는 경제민주화 바람
상황이 이런데도 농림축산식품부는 꿀 먹은 벙어리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민간자본을 유치해 기업농을 육성하고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자더니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는 ‘경제민주화 바람’을 의식했는지 눈만 껌벅거린다. 농업인들과의 상생을 통해 농업강국의 선봉이 되겠다며 출사표를 던진 동부그룹을 그저 골목상권에 뛰어든 프랜차이즈 빵집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농식품부 장관은 “첨단 과학기술과 접목시켜 농업분야의 창조경제를 실현하겠다”고 했다. 아무 데나 창조를 붙여대는 장관들이다. 창조적인 농업이란 게 뭔지나 알고 하는 얘기인지.
일본은 파프리카 수요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국산이다. 도요타가 그 시장에 뛰어들었다. 맹렬한 속도로 생산량을 늘려가고 있다. 도요타는 게다가 막강한 글로벌네트워크를 활용해 수출에도 나선다는 계획이다. 당연히 한국 수출농가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그러면 우리 농민단체는 이미 동부그룹에 그랬듯이 도요타 불매운동에 나서면 될까. 정부는 또 다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이나 껌뻑거릴 일이고. 참 한심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