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3> '또 다른 슈퍼파워' 중국과도 잘 지내는 법
- 한반도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 결코 잊지 말아야
유광종 (중국평론가,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은 여기서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다. 특히 북한과의 문제, 한반도가 종국에 맞이하고 싶은 통일적 상황을 떠올릴 때 중국의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북한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통일까지 꿈꾸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이 같은 영향력을 어떻게 다룰지에 관한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 눈으로 볼 때 충분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이지, 그 점이 석연치 않다. 간판은 공산주의, 체질은 시장경제가 바탕을 이룬 자본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내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가끔 우리의 눈을 혼란으로 이끌어 가기에 충분하다. 그래도 틀 자체는 공산주의이고, 8200만의 당원을 거느린 공산당이 ‘일당전제(一黨專制)’의 견고한 토대를 형성한다. 게다가 60여 년 전 발발한 6.25전쟁 때 막대한 병력의 지원군을 보낸 북한과는 혈맹의 우의까지 쌓은 사이다.
북한을 보는 중국의 시선이 변했다?
그래서 개혁개방의 30여 년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그 본질에 관한 한 서구적 가치관과는 거리가 제법 멀다. 그럼에도 최근 우리의 시선을 끈 사건이 있었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의 민초들이 집단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그리고 집권 공산당은 이를 어느 정도 방치하다시피 했다. 일견 단순해 보이는 이런 시위에는 전체적인 흐름상의 변화가 담겨 있다. 우선 ‘공분(公憤)’이라는 감성 영역이다. 이 ‘공분’은 별다른 게 아니다. 누구나 공감해 동일한 사안을 두고 사회 다중(多衆)의 감정이 뭉쳐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다. 북한이 동북아 평화 구도를 깰 수 있는 핵실험을 강행하자 중국사회는 ‘공분’의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중국 정부와 당, 관련 학자, 그리고 일반인들 모두 그런 분위기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이 과거와는 다른 북한 제재에 나섰다는 소식도 잇따라 들려온다. 개혁개방이 이제 어느덧 중국사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일당전제의 틀은 아직 강고한 게 중국의 특징이다. 따라서 일반인이 먼저 나서서 시위를 벌이는 일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장면이다. 그럼에도 중국 일반인들은 거리에 나서 격렬하게 북한을 성토하는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를 보인 중국 정부 또한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 통과에 동참한 데 이어, 그 관련 조치들을 차분하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
중국이 북한을 혈맹이냐, 아니면 일반 정상국가 간의 관계로 보느냐에 대한 관측과 전망은 엇갈렸다.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벌이는 북한을 두고 중국은 늘 뜨뜻미지근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중국은 북한의 도발이 자국의 번영과 발전을 저해하는 중요한 말썽거리라는 데 공감했지만, 그를 압박할 필요가 있느냐에 관해서는 냉전적 사고의 틀에 갇힌 전략적 이해를 우선시했다. 따라서 중국 관변 학자들을 중심으로 “북한과는 이제 정상적인 국가와 국가의 관계”라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실제 중국 정부가 이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뒤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대북 정책 운용에서 중국이 변하고 있다는 실재의 증거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베이징의 택시 기사가 전하는 중국의 민심
그러나 북한 3차 핵실험 뒤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얘기가 조금 다르다. ‘공분’이라는 감성적 반응이 중국의 일반인에게 매우 폭넓게 자리를 잡고 있으며, 중국 정부와 공산당 내부에서도 그런 경향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머리를 짧게 올려친 20대 후반의 젊은 지도자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권력 정상에 등극한 점, 그리고 수도 평양 외에는 굶주림이 일상적인 풍경으로 자리 잡은 점, 과도한 폐쇄성으로 지구촌과는 정반대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점. 북한이 보이는 이런 행태에 대한 중국인의 시선은 매우 싸늘하다. 베이징에서 택시를 타 본, 중국말 제법 할 줄 아는 한국인들은 대개 같은 느낌을 받는다.
베이징의 택시 기사가 전하는 북한을 향한 야유와 조롱 말이다. 그들은 북한을 ‘이웃의 말썽꾸러기’ 정도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험악하다.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혁명적 광기, 극단적 이념 편향이 부르는 굶주림과 아사(餓死)의 참혹함, 왕조와 다름없는 숨 막힐 듯한 폐쇄성 등 중국인들이 겪었던 현대사의 굴곡은 북한에 대한 경멸로 나타났다가 급기야는 수많은 다중의 공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분위기는 분명히 이렇다. 중국이 변할 조짐을 조금이나마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다. 중국의 문화적 틀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책략(策略)이다. 오랜 전란과 재난을 겪어온 중국인지라 제 몸 상하지 않고 잇속을 잘 챙겨야 한다는 사고가 몸에 배어 있다. 책략이 무엇인가에 관한 장광설은 이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중국을 설득할 ‘창조적 셈법’을 만들어야
핵심의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책략은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을 명확하게 가르는 일이다. 베이징을 다녀온 사람은 천안문 광장에서 뭔가를 느껴올 필요가 있다. 광장의 한 복판에 배열된 인민영웅 기념탑, 그리고 마오쩌둥 시신을 안치한 기념관, 북쪽으로는 천안문 정문에 걸린 마오의 초상화, 그리고 그 뒤로 자금성의 황제 집무 및 거주 공간, 12㎞ 북상하면 닿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등이다. 이게 모두 한 줄에 걸려 있다. 바로 축선(軸線)이다. 옛 왕조 시절에는 황제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었고, 지금의 공산당은 모든 상징을 이곳에 세워놓고 있다.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축선이다. 무형의 축선은 공산당 당헌(黨憲)에 실려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등이다.
전략 마인드가 매우 강한 중국은 이런 축선을 매우 잘 활용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세우고 그를 중심축에 해당하는 강령(綱領)으로 세운다. 모든 전략의 바탕은 합의와 조정을 거쳐 세운 축선과 강령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의 전략적 행보는 결코 중심을 잃지 않는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이해라는 대목이 요긴하다. 중국은 북한을 미국에 대항하는 병장(屛墻)쯤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그 첨병인 미군을 막아주는 병풍과 장벽으로 본다는 얘기다. 아울러 대만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상쇄할 수 있는 유력한 전략 카드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국이 북한을 보는 전략적 시선에서 이 점은 ‘축선’에 해당한다.
중국이 북한의 문제를 다루는 전략적 축선은 이제 흔들릴 기미가 조금 보인다. 앞에서 소개한 중국 사회의 북한에 대한 ‘공분’은 그런 가능성을 예시하는 조그만 예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그 요인은 아무래도 북한이 자행한 3대 세습과 끊임없는 도발, 그로써 자초한 국제적 고립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북한을 상대로 하는 중국 정부의 피로감이 더욱 깊어지면서 ‘이제는 전략의 축선을 다시 설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불러 일으켰을 수 있다. 한국의 중국에 대한 전략적 접근은 중국이 새로 그을 수 있는 ‘축선’에 영향을 미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산출(算出)하는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이해의 ‘셈법’을 바꾸는 작업이다. 아주 어려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사회 전반에 끼이기 시작한 북한에 대한 피로감은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짐이기도 하다.
부단한 접근과 설득, 때로는 춘추전국의 시공을 떠돌던 합종연횡의 세객(說客)도 필요하다.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결코 중국에 손해될 게 없다는 하이테크놀로지를 동원한 ‘창조적 셈법’을 만들어 중국을 설득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 핵심이 두 나라 국가발전의 토대를 이루는 경제적 콘텐트를 담아야 함은 물론이다.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건국 직전 전쟁터를 떠돌다가 찾아간 은자(隱者)가 주승(朱升)이다. 건국의 방략(方略)을 묻는 주원장에게 주승은 “성을 높게 쌓고, 식량을 충분히 모으고, 왕을 천천히 칭하라(高築墻, 廣積糧, 緩稱王)”며 아홉 글자의 구자결(九字訣)을 내놓는다. 실질적인 일에 힘을 쏟으라는 얘기였다. 쓸데없이 겉만 두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우리도 한 번 이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중국을 움직이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지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