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소사이어티

<에세이4> “착하고 아름답게” 결혼시키기

“야무지고 똘똘하게” 대학 보내기

- 두 딸을 앞에 둔 50대 가장의 속마음

장근호 (이비인후과 의사)

이 글의 제목이야말로 지금 내게 가장 간절한 것들이다. 단, 단, 비밀은 잠시 묻어두고…. 나도 가난하고 허전한 사람은 아니고 싶으니까. 소설가 이상이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고 했다던가? “에이 시시하다”라고 하실 분. 그래 맞다. 원래 내가 좀 시시하다. 수신제가도 힘들어하는 족속이다. 수신제가를 건너뛰고 치국평천하하려는, 즉 김칫국은 마시지도 않고 떡부터 먹으려 드는 배포 큰 사람들, 라캉대며 지젝거리길 좋아하는 아감벤스러운 지적인 사람들은 자식 걱정이나 늘어놓으려는 이 좀팽이의 잡글을 건너뛰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나라와 사회의 거대 문제는 개개인들의 시시한 고민의 총합이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가장 흔한 고민들은 교육과 관련된다. 교육의 종착역이 행복이라면 중간 환승역들이 입시, 취업, 결혼이다. 이 글은 환승역에서 딸 둘에게 행복행 열차를 골라 태우려는 50대 아빠의 넋두리이다. 환승역에서 갈팡질팡했거나 앞으로 하실 모든 분들을 태우고 레디 고우!

삶을 건너는 중간역 셋 입시 취업 그리고 결혼

독자들은 기억하시는지? “늑대와 함께 춤을”이란 영화를. 줄거리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인디언식 작명법은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재미 삼아 세 아이들에게 인디언식 이름을 붙여주고 가끔 써먹는다. 딸딸아들 중 딸딸의 인디언식 이름이 이 글의 제목과 같다. 첫딸이 “착하고 아름답게”, 둘째가 “야무지고 똘똘하게”, 물론 희망사항이다. 진짜 별명은 “까칠이”, “날탱구리”다.

인디언명 “착하게 아름답게” 속명 “까칠이” 방년 25세. 올 가을 코스모스 졸업 예정. 나랑 키가 같다. 하이힐을 신으면 부모를 눈 깔고 본다는 말씀. 우리 부부가 결혼한 해에 만든 첫 작품이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태어나더니 자코메티 조각 작품처럼 날씬하고, 석차를 매기는 경쟁에서 곧잘 1등을 하곤 했다. 그러니 까칠할 수밖에. 공부깨나 한 죄로 문과 애들이 선망하는 S대 법대에 지망했다가 고배를 들고 아빠인 나에게 술을 배웠다. 어렵게 문 닫고 영어교육과에 들어가더니 범생이 번데기를 벗고 우화를 해서 나비처럼 훨훨 날고 있다.

의사인 이 아빠가 굳이 진단을 내리자면 꽃 같은 공주병이 아니라 나비 같은 공주병. 활달하게 서클 활동에다 외국인 친구 사귀기, 실연당한 같은 학과 남학생의 술친구하며 인생 상담 해주기 등 활약이 눈부시다. 본업 외에도 세상 일에 호기심이 많아 무규칙 다종(多種) 비공인 무보수 브로커로 통하는 자기 아빠를 닮아 그런다고 엄마는 못마땅해 하지만 나는 흐뭇하기만 하다. 술 때문에 아내로부터 타박을 듣는 나를 위해, 술을 한잔도 못 마시는 인간은 사람으로 뵈지 않아 엄마 하고 너스레 떠는 우리 집 주류파의 부두목이니까.

이 아이가 올해 상반기 우리 집의 우환이었다. 애당초 교직은 답답해서 싫다며 경영학 복수전공할 때부터 조짐이 보였다. 문과 대학생들이 한번쯤 집적거린다는 고시 공부는 염두에도 없었다. 논문을 억지로 짜깁기해서 학위를 받는 대학원 공부도 싫단다. 대학생 인턴으로 금융계통 공기업에 한 달 근무해 보더니 금융 쪽 일도, 공기업도 따분해 보인단다. 어라. 그럼 넌 뭐할래. 회사란다. 자동차 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한 달 근무해 보더니 바로 이거야 하는 판단이 섰다나.

쩔쩔맨 딸아이의 취업난에 절감했던 2013년 불황

하지만 회사 취업이 그렇게 만만한가. 아니나 다를까 줄줄이 사탕처럼 떨어지는 나날이 이어졌다. 서류 전형에서 대부분 추풍낙엽이더니, 간신히 통과하면 면접에서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아내와 나도 대부분의 다른 부모들처럼 고슴도치인지라 이 잘난 녀석을 떨어뜨리는 회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사부장들을 향해 잠시 고슴도치 가시를 찔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즘 취업난이 얼마나 장난 아닌가를 새삼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이는 주눅이 들고 집에만 오면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두문불출.

날 뽑아달라는 자기 소개서를 지긋지긋하게 많이도 썼으리라. 어느 회사에 시험을 치니, 발표는 언제니 따위의 질문은 금기가 되었다. 서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뒤에서 한숨만 쉬는 형국이었다. 그러길 몇 개월. 드디어 최종 합격 소식이 들렸다. 장하다 내 딸. 해냈구나. 어쭈! 한번 합격 맛을 보더니 2주 안에 세 군데 더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행복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오데로 갈까 오데가”란 우스개 노래가사처럼. 여러 지인들의 조언을 참고하여 딸아이가 최종적으로 한 회사를 선택했다. 2주 동안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일하기 시작한지 2주 되었다. 출근길에 종종 바래다주는데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이제 졸업도 하고 취직도 했으니 무슨 걱정이냐고? 천만의 말씀. 산 너머 산이 인생살이다. 결혼, 출산, 육아 등등 굽이굽이 부모 맘은 편할 날이 없다. 연애결혼을 지향하는 딸아이는 부모가 소개하는 사람은 사절이란다. 두고 보자 언제까지 그러나. 속으로 코웃음 치면서도 평생 살 사람인데 제가 직접 고르는 게 순리란 생각에 미친다. 듬직하고 성실한 신랑을 만나 오순도순 사는 모습을 그려 본다.

이 참에 시대착오적인 결혼 풍속 하나 지적하자. 지금까진 내 거였는데 이제 너 줄게 하듯이 신부 아버지가 딸을 사위에게 인계하는 것 말이다. 딸이 무슨 소유품인가? 남녀평등 시대엔 신랑신부가 손을 맞잡고 당당하게 같이 걸어 들어가는 게 옳지 않은가. 부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이걸 바로잡는 운동부터 펼치지 않는지 궁금하다. 우선 나부터 실천해 보려고 한다. 기대하시라.

한없이 느긋한 재수생 딸아이와 함께 하는 부모 마음

인디언명 “야무지고 똘똘하게”, 속명 “날탱구리”, 방년 20세. 둘째는 지금 재수생이다. 돌상 위에 놓은 네 가지 물품 중 돈을 집었을 때 알아봤다. 공부 보다는 행복이구나. 역시 자라면서 놀랍게 높은 행복지수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느긋하고 태평이다. 만사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뿐이다. 음식을 먹을 때면, ‘와, 누가 이렇게 맛있는 걸 개발했지?’. 드라마를 볼라치면, ‘와, 어쩌면 저렇게 재미있을 수 있지?’. 감탄의 연속이다. 단, 공부 빼고. 한마디로 긍정의 화신이자 오락부장이다.

게다가 배짱은 두둑하다. 이번 시험 잘 보면 원하는 거 사줄게 뭐야 말해봐 하고 엄마가 물었다가 오피스텔이란 대답이 나와서 까무러쳤다. 따로 살겠단다. 그 따위 물질적인 미끼로 나를 구속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광고계에서 잘 나가는 어느 형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반전이 대단하다며 수가 높단다. 대학 가면 인턴 시켜줄 테니 보내라 한다. 이런 성격의 최대 단점은 악착같지 않고 근성이 부족하기에 노력을 덜 들이고 날로 먹으려 든다는 점이다. 그래서 붙인 ‘날탱구리’란 애칭으로 부를라치면 눈을 흘긴다. 그러면 나는 ‘몽고, 터키에서 ‘텐그리’는 ‘천신(天神)’이란 좋은 말이라서 중의적으로 쓰는 거야, 넌 긍정의 화신이니까’하고 어물쩍 눙친다.

작년 고3 학기 초부터 슬렁슬렁 공부하면서도 모의고사 성적이 계속 오르는 추세여서 수능 대박이 터질 줄 알았다. 수능시험 당일에도 ‘걱정 마슈, 잘 볼 자신 있어’하면서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헌데 그날 밤 점수를 맞춰보더니 펑펑 우는 게 아닌가. 이틀 동안 힘들어 하다가 사흘 만에 툭툭 털고 선언하길 ‘나 재수할거야’. 주변에서 재수하면서 힘들어하는 자식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우리 부부는 대충 맞춰서 그냥 가라고 종용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아이는 자기 점수로는 턱도 없는 대학들에만 지원하더니 기어코 다 떨어지고 재수의 길을 택했다. 그러고는 다시 얼굴에 화색이 돈다. 재수학원 개강 전까지 신나게 드라마, 영화 등을 다운받아 보는 게 아닌가. 재수하게 되면 부모 눈치 본다는데 전혀 그런 빛이 없다. 아주 당당하게 놀고 먹고 즐긴다. 내년엔 잘 볼 자신 있으니 걱정일랑 쓰레기 소각장에 갖다 버리라는 투다. 오냐. 믿어 보마. 이렇게 하여 지금 재수생 부모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올해 3월 5일, 아이의 생일에 맞춰 선물과 함께 생일축하 카드에 온 가족이 한마디씩 썼다. 나의 글은 ‘연수(連修)야 미안해’로 시작한다.

네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가 작명소에서 받아 온 이름이 두 개였단다. 수연과 연수. 그때 강수연이 질 때고 오연수가 뜰 때였어. 그래서 연수란 이름을 이 아빠가 골랐는데 이름에 재수할 운명이 들어 있었던 게야. 다시 닦는다는 재수(再修)의 의미가, 이어서 닦는다(連修)는 네 이름에 이미 있었던 걸 이제야 깨달았어.(이 부분에서 눈웃음 기호 ^^가 들어간다) 하지만 힘 내! 가운데 이름자에 ‘연’ 자(字)가 들어가는 여자 아이들이 엄청 성공하고 뜬대.(이 부분에서 웃음 기호 ㅋㅋ가 들어간다) 봐! 김연아, 손연재, 장연수.(이 부분에서 사랑 기호 ♥가 들어간다)

카드와 별도로 나는 A4 용지 한 장에 하피첩(霞帔帖)의 한 구절을 붓글씨 펜으로 크게 써서 주었다. 하피첩은 강진에 유배가 있던 정약용이 두 아들에게 주는 경계의 글을 직접 지어 부인의 바래고 낡은 치마폭 조각들에 써주었던 것을 묶은 책이다. 아이는 싱긋 웃더니 생일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고마워! 내일부터는 학원에 8시 말고 6시 반 까지 가서 아침자습도 할 테니 일찍 깨워 주슈!’라고 선언하면서 말이다. 우리 부부는 내심 며칠이나 가겠거니 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를 깨우러 방에 들어갔다. 새근새근 자는 아이를 깨울지 십 분만 더 재울지 망설이다가 눈길이 아이의 책상에 닿았다. 책상 앞 벽에는 하피첩을 써준 종이가 덩그러니 붙어 있었다.

아침에 햇볕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먼저 지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것이 진리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난 때문에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며칠이 아니라 몇 달째 새벽에 일어나 학원에 가고 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만일 이루어진다면 양수리 마현마을 다산 유적지에 가서 여유당 선생님께 저작권료 대신에 소주 한잔 올릴까 한다. 물론 “착하고 아름답게”, “야무지게 똘똘하게”와 함께 소주잔도 기울이면서. 이왕이면 “착하고 아름답게”에 눈 먼 눈썹 하얀(白眉) 머슴아도 있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나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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