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1> 우아하고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꿈꾸며
- 이를 방해하는 한국적인 풍토 몇 가지를 걱정한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 영문학)
8월 말로 35년간 봉직하던 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되어서, 이제부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나에게 간절한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니 조금 모순처럼 느껴진다. 물론, 간절한 것이 곧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다. 무슨 목표를 달성해야겠는데 그 수단으로서 간절한 것이 있다면 구차하고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 목표가 세속적인 것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에 소중함과 의미를 더해 줄 수 있는,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훨훨 날을 듯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도 좋다고 생각한다. 정년을 맞게 되니 마치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설렘이 일고, 그 동안 (65년 중에서 50년은!) 당일치기 인생으로 살아왔으니 이제 좀 여유 있게, 순간을, 내 주변을, 음미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얽매이지 않는 삶, 여유있는 내일을 꿈꾸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문학작품을 하나씩 영역하면서 우선은 라틴어와 중국어를 좀 더 익히고 여분의 시간에는 산책도 하고 그 동안 못 읽은 책도 읽고 못 본 영화도 보고 음악 감상도 하며 우아하게 살려고 한다. 거기에 인터넷의 바다에서 유영(遊泳)하는 취미도 붙이고 요리 실력도 조금 향상된다면 진정 풍요로운 삶이 되지 않겠는가? 원래 형편없이 늦되는 사람이다 보니 생의 황금기가 60대 후반에 온다고 해도 그리 어색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산뜻하고 우아한 전성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방해요인이 생겼다.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의 온갖 비리가 정신적 한가로움을 용납하지 않고 매스컴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활 속으로도 침투한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신문, 방송을 통해 들려오는 이야기는 모두 분노와 근심을 자아내는 사건들뿐이다. 정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하나같이 짜증스럽고 울화통 터지는 것이고, 흉악범죄, 파렴치 범죄의 빈도와 악랄함은 자칫 생에 대한 애착마저도 앗아가려 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학력 있고 돈 있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는 더욱 가증스럽다. 우리 국민은 왜 이토록 어리석을까?
공리주의(Utilitarianism) 철학자 제레미 벤담에 의하면 범죄는 어리석은 자들이 저지르는 것이다. 바보가 아니라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느라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으면 결국 그 사회의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서 피해를 받고 개인이 노력한 바가 결실을 맺지 못하니까 공정게임을 하는 것이 정의사회를 만들어 자신도 편하고 잘되는 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궁극적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민의 도리를 행하는 것을 ‘개명한 이기심’ 또는 ‘현명한 이기심’이라고 명명했다.
내가 처음에 미국 유학을 간 것은 만 22세가 채 안되었던 1970년이었다. 그 때 한국에는 슈퍼마켓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미국에는 재래시장이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면서 만약 한국에 슈퍼마켓이 있다면 계산대에 오르지 않고 새어나가는 물건이 몇 퍼센트가 될까, 생각하면서 미국이 너무 부러웠다. 미국이 부러웠다기보다 슈퍼마켓에서 사소한 절도를 하지 않는 것이 미국 국민 모두의 편리하고 효율적인 소비생활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아는 현명한 국민으로 생각되어 미국민과, 그들의 '개명한 이기심'이 부러웠다.
'현명한 이기심'에서 거리가 먼 우리 국민의 어리석음
그리고 상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하자가 있는 경우는 물론 사고 보니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경우도 환불해 준다던가 관공서나 대기업에서 민원인에게 친절하고 성실하게 대하는 것, 그런 것이 정말 미국이 선진국임을 실감케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입한 물건에서 하자를 발견해도 환불이나 교환을 받을 수 없었고 민원인은 죄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렇게 안심하고,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미국인들은 선진국에서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부러운 것이 전국으로 뻗은 고속도로나 기막힌 마천루 보다는 미국민의 지혜와 선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어찌나 빨랐던지, 우리나라에는 불가능할 것 같던 슈퍼마켓과 선진국형 백화점이 1970년대 후반에 여러 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슈퍼마켓이 좀도둑 때문에 영업이 어렵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국민도 선진국민의 자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감격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슈퍼마켓에서의 도덕이 사회의 타 분야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었다.
‘권력형 비리’는 날마다 신문지면을 도배했고 국민의 권리는 현격히 신장이 되었지만 아직도 민원인은 관공서에서 거지 취급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아직도 이렇게 높은 것은 부패를 저지르는 자들은 사악하고 나머지 국민은 어리석어서이다. 흔히들 선진국 국민도 뇌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받고 무사할 수가 없어서 뇌물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즉, 국민이 뇌물을 먹은 관리가 나라의 행정을 담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뇌물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을 때 다른 나라에서는 ‘도청’ 쯤으로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사임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미국민들은 정직하지 못한 자를 자기나라 대통령으로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닉슨은 결국 사임했다. 후에 닉슨은 회고록에서도 자기가 도청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자기가 대통령으로서 ‘정적(政敵)을 도청하는 것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확립하지 않았던 것이 자기의 과오여서 사임이 옳은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악을 척결하지 않으면 그 악이 우리를 삼킬 수 있다
최근에 겪은 한 황당한 경험이 우리나라에서는 평범한 시민이 부패의 제물이 될 확률이 안 될 확률보다 현저히 높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지난 6월 말, 토요일 아침에 컴퓨터가 부팅이 안 되어서 내 데스크톱의 제조사에 AS를 신청했는데 월요일에나 출장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일요일까지 보내기로 한 원고도 있고 해서 주말에 컴퓨터를 꼭 써야 하기 때문에 제자에게 상의했더니 인터넷에서 컴퓨터 수리업체의 전화번호를 찾아 주어서 그 번호에 전화해서 수리기사가 출장을 나왔다.
기사는 내 컴퓨터가 감염되거나 고장 난 것은 아니고 다만 하드 디스크의 공간이 꽉 차서 작동이 안 되는 것이라면서 꼭 보존해야 할 파일만 자기가 갖고 온 하드디스크에 옮겼다가 다시 옮겨주고 오래된 파일 수 천 개는 다 삭제하고 끝났다면서 수리비 20만원을 요구했다. 처음엔 내 하드디스크가 손상되거나 병이 난 것은 아니라고 하더니 파일들이 다 손상된 것을 자기가 복구해서 수리비가 많이 나오는 것이라며 자기 같은 실력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실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런데 기사가 가고 나서 컴퓨터에서 컴퓨터 초창기에 나던 웅--- 소리가 나더니 작동이 안 되었다. 그 기사에게 연락하니 다른 기사와 같이 와서 본체를 다시 열고 연결 플러그를 뽑아 다르게 연결을 하고서, 드라이브(?)를 자기가 가져온 하드디스크에 연결했다가 내 하드디스크 쪽으로 바꾸지 않고 가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이제 문제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간 후에 보니 보존하기로 한 파일이 2/3는 없어졌고 이상한 현상이 속속 나타나서 하는 수 없이 주말이 지나고 컴퓨터 제조사에 AS를 신청해서 여러 가지를 시정 받았다. 제조사에서 나온 기사는 출장비 2만원을 받아 갔다. 결국 인터넷 업체에서 온 기사는 나의 보존해야 할 파일을 무더기로 없애고 컴퓨터를 망가뜨리다시피 해 놓고 20만원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얼마나 허술하고 어수룩하게 보이면 그런 마구잡이 ‘수리’를 하고 그토록 엄청난 부당요금을 요구할까 생각했는데, 며칠 전에 일간신문에서, 포털에서 검색순위 1위에 올라가기 위해 포털업체에 바쳐야 하는 금액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컴퓨터 수리 기사는 출장을 나가서 수리비를 20만원을 받아서 업체와 반반 나눠야 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그러니 컴퓨터에 능숙하지 않고 컴퓨터도 오래 된 것을 쓰는 노약자 등이 그 동안 얼마나 착취를 당했겠는가. 이런 상황을 국민이 단결해서 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은 영영 포털업체의 ‘밥’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밥에 뿌려서 어린이들에게 주면 좋아한다는 ‘맛가루’를 식용으로는 물론 사료로도 쓸 수 없는 다시마 등을 건조해서 만들었다는 발표가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을 비롯해서 어느 업체도 “우리 제품은 그런 불량재료 쓰지 않았다. 우리 제품은 절대 안전하다”라고 공표하지 않는 것을 보면 모든 제품이 다 고만고만한 모양이다. 불량식품을 제조하는 기업들은 자기 가족은 불량식품을 안 먹게 할 묘책이 있는 것일까? 국민 모두가 불량식품을 피하려고 들이는 신경소모와 비용, 시간, 그리고 불량식품으로 인한 의료비의 몇 십 분의 일이면 국민운동을 벌여서 불량식품을 영원히 몰아내고 안심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악을 척결하지 않으면 악이 우리를 삼킬 것이고 열심히 일한 자에게도 우아한 노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