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류 정치영화의 1000만 관객 돌파를 축하하며
- 영화 '변호인'의 성공을 보는 젊은 시선
이원우 <미래한국 기자>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에서 글을 쓰고 있는 서른 두 살 이원우 기자는 <유니크> <연애의 뒷면> <예쁜 여자>등 3권의 책을 집필했으며 팟캐스트 ‘베스트셀러를 읽는 남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영화, 책, K팝을 비롯한 문화현상을 중심으로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코너인 '이원우의 자유문화론(自由文化論)'은 ‘문화는 문화일 뿐’이라는 말로 재단할 수 없는 문화현상의 이면을 젊은 감각과 애국주의의 시각으로 점검합니다. '이원우의 자유문화론(自由文化論)'은 매월 이슈레터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注>
영화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역대 9번째. 소요 시간은 불과 32일. 속도 면에서는 역대 최단이다. 한 마디로 놀라운 기록이다. ‘변호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록의 대단함을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이며 1000만이 넘는 관객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변호인’을 관람했다. 대단한 건 대단한 거다.
다만, 극장 밖으로 나온 관객들에게 이 영화와 실제 역사의 차이를 설명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작품과 관객, 작품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작업이야말로 문화 비평의 본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국가 한국에 이러한 비평구조가 없다. 고문의 잔인함을 터무니없이 과장한 뒤 ‘노무현 만세’로 치달아버리는 이 영화에 대해 “실제 부림사건의 피의자들은 열혈 공산주의자들이었고, 피의자들이 말한 민주주의는 한국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와 많은 차이가 있으며, 그들에게 가해진 고문에 대해서조차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평론가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고문을 과장한 뒤 노무현 만세’로 치달아버린 이 영화
영화가 좀 왜곡됐더라도 비평하는 사람들이 보완을 해준다면 한 편의 불완전한 영화가 오히려 성숙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변호인’을 보고 분노한 관객들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속절없는 증오심을 표출시킬 때, 그 모습 앞에서 이 영화의 본질적 문제를 지적하는 비평가가 전혀 없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기가 북한인가?
짐작 가는 이유는 있다. 지금 상황에서 평론가들이 ‘변호인’에 반기를 드는 건 단순히 용기를 요구하는 행위에서 그치지 않는 것이다. 평론가로서의 명예와 목숨을 거는, 가히 장성택이 김정은에게 대드는 것에 필적하는 ‘무한도전’인 것이다. 그러니 문화판의 좌편향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노무현을 소재로 하는 영화는 아무리 왜곡‧미화‧찬양을 해도 OK다. 故육영수 여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배우 캐스팅부터가 쉽지 않다. 이 기이한 현실에 대해서 좌편향 말고 무슨 표현을 쓸 수 있을까.
‘변호인’과 현실을 구분하는 작업이 생략되고 나니 일어나는 일은 뻔하다. 스트레스를 풀러 영화관에 갔다가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고 돌아온 관객들은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게 된다. ‘저런 몹쓸 짓을 했던 판검사 놈들이 실제로는 누구였지?’ 이 과정에서 당시 공안검사였던 고영주 변호사, 최병국 前국회의원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입길에 올랐다. 심지어 황 대표는 부림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똑 같은 놈들’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사실에 근거한 허구’라는 사전 설명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변호인’을 연출한 양우석 감독이 최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자. 그는 ‘당시를 겪지 않았던 20-30대는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얼결에 고백해버린 영화감독의 정치적인 속내
“내게 6‧25를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것과 같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고지전’ 등을 보면서 ‘아, 저랬구나’ 하는 것처럼. 지금 젊은이들도 내게 6‧25가 그랬듯이 ‘1980년대는 저랬구나’라고 보면 좋겠다.”
양 감독의 이 한 마디는 중요하다. 스스로 ‘변호인’이 단순한 영화[fiction]가 아니라고 고백한 셈이기 때문이다. ‘변호인’을 비호하는 사람들이여,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뻥치지 말라. 감독조차도 그런 생각 안 한다. 부림사건의 실제 피의자들이 열혈 공산주의자였다는 정황에 대해서는 나도 몇 편의 글을 썼고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국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쓴 ‘변호인’의 안쪽으로 들어가 보자. 양 감독이 저런 얘기를 당당하게 해도 될 정도로 ‘변호인’은 영화적으로 훌륭한가? 리얼리티에 충실했나?
전혀 그렇지 않다. ‘논란의 소지는 있으나 완성도는 높다’는 타협점조차 찾을 수 없는 영화라는 거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조야한 한 편의 역(逆)반공영화다. 북한 사람들 머리에 뿔이 달린 걸로 묘사하고 김일성을 돼지로 그렸던 ‘똘이 장군’의 반대편 버전으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일단 선과 악의 경계가 지나치게 분명하다. ‘변호인’ 속 판사 검사들은 자존심을 태평양 너머로 내다버린 비루한 영혼들로 그려진다. 어디 그런가? 지금도 어려운 사법시험 합격은 1980년대 이전에는 그야말로 바늘구멍이었다. 당시의 판검사들은 각고의 노력을 뚫고 ‘장원급제’의 영광을 경험한, 자존심 하나를 빼면 문자 그대로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조야한 한 편의 역(逆) 반공영화
어찌나 자존심이 센지 얼마 전 나와 인터뷰한 최병국 전 검사는 “이제 와서 진실게임을 할 생각은 없다”며 “영화니까 재미있게 만들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도리어 ‘변호인’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그런 그들을 다락방의 쥐새끼처럼 묘사한 것에서부터 이 영화는 스스로 한 편의 ‘선전영화’이기를 선택한 것이다.
국밥집 아들을 혹사시키는 장면에 대해서도 그 당시를 살았던 ‘고문 경험자’ 및 ‘전직 운동권 선수들’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그 시대가 아무리 어두웠다 한들 세상 물정 모르는 국밥집 아들이 기소까지 되지는 않았다는 거다. 국밥집 아들을 필두로 ‘다른 형’들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할 수 있었겠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회유와 설득을 기반으로 했을 거라는 증언이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였다 한들 아무나 고문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악마인 줄 알았던 경찰과 검찰이 회유를 시도하는 데서 느껴지는 국밥집 아들의 고뇌를 그렸다면 혹시 또 모르겠다. 허나 이 영화는 현실을 고르게 반영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내팽개친 뒤 ‘똘이 장군’ 식으로 80년대를 왜곡해버린다. ‘변호인’을 비호하는 사람들이여, ‘그래도 완성도는 뛰어나다’고 말하지 말라. ‘똘이 장군’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변호인’과 관련해서 인정할 수 있는 점은 딱 한 가지뿐이다. ‘노무현’을 소재로 했다는 거다. 누가 봐도 故 노무현 대통령은 영화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감정기복 심하고 돌발적인 언행을 자주 하는 인물이었다는 건 온 국민이 다 안다. 패기가 넘쳐 “아시아의 최대 안보위협은 미국과 일본”이라고 말했다가 미국 前국방장관에게 ‘crazy’라는 평가조차 들었던 것 아니겠나? (굳이 번역하지는 않겠다.)
그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굳이 부림 사건 같은, 이제 와선 그 현장에 노무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헷갈리는 일을 재조명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부림 뒤에 일어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1982)을 소재로 하면 어땠을까?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판단한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러 동아대학교 학생 1명을 억울하게 숨지게 한 사건. 사실 ‘변호인 노무현’이 유명해졌던 계기도 부림보다는 부미방 때문이었다.
말해보라. 문화원에 불 지른 게 민주화운동인가? 노무현은 왜 이런 사건에 변호인을 자처했을까?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영화는 바로 이런 미묘한 부분에 파고드는 작품이 아닐까? 노무현을 소재로 만들 수 있는 영화는 또 있다. 대통령 재임 시에 한미FTA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 또한 매우 영화적인 한 장면이었다. “반미면 좀 어떠냐”고 말하던 대통령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미FTA를 추진하기까지의 과정. 그 이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바로 이런 미묘한 부분에 파고드는 게 영화적 재미이고, 내러티브 아닐까?
인구 5000만의 나라에서 ‘변호인’이나 ‘7번 방의 선물’ 같은 영화에 관객이 1000만이나 몰린다는 건 결국 극단(極端)에 반응하는 한국 사회의 병폐를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극단적인 왜곡, 극단적인 선악구분이 자유의 가면을 쓰고 과거의 일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고 있다. 비평가들은 동조 혹은 침묵 일색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비겁하고 저열한 풍경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않겠다. 이 나라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굴러간다면 새로운 세대는 ‘변호인’이 관객 1000만을 돌파했다는 역사에서 우스움을 느낄 것이다. 차라리 그들에게 희망을 걸고 싶다. 이제부터라는 얘기다. ‘변호인’ 1000만 관객 돌파를 세계만방에 널리널리 알리자. 2014년의 한국인들이 고작 이런 영화에 열광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아마도 더 이상의 밑바닥은 없을 것이기에, 현재의 영화판이 속상한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힘든 싸움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