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1> 영국 저널리스트가 쓴 제3의 한국론
-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대니얼 튜더 著,
고진석 <독서컨설턴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문학동네 펴냄)은 영문판이 먼저 나왔는데 ‘한국,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라는 제목으로 출간돼 약 2만 권이 팔렸다고 한다. 우리말 책 제목이 ‘기적을 이룬 나라’인데 여기서 기적은 대한민국의 경제성장과 민주화이다. 한국의 발전은 기적이라는 단어가 부족해 보일 정도라고 영국인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렇게 기적을 이룬 나라 국민들에게 기쁨이 없어 보인다고 했을까?
이 책을 쓴 저자는 “한국 맥주 맛없다”는, 한국인들이면 누구나 수긍할(?) 내용의 기사를 쓴 기자로 잘 알려진 대니얼 튜더이다. 2010년부터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한국 사회의 다양한 현안을 다루는 기사를 썼다. 이 책은 한국을 다룬 다른 서양인 저자들의 책 보다 더 생생하고 현장감이 있다. 이유는 저자가 책에서 배운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과 직접 대화를 하면서 썼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만든 나라 한국사회의 빛과 그림자
“박정희만큼 한국 현대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박정희는 너무도 열심히 일하는 한국인 그 자체를 만들어낸 것이다.”(227쪽) 박정희의 ‘하면 된다!’ 정신은 외국인 저자가 보기에도 기적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저자는 서구의 많은 저자들이 도서관에서 본 지식으로 박정희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오류에서 벗어나 보통한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오늘 한국인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박정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개한다.
“박정희와 정주영이 회의할 때면, 박정희는 길고 복잡한 세부 조건을 들어가며 자신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그래, 할 수 있겠어?”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에 대한 정주영의 답변은 항상 “예, 물론 할 수 있습니다”였다. 김동진이 정주영에게 “당신, 각하께서 원하시는 게 뭔지 진짜 이해하긴 한 거요?”라고 물으면 정주영은 늘 이렇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국인들이 전쟁을 겪고도 어떻게 이토록 빨리 국가를 개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이, 바로 저 답변 속에 전부 들어 있다. (43쪽)
하지만 한국인을 부유한 나라로 만든 기적의 힘은 기쁨으로 연결되지 못했을까 라는 의문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기쁨이 없다는 것은 삶의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은 '삶의 만족도' 지수에서 102위를 기록했는데 이것은 카자흐스탄이나 마다가스카르처럼 발전도가 뒤떨어지는 나라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왜 이렇게 한국인들은 만족을 하지 못할까? 이 책의 영문 제목에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적을 이룬 나라라는 긍정적인 뜻과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개인에게 요구하는 불가능을 강요하는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즉 지나친 ‘경쟁’은 한국인을 탁월하게 만들었지만 또한 한국인을 황폐하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주장이다. 한국 경제에는 이 경영자들이 필요하며,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의 경영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 한국 기업의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것이 이러한 사면 복권의 이유로 흔히 거론되곤 한다. 물론 한국 기업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러한 범죄인들이 선고된 형을 모두 살게 해 더 이상 유사한 범죄가 생기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48쪽)
“한국은 민주주의 비용을 과도하게 치르고 있다?”
지나친 경쟁의식은 정치와 기업의 부정부패로 이어진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무원칙한 사면복권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런 비판 대목은 시장경제에 대한 충분한 식견이 없이 다소 표피적 관찰에 머물고 있는 지적이며, ‘정글 자본주의’ 운운 하는 국내 좌파의 견해에서 영향 받은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한 번쯤 경청 못할 것도 아닌데, 저자는 한국의 기적은 위대하지만 부패까지 위대한 것은 아니라고 따끔하게 지적한다.
경쟁 심리는 한국인의 특유의 체면문화와 연관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OECD 회원국 가운데 8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의 자살률과 지나친 교육열과 성형광풍 등은 한국인 특유의 체면문화에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과도한 체면문화는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으로도 쓰인다. 사실을 이야기해도 무례하다는 즉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소송을 하는 한국기업의 사례를 통해 한국에서는 체면 때문에 올바른 사실을 적시했을 때조차도 서양에서는 의미가 사라진 명예훼손 법에 걸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인 적 없었던 보수, 진보인 적 없었던 진보로 나뉜 이 나라에서 합리적인 중도는 설 자리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성숙한 토론 문화를 만드는 대신 표를 얻기 위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선거문화의 결과로 집권한 집권자는 직전 정권과 정책이 극단적으로 뒤집히는 정치를 하게 된다면서 잘못된 한국선거문화는 국민을 지역, 나이, 이념으로 분열 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잘못된 선거문화의 배경에는 지나친 경쟁의식과 체면문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오늘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현실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낙관적이다. 바로 한국인의 유연하고 적극적인 변화의지가 낙관의 근거이다. 한국인들은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유연하게 태도를 바꾸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었고 그것이 지금껏 수많은 문제를 극복해 한국사회의 특질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문제해결 능력의 배경에 무속이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한다.
이젠 만족도 하고 쉴 줄도 아는 한국인 돼야
특정한 계율도, 고정된 의식도, 권위적인 신들 사이의 위계질서도 없는 무속신앙은 한국 특유의 실용주의의 안식처이자 촉진제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저자가 자주 찾아 가던 무당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경험적 견해이다. 무속을 너무 믿지 말라는 조언과 함께 자신의 모든 처방이 맞지는 않을 거라고 인정하며, 매번 백 퍼센트를 맞힌다면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농담을 하는 세련된 한 무당에게서 한국인의 유연성과 합리성의 배경을 본다.
“한국인은 참 대단하죠. 하지만 슬프게도,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는 게 있어요. 한국인들은 만족할 줄을 몰라요. 때로는 쉬기도 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해 샴페인도 음미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이죠.” 이 책에 나온 한국최초 여성우주인 이소연의 말속에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녹아있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대안 없이 이제 좀 즐기고 유연하게 살아도 된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마치 힐링 서적이나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뻔한 말과 비슷하게 느낄 수 도 있다. 정치인 교수 종교인들이 실용적 대안 없이 아름다운(?) 위로를 해주는 이 나라에서 위로를 파는 책은 종이 값이 아까운 쓰레기일 뿐이다. 만약 이 책이 한국의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면서 단지 유연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면 그저 고만고만한 책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런 측면이 아주 없지는 않다. 단 이 책은 한국인들도 성찰 하지 못한 부분을 고민한 저자의 진심으로 인하여 읽어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 되었다. 영국인에게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대안까지 달라는 것은 분명 무리이다. 구체적 대안은 푸른 눈의 영국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 현실에 사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