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데다 기회주의적인 그들을 어찌할까
- ‘종북 토크 콘서트’ 앞에서 싸울 줄 모르는 새누리당
이원우 <미디어펜 기자>
문화(文化)라는 말과 투쟁(鬪爭)이라는 말은 사실 참 안 어울린다. 영화든 음악이든 즐겁게 보고 들으면 될 일인데 그걸 꼭 싸움의 수단으로 삼아야만 할 것이냐의 문제. 그런데 문화콘텐츠를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삼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게 사안의 핵심이다.
얼마 전 부지영 감독의 영화 ‘카트’를 봤지만, 이건 뭐 필설로 다 표현하기 벅찬 정치편향의 참상이 스크린에 펼쳐져 있었다. 대중들이 이런 영화를 좋아할까? 아닐 것 같았다. 평일이라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 빈자리가 많았다. 그나마 몇몇은 중간에 나갔다. 개봉 열흘을 지나고 있는 현재 ‘카트’의 누적 관객 수는 약 62만 명. 제작사 측에서 발표한 손익 분기점이 170만 명임을 감안하면 전망은 밝지 못하다.
‘다이빙벨’과 ‘카트’의 연이은 실패는 좌편향 영화들의 밝지 못한 미래를 암시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사실 이 작품들은 숱하게 많은 사례들의 일부일 뿐이다. 어떻게든 이 나라의 과거를, 현재를, 역사를, 풍요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연상하게 될 정도다.
대학생 시절 들었던 교양수업에서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현대영화의 3요소로 도상학(iconography),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과 함께 막시즘(Marxism)을 꼽았다. 영화는, 아니 나아가 문화상품은 으레 좌익적 사고방식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저건 좀 너무 심하지 않니?”
“근데 영화는 좀 ‘저런 식’이어야 재미있긴 한 것 같아.”
이와 같은 논리구조가 용인 받는 가운데 ‘변호인’은, ‘다이빙벨’은, ‘카트’는 정의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편향성을 편리하게 숨길 수 있게 되었다.

포퓰리즘에 ‘맞서지 않는’ 새누리당
사태가 짓궂게 된 것은 이와 같은 ‘관용’이 일종의 이중잣대를 파생시켰다는 점이다. 뭐가 됐든 똑같은 잘못을 해도 좌파가 하면 용서를 받지만 우파가 하면 용서를 못 받는 ‘문화’가 형성돼 버렸다. 민주당 의원 A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부인이 아닌 여성에게 “여보 사랑해”라는 문자를 보내다 발각됐지만 별다른 파문 없이 원내대변인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새누리당 의원 B는 ‘누드사진’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는 이유만으로 윤리특별위원회에서 사퇴하고 전국적인 망신을 당했다.
당파에 따라 이렇게나 대접이 다른데도 대한민국에 중도(中道)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건 신기한 현상이다. 의식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표현하면서 현인 행세를 한다. 사실은 이 중도라는 표현이야말로 가장 당파적인 표현이다. 좌와 우의 경계를 두루 살피고 극도로 정치적•지능적인 한 수를 둠으로써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겠다는 영악함이 중도(中道)라는 두 글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중도들의 특징은 새로운 주장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은 중도주의자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기득권’이 아닐까? 이제 정치 얘기를 시작해 보자. 2014년의 비극은 대한민국 제1의 보수정당으로 알려진 새누리당이 바로 이 중도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2012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이 바뀌었을 때, 달라진 것은 비단 정당의 이름과 이미지 컬러만은 아니었다. 강령에서 ‘포퓰리즘에 맞서’라는 표현이 삭제된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새로 완성된 새누리당의 강령은 뭔가에 ‘맞서는’ 행위 자체를 일체 포기한 초식남의 글짓기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태평성대여 영원하라 얄리얄리 얄라셩’ 같은, 지금이 일촉즉발의 남북 대치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교양 있는’ 단어들의 집합이다. 이 강령으로 대선을 이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지만, 정치에선 본인의 역량만큼이나 중요한 게 라이벌의 역량이다. 새누리당이 대한민국 제1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새정치민주연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능하다는 이유 밖에는 없다.
우파 인사가 ‘역사콘서트’를 했어도 이렇게 조용했을까
지난 11월19일. ‘신은미 & 황선 토크문화콘서트’가 서울 종로구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렸다(공연장소와 공연 타이틀에 ‘문화’라는 낱말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시길 바란다). 현장에서 오간 주요 발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한국 언론들이 (북한 정권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 회부, 막 이런 이야기를 하며 떠들썩한데 중요한 건 실제 거기 주민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
“진짜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북한 상황은 참 다행이라고 여길 것.”
“북한 사람들은 젊은 지도자(김정은)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고 희망이 넘치는 게 보였다.”
이날 행사에는 새민련의 임수경 의원도 깜짝 출연해 ‘방북의 추억담’을 풀어놓았다고 한다. 제정신으론 듣기 힘든 이 망발의 향연도 ‘문화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문화수준은 올라가(?) 버렸다.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는 새누리당의 반응, 아니 무반응이다. 새누리당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충격적인 ‘문화콘서트’에 대해 어떤 성명도 내놓지 않았다. 문창극의 과거 발언을 멋대로 날조해서 공론화시켰던 6월11일 KBS 보도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이 곧바로 성명을 내며 박근혜 대통령의 ‘결심’을 종용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공연에 현역 의원이 출연했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이 너그러움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편 검찰과 경찰은 이 문화콘서트의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여부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나름대로의 결론이 나오겠지만 그 무렵이 되면 이 뉴스는 이미 대중들의 뇌리에서는 잊히고 없을 것이다. 애초에 집권여당조차 관심을 갖지 않았던 뉴스를 대중들이 애써 기억해 줄 리 만무하다.
분위기가 이렇게 형성되면 설령 저 공연에 국보법 상 문제가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와도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된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공안당국의 소수파 탄압’ 프레임이 완성되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극우’ 성향의 몇몇 언론이 툴툴거린 걸 제외하면 국민적 반발이 있었던 것도 아닌 공연을 당국이 탄압하는 모양새가 돼버릴 것이다. ‘공연도 마음대로 못 하냐’며 울상을 짓는 김제동의 얼굴과 조국의 트위터가 벌써부터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지금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새누리당으로서는 그때 가서 상황이 아무리 심각해져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수준 낮아진 언론 뒤에는 ‘수준 낮아진 정당’ 있다
얼마 전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장 김종석 교수를 인터뷰 했다. ‘규제개혁’을 주제로 한 인터뷰였지만 자주 뵙기 힘든 분이라 이것저것 다양하게 캐물어 봤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결론은 언론’인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종석 교수의 말.
“그래서 중요해지는 게 언론의 역할입니다. 사실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정답이긴 하지만 해답은 못 될 때가 많아요. 맞는 말이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되기 힘들더라는 거죠.
우리가 미국 얘길 많이 하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도 ‘바보’ 많거든요. (웃음) 관건은 그 사회의 여론 형성이 집단지성을 갖추고 있느냐의 여부예요. 이 작업의 핵심은 결국 언론과 미디어가 담당할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최근 몇몇 사태에서 봤듯이 괴담이 판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세월호 정국에서 모 종편은 다이빙벨이 해답이라고 떠들다 허위임이 드러나기도 했고요. 이런 수준의 언론이라면 우리보다 훨씬 못 사는 아프리카나 남미보다 결코 우월하다고 보기 힘들죠. 팩트와 루머를 구분할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집단지성이 건전한 언론을 통해 구현돼야 해요. 5천만 명의 공감대는 결국 언론이 만들어 나가는 겁니다.” (미래한국 인터뷰 中)
대한민국 정치의 비극은 이처럼 수준 낮아진 언론의 논조를 정치인들이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막대한 세금으로 집행된 세비를 받고 있으면서도 뉴스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조간신문의 사설을 읊조리는 것으로 본분을 다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런 정치인들의 행보를 언론은 다시 보도하고, 결국 어제보다 수준 낮아진 오늘의 상대방을 충실히 묘사하면서 하향평준화의 탄탄대로가 이어진다. 나약한 정치인들 개개인의 인격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각각이 저마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간 능력자들 아닌가. 작금의 비극은 그들이 ‘새누리당’이라는 무기력한 집단 안에서 이도저도 아닌 형태로 결합해 있다는 데에서 파생될 뿐이다. 예비군복만 입으면 멀쩡한 사회인도 나태해지는 것처럼, 뛰어난 개개인도 새누리당이라는 집단 안에 속해 있으면 무기력의 자장 안에 휩쓸려 버리는 모양새다.
이런 상태로 새누리(new world)가 열릴 턱이 없다. 선거가 없는 2015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은 어떻게 해야 새누리당이 무능과 무의미의 질곡을 깨고 ‘창조적 파괴’를 시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좌익적 문화 콘텐츠들에 대한 비판보다 더 시급한 ‘문화투쟁’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