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각적 독립을 외치던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윤치호는 '친일파'로 비쳤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조선민족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데 동의하는 한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관용하자"고 말했다. 선입견과 '후손들의 오만함'을 버리고, 윤치호의 생애와 사고를 따라가 보면 저항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복잡성과 중층성을 알게 된다...”
윤치호의 협력일기: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서울대 교수)
윤치호(1865-1945)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기를 겪으면서 지도자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최초의 미국유학생 가운데 한 명으로, 귀국하여 독립협회에 참여했고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최초의 근대 신문인 〈독립신문〉을 맡아 발행하였다. 윤치호는 합방 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3년간 수형생활을 한 후에는 교육과 계몽운동에 치중했다. 불행히도 태평양전쟁 기에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종용했고 그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파로 비난받아왔다. 흥미롭게도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그 대부분을 영어로 썼다.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따라서 그의 일기는 솔직한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나는 지난 20년간 제국주의를 연구해왔는데 특히 제국 지배자에 협력한 현지 지식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다. 비록 강력한 기술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제국주의 세력은 원주민들보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열세를 보였기에 식민지의 획득과 운영과정에서 현지인들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협력자들 가운데에는 개인적 이기심으로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도 있지만, 일부는 조국의 근대화를 염원한 민족주의자였다. 서양 제국주의가 제시한 '근대성'이라는 강력한 이념적 무기는 주변부 지식인들에게 마력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따라서 협력자들을 무조건 일신상의 영달만을 위해 조국을 배반한 자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친일파'도 협력자의 하나의 유형이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친일파라는 단어가 행사하는 대단한 영향력에 비해 막상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상태이다. 친일파에 대한 비난은 정파적 이념을 막론하고 발견되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역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은 "일제시대의 친일파가 해방 후에도 청산되지 않은 채 이번에는 친미파가 되어 기득권을 유지하고 나라의 기강을 흔들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인식에 근거해 노무현 정부 때 역사 바로 잡기라는 명분의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제하 일정 관직을 역임한 자들을 획일적으로 친일파로 규정하는 등 너무나 피상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우선 협력자들의 '복합적 동기'를 규명해야 한다. 인간의 행위에는 여러 동기가 중층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인데 그중 하나만을 내세워 독단하는 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둘째 협력자들이 친일행위를 하게 된 구조를 살피고 그런 구조를 제공한 사람들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한다. 즉 망국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애초에 망국과 일제의 지배라는 구조를 제공한 사람들은 고종과 그를 둘러싼 위정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졸지에 일제 지배하에 살게 되고 적응해야 했던 일반인들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
윤치호의 일기를 본격적으로 분석하기에 앞서 이 책의 1, 2장은 최근 서양 사회와 학계에서 진행되어온 협력자에 대한 재평가를 살펴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우리 국민이 알고 있는 바와 달리 프랑스에서는 1970년대부터 나치 점령기를 재평가하는 '되돌아보기' 사조가 일어났는데, 그 결과 협력행위가 일부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있었으며 협력에는 적극적 협력으로부터 수동적 적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대를 살았던 시몬 베유는 그 시대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몇몇은 잘 행동했고 몇몇은 나쁘게 행동했으며 다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고 말했다.
제3장은 윤치호의 사상을 개괄한다.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김옥균과의 친분 때문에 정변 직후 상해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던 그는 그들의 주선으로 미국 에모리와 밴더빌트대학에서 공부하게 된다. 거기서 윤치호는 당시 서양의 주된 사조인 자유주의사상과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였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을 믿고 혁명적 단절이 아니라 역사의 점진적 개선을 지향하는 이념이다. 윤치호는 중용의 가치를 믿었는데 유길준에게 "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양면을 너무 잘 보니까"라고 토로했다. 윤치호는 또한 사회적 다윈주의의 영향 하에 '적자생존'이 인류사회에도 적용되며 인간은 투쟁을 통해서만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제4장은 윤치호가 조선과 일본, 양자에 대해 가졌던 비판점들을 살펴본다. 그는 조선이 일본과 같이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원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의 결점으로 자신의 이익과 분파적 이익을 희생하여 전체를 생각하는 공덕심이 부족한 점, 공통된 대의를 위해 통합하지 못하는 점 등을 지적한다. 한편 윤치호는 일본인들의 에너지와 효율성에 감탄하면서도 그들의 강압적이고 포악한 성정을 비판한다. 그에게 일본인들은 '꽃과 칼을 동시에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특히 윤치호는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을 강하게 비난하였다.
윤치호의 일생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이 태평양전쟁 기 일제에 대한 협력행위인데 제5장은 이 문제를 다룬다. 그가 일제의 팽창에 동조한 이유는 우선 조선인들이 만주에서 얻을 기회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가 500년 동안 문(文)을 숭상하면서 말살해버린 상무(尙武)정신을 배우고 터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일단 조선의 청년들이 그 정신을 배우고 나면 언젠가 조국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윤치호만이 아니라 최남선, 여운형 등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 중국,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윤치호는 당대의 그 누구보다도 세계 역사의 전개를 알았고 국제정치의 복잡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국가란 국민 개개인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포악한 동족의 정부보다 관대한 이민족의 통치가 더 낫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했다. 고종 통치 기의 극도의 실정을 지켜본 윤치호에게 일본은 절대적 악한이 아니었고 조선은 죄 없는 희생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의 대중이 아직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교육과 계몽에 헌신했다. '배우고 또 배워라'가 윤치호의 좌우명이었고 그는 사재를 털어 많은 젊은이들의 교육을 도왔다. 실력을 기르면서 국제정치적 기회를 엿보다보면 언젠가 조선 독립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즉각적 독립을 외치던 민족주의 지도자들에게 윤치호는 '친일파'로 비쳤는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고 "조선민족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데 동의하는 한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관용하자"고 말했다. 선입견과 '후손들의 오만함'을 버리고 윤치호의 생애와 사고를 따라가 보면 저항과 협력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복잡성과 중층성을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