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최선의 정치공동체인가
- 최상용 지음, 『중용의 정치사상』, 까치, 2012
조주현 서울대 강사<정치철학>
1970년대 롤즈(J. Rawls)의 등장 이후 서구의 정치철학계는 정의론과 자유주의 및 공동체주의 논쟁에 관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세기적 논쟁은 자유주의의 판정승으로 끝나는 듯 했으나, 자유주의 또한 완벽한 정치사상이라기보다는 어차피 부분적 진리(half-truth) 아니겠는가. 실제 사회의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유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 보인다. 거미줄처럼 얽힌 시장의 체계 안에서 파편화된 개인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탄 지 오래다.
정(情)과 도덕성을 상실한 채 자유를 갈망하면서 몸부림쳐보지만 그럴수록 편안함과 쾌락의 덫으로 더욱 갇혀질 뿐이다. 1990년대 이후 공화주의(republicanism)와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대한 연구와 논문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는 이유도 2% 부족한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하는 시도임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인생이라는 게임의 법칙은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줄타기, 즉 중용의 예술인 것이다.
격랑의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 초반 현재 한국은 기로에 서있다. 선진국의 문턱 앞에서 시민들은, 아니 대한민국에 사는 개인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30세의 김정은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가 하면, 경기침체와 양극화라는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는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기성 정치권은 파당적 권력욕에 정신 없고, 우리 사회는 어느덧 불만으로 가득 차 ‘앵그리 소사이어티’가 되어가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 공민(公民)은 존재하는가. 이런 전환기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과거의 메아리는 항상 광명을 준다.
공화주의의 역사적 원형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다. 로마인들은 스토아 철학의 엄격한 도덕성을 계승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 이익인가(Cui bono)?”를 묻곤 했다. 항산(恒産)과 항심(恒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정치의 본질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심의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형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민주정이다. 그 당시 시민들은 교대로 통치하고 통치받으면서 설득의 리더쉽과 팔로우쉽을 정치의 본질로 삼았다. 오늘날 에이미 굿만(Amy Gutmann)이 대의민주주의의 정치적 무관심과 직접민주주의의 과잉참여 사이에서 심의민주주의, 즉 중간민주주의(middle democracy)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이유도 중도(中道)의 정치철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최상용 교수가 반세기의 정치사상 연구를 결산하면서 주목한 가치도 바로 중용(中庸)이다. 무엇이 최선의 정치공동체, 즉 최선의 정치체제인가. 이러한 정치철학적 문제 제기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정치란 정의(正義)의 실현이며, 정의는 곧 중용이”라는 것이다. 왜 하필 중용인가. 저자는 예컨대 “보수의 자기개혁(self-reform)과 진보의 탈급진화(deradicalization)”와 같은 정치적 상상력이 현재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고 본다. 이른바 수구나 권위주의와 같은 보수나, 종북이나 반시장주의와 같은 진보의 양 극단을 피하는 중용적 구상력이 현재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대통령이나 직전 대통령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위기의 한국 사회를 극복하고 전환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열쇠로 저자가 강조하는 중용의 덕목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저자는 중용이 동서고금의 보편적 가치였음을 밝히기 위해 고대 중국의 공자와 맹자,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현대의 롤즈와 우리나라의 다산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천착한다.
우리나라 법무부의 영어 표기는 왜 ‘Ministry of Justice’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이상국가(kallipolis)에서 최상의 것으로 추구했던 정의로부터 한 발 물러나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차선의 개념으로 법률을 제시한다. 즉 플라톤에게 정의는 절제요 중용이며, 그 절제와 중용의 제도화가 법인 것이다. 역시 직접성(immediacy)과 초연함(detachment)을 두루 갖춘 최고의 정치철학자다운 중용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법이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을 제도화한 것이다. 우리가 설득의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수결의 원리에 승복해야만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중용의 정치사상』 책 제목부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대중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는 저자도 인정하듯이 오히려 학술서에 가깝다. 저자가 동양의 중용 사상을 이해할 때 핵심 개념으로 제시하는 시중(時中)이라는 단어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워질 뿐이다. 어쩌면 개념 자체는 이해하기 쉽다. 중용은 단순히 산술적인 평균이나 어중간(於中間)한 것이 아니다. 상가(喪家)집에 가서는 슬퍼하고, 잔치집에 가서는 기뻐하는 것이 중용이다.
전쟁에서 봄에 출병하지 않는 것이 시중이다. 일년 농사를 그르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때와 상황에 맞게 적절한 판단과 결정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여기에 중용의 묘미가 있으며 달성의 어려움 또한 상존한다. 그래서 뛰어난 정치가조차 중용의 덕목은 도달하기가 어렵다. 중용은 양극단을 피하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양극단은 배제의 대상인가, 포용의 대상인가. 또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천재도 필요한데, 중용의 철학에서 천재가 배출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 책을 읽으면서 또는 읽고 난 후, 또 다른 화두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