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⑤과도한 이념분쟁

조우석 문화평론가, <나는 보수다>의 저자

[싣는 순서]

①들어가는 말
②지식인의 리버럴 강박증
                                         ③반기업 심리와 富에 대한 적개심
                                         ④역사 허무주의의 태도
                                         ⑤과도한 이념분쟁
                                         ⑥우리안의 근본주의 DNA

  얼마 전 유명 여성탤런트 한 명과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했다. 우아함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녀와의 만남에서 필자는 쇼크 두 개를 받았는데, 하나는 기분 좋은 쪽이다. 뜻밖에도 대화 초반에 그가 이렇게 밝혔다. “제가 철학교수 안병욱 선생님의 오랜 팬이예요. 모르셨죠? 20대 시절 그 분의 책 <인생론>을 읽었거든요. 입지(立志)하면 양지(養志)하고, 양지한 뒤에 성지(成志)하라는 구절까지 또렷하게 기억해요.” 뜻을 세웠다면, 잘 키워야 하고 끝내 이뤄야 한다는 뜻일텐데, 간만에 들어본 철학적 금언이었다.
  괜한 말이 아니었다. 자리를 옮겨 와인을 곁들인 식사에서 다시 그 얘기가 나왔다. “그 어른 아직 살아계시죠? 신문 볼 때마다 그 분 부음기사를 챙겨보는 습관이 있다니까요. 빈소라도 찾아뵙는 게 도리이겠죠.” 좋은 연기자로 활동하는 배경에는 그런 교양이 깔려 있었구나 싶었는데, 옆의 매니저가 나섰다. “그 말을 저는 하도 들어서 죄다 외운다니까요?” 라며 스마트폰으로 즉석 검색을 했다. 안병욱 교수, 1920년생. 아직 살아 계시다. 이후 화제는 아이 키우는 문제, 사회문제로 이어졌는데, 이때 필자가 다시 쇼크 받았다. 표정이 어두워졌던 그가 한숨을 쉬듯 토해낸 혼잣말 때문이다.
  “이래서 대한민국은 셔터를 닫아야 한다니까요….” 낮은 목소리, 그러나 내 귀에 쏙 들어왔다. 화제가 무거워질까봐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지금도 귓전에 맴도는 그 말의 속뜻은 무엇이었을까? 마주 보고 대화한 사람으로 느낌이라는 게 있다. 아마도 그말은 지난 반세기 부자나라로 큰 대한민국이지만, 토대가 부실하며 연일 어지러운 사회 행태는 차라리 문 닫는 게 좋을 정도라는 냉소 혹은 반어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혼잣말에 적지 않은 이들이 공감을 하지 않을까? 지난 10여 년 새 우리는 정말 변했다. 사람들 심성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이젠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 말을 섞지도 않는다. 
  컴퓨터와 SNS로 이뤄진 ‘디지털 감옥’을 더욱 높게 지었으며, 합리적 이성 따위는 팽겨친 지 오래다. TV 드라마와 예능프로는 무식하고 뻔뻔하다는 게 개성인양 취급된다. 문화의 하향 평준화, 하수도화 현상인데, 그렇다면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막말 소동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게 야권 표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는 큰 관심이 아니다. 수두룩한 ‘김용민 무리’가 걱정일 뿐이다.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과 그 주변 젊은이 상당수가 잠재적 김용민이다. 또 있다. 대권 후보라는 안철수가 벌였던 앵그리 버드(Angry bird, 화난 새) 해프닝도 그렇다.
  총선 직전 인터넷에 그는 '화난 새' 소품을 들고 나와 “나쁜 돼지(기성권력)에 화나셨어요? 그럼 투표하세요!” 라고 독려 아닌 독려를 했다. 내 눈에는 졸렬하다. 그리고 무책임하다. “20대여! 나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바리케이트 치고 돌덩이를 들어라.” 고 선동했던 우석훈과 뭐가 다른가? 이런 선동과 충동질을 반복하는 지도층 인사가 숱한 사회가 멀쩡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셔터를 닫아야 한다.” 는 여성 탤런트의 혼잣말이 쉬 잊혀지지 않는 건 그런 배경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자기 파괴적 정서, 방향 잃은 분노가 문제인데, 그걸 좌파라고 너무 쉽게 딱지 붙이지 말자는 제안이 이 글의 핵심 메시지다.
  정확하게는 ‘좌파정서’로 분류해야 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김용민 우석훈 안철수 등이 품고 있는 삐뚜룸한 심리, 정의인양 포장된 그럴싸한 반(反)기업주의, 기성체제와 현대사에 대한 부정(否定)심리를 총칭하는 집단 심리가 바로 좌파 정서다. 그거 실로 간단치 않다. 어떻게 해서 그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터져 나갈 출구를 찾아 좌충우돌하는 그 부정적 에너지를 다스리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할까를 지혜도 함께 짜내야한다. 총선 때에는 김용민 때문에 야권이 역효과를 봤다지만, 좌파정서는 연말 대선에서도 모양을 바꿔 다시 등장할 게 분명하다.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실 것이다. 좌파 정서와 좌파는 뭐가 같고 뭐가 다른가? 좌파를 정치적 신념으로 하는 부류는 분명 존재하며 사회적 실체가 엄연히 있다. 반(反)자본주의와 민족 해방이라는 19세기 도그마에 매달리는 그룹이 존재한다. 1980년대 이후 대학 운동권도 그쪽이었고, 전교조 일부는 물론 지금은 386세대 일부 좌파는 여의도 의회 권력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엄연히 원내 제3당인 진보당 내부는 북한과 관련해 편향성을 가진 이들까지 일부 있다. 종북이네, NL(민족해방)네 하는 노선투쟁 소식도 우리는 수시로 듣고 본다.
  좋게 보면 사회 다원화를 반영하는 움직임이겠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물론 도착(倒錯)에 가까운 도그마인지라 조만간 사그러들 것으로 기대하지만, 정말 큰 걱정은 대중사회이다. 저토록 넓고 깊게 퍼져있는 부정적 집단 심리인 좌파 정서를 과연 어떻게 처방할 것인가? 그게 문제이다. 배와 배꼽의 관계인 좌파와 좌파 정서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좌파 정서란 리버럴 강박증을 가진 지식인그룹이 널리 대중화된 모습이다. 대신 정보가 파편화(일부만 취사선택하니까)되고, 행태는 주변부화(음습한 반사회적 정서)됐다.
  그게 사회 각 부문과 젊은 세대를 물들이고 있는 부정적 정서가 분명하다. 굿 소사이어티, 즉 좋은 사회란 사회적 자본이 풍부하고, 시민적 토대가 견고한 사회이다. 그러나 현상적으로는 먹물입네 하는 이들일 수록, 젊은 층일수록 괜히 핏대질하고 기성 체제를 부정하려 들고, 아우성을 친다. 많은 이들은 난민촌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퇴행과 시대착오의 혼돈 앞에서 팔짱을 낀 채로 무책임하게 관망만 하고 있다. 그 여성 탤런트의 혼잣말에 담긴 의중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혹시 그 말에는 어떻게 문을 연 대한민국인데, 셔터를 어이없이 내릴 수 없다는 강한 확신과 새 출발의 다짐 같은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