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우리는 어떤 리더십을 원하나?' 2012년 말의 선택 대통령 지도자론 <중>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훌륭한 리더십은 두 가지 다른 맥락 속에서 다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하나는 문제와 위기를 돌파하여 업적을 만들어내는 리더십이다. 문제 해결형이라고 말해도 되겠다. 이 경우 대개는 문제가 무엇이고, 위기가 무엇인지 분명하다. 문제의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많은 경우 국내외 전문가 집단의 자문과 의견 수렴에 기대어 지혜를 동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때 최고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문가 집단의 지혜를 포함한 민의와 국력을 결집하여 문제를 돌파하는 추진력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당장의 민의와 장기적인 국민의 공공선(公共善) 사이에 개념적 긴장은 별로 없을 터이다.

  리더십의 다른 하나는 당장의 민의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장기적인 공공선인지 불분명할 때다. 이런 경우는 대개 언론을 통해 표현되는 국민 일반의 문제의식이 크게 분열되어 있기 쉽다. 이때 훌륭한 정치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장기적 국가이익에 초점을 둔 비전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민의를 결집해내는 호소력 있는 설득의 정치력이다. 돌이켜 보면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등장한 역대 정권들은 저마다 당장 돌파해야 할 가시적인 숙제 또는 위기를 안고 출범했다. 노태우 정부는 제도적 민주화, 김영삼 정부는 군사독재 잔재 청산, 김대중 정부는 금융위기가 그러했다.

  당장의 위기 앞에서 민의의 결집은 상대적으로 용이했으며, 저마다 시급한 숙제는 대체로 잘 풀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어도 단순화해 말하면, 노무현 정부에겐 상대적으로 당장의 숙제가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국가적 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 민의가 특히 분열된 상황에서 출범했다. 당장의 국가적 과제보다는 이념화된 정치 논쟁이 정부 내내 효과적인 리더십 발휘의 발목을 잡았다. 이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최고 정치 리더 자신이 가장 시급한 국가적 과제를 보편적 호소력 있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향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민의와 국력을 결집할 수 있는 설득의 정치력이 결정적이었다. 필자의 개인적 소견으로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민의를 결집할 수 있는 이슈와 비전을 개발하기보다는 예컨대 수도 이전과 같이 민의와 국력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큰 이슈들을 끝까지 고집했던 데에서 많이 기인했다고 본다. 이와는 또 달리, 이명박 정부는 미국 발 금융위기가 우리에게도 안겨준 당장의 위기 해결을 시급한 숙제로 안고 출범했다. 해결방향을 놓고 논란과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경제위기는 상대적으로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당장의 시급한 과제를 안고 출발한 정부들의 경우에도 일단 그 숙제 해결을 일단락 짓고 난 정권 후반기에는 앞서 지적한 리더십의 두 번째 맥락이라는 시험대에 걸려들게 된다. 나라와 사회를 한 단계 더 전진시키기 위해 도전해야 할 장기적인 핵심 과제에 관한 비전을 중심으로 민의와 국력을 결집시킬 호소력 있는 정치력을 더욱 발휘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지점에서 지리멸렬하고 마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다.

  호소력 있는 비전과 민의 결집을 위한 효과적인 정치리더십을 발휘하기는커녕, 국민과 국가 전체의 미래에게는 어느 때 못지않게 소중한 시간들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최측근과 친인척에 의한 권력형 비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5년 단임제의 레임덕 현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우리나라 대통령 리더십의 중요한 측면을 말해준다. 당장의 숙제를 무난하게 해결하고 난 뒤에는 정권 핵심부는 일면 자만에 빠지고, 일면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비전도 부족하고, 엄격한 자기통제의 윤리의식조차 실종상태에 빠져든다.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빚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역동하는 정치의 중심에 선 대통령의 리더십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첫째는 우리 정치에서 최고 정치 지도자가 성장하는 과정에 관한 바람이다. 이에 관해 핵심적인 것은 역시 민주적인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건전한 정당정치와 함께 성숙해가는 정치 리더가 대통령으로 성장하는 풍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장기적인 숙제임에 틀림없다. 경선이 도입되고 있다고는 하나, 많은 부분 여전히 권위주의적 정당 정치 구조가 엄존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한 이합집산이 일상화된 조건이다.

  비전과 정책의 민주적 경쟁을 촉진하는 정당정치의 틀 속에서 최고 정치 지도자가 훈련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이 참으로 아쉽다. 특정 인물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당구조가 아니면 종잡기 어려운 이합집산의 틈바구니에서 정치공학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대통령과 그 리더십은 체계적이면서도 민주적으로 소통하는 정당정치의 도움도 견제도 모두 결여하게 된다. 그만큼 집권과 함께 브레이크 없는 질주가 시작된다. 그러다 마침내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집권 후반기가 되면 또 다시 새로운 이합집산의 정치공학에 휩싸인다.

  나라의 정치와 외교에 진중한 백년대계를 기대하기는 어차피 어렵게 되고 만다. 정당과 대통령이 유기적 연관과 함께 건강한 긴장 속에서 함께 갈 수 있는 질서를 구축하고, 그러한 노력의 과정을 통해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풍토가 참으로 절실하다. 둘째는 우리 대통령의 소양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직면하기 마련인 다분히 일상적인 숙제들에 덧붙여, 다른 국가와 국민들은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역사적인 숙제를 안고 있다. 곧 휴전 상태의 분단 상황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통일국가로 재창조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그런 만큼 우리 대통령은 남다른 소양이 필요하다.

  그 소양은 능력이라기보다는 자세라고 하는 게 옳겠다. 최고 지도자를 꿈꾸는 정치인들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당파를 떠나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와 판단을 수렴할 수 있는 비전을 공동으로 개발한다는 자세가 그것이다. 하나의 비전, 하나의 길로 통일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통일과 평화의 문제를 정쟁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서로가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 포용과 설득의 정치력을 두고 경쟁하는 자세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지도자는 행동하는 정치인이되, 철학적 사색에 바탕을 둔 비전을 수련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포용하되 자신의 비전을 향해 다수 국민을 설득해낼 수 있는 폭과 깊이를 담은 논리와 수사의 능력은 그런 자세에서 배태될 것이다.

  우리 지도자는 그래서 행동하는 정치인인 동시에 깊은 사색의 능력을 지닌 철인(哲人)이기도 할 필요가 있다. 그간의 대통령 모두가 한결같이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너무 평범할 정도로 말과 행동이 가볍고 헤픈 경우가 많았다. 정치공학과 자잘한 차별화에는 능하지만 깊은 사색에서 우러나온 말과 행동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은 흔히 일부 국민, 일부 계층에게는 인기를 누리지만, 그 경계를 넘어 국민을 통합하는 진중한 무게가 실린 언행과 그 바탕이 되는 철학을 몸에 지닌 이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그런 진중함과 중심이 없는 탓에 같은 정당, 같은 대통령인데도 정권 초기와 후반기가 도무지 일관성이 없고 스스로 좌충우돌하는 경우가 허다 했다.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던 철인왕(哲人王)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지혜를 응축한 머리를 갖춘 지도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박함 대신에 사색하는 진중함, 아집 대신에 귀 기울여 포용하면서도 자신 나름의 설득력 있는 논리와 진솔한 수사를 다듬어 국민 대다수를 설득해내려 진지하게 노력하는 자세를 말하려는 것이다. 우리 정치에 뚜렷해 보이는 그 결여(缺如)를 나는 아쉬워한다. 그 공백을 채우는 정치력, 그것이 내가 우리 정치에서 그리워하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