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하면 세상 모두를 바꾼다는 것은 환상”
-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 참여정부 인사의 신선한 대통령론
- 김병준의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이원우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 그가 떠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2012년 말 대선이 다가올수록 그의 이미지가 더욱 커지고 무거워지고 있다. 신문 방송만 봐서는 그는 생존 정치인 못지않다. 이승에서 그의 이미지를 불러내는 사람의 자질과 품성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결코 인기 있는 대통령은 아니었던 그는 재임 시절에 “못해먹겠다”고 실토한 적이 있고, 퇴임하면서는 “기분 좋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전 시대 지도자들과는 스타일이 달랐고, 지향점이 구분됐다.
그래서 논란이 거듭되고 있지만, 과연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어떤 것인가? 어떠한 무한 권력과 아찔한 질곡이 함께 숨어있는 것인가? 여기에 대한 질문은 그 누구도 진지하게 던지지 않는 채로 2012년의 대한민국은 다시금 새 대통령을 뽑는 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대통령 바뀌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런 착각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의 “못해먹겠음”과 “기분 좋음”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차분히 살피는 게 중요한 건 아닐까? 이번 달 서평 대상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개마고원)의 저자인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그걸 암시해준다.
노무현을 보필했던 김병준은 뜻밖에도 “정권만 바뀌면 세상만사가 풀린다”고 믿는 유권자, “집권만 하면 세상을 다 바꿀 수 있다”고 외치는 정치권 양쪽에 일침을 놓고 있다. 기존 코드에 벗어난 99% 시민의 열린 가슴과, 차분한 성찰을 함께 요구하고 있어 독자에 따라서는 다소 뜻밖으로 비춰질 것이다. 정치라는 것, 그리고 대통령을 둘러싼 허망한 장담이나 잘못된 확신을 넘어서도록 우릴 돕기 위한 책이 이 신간이다.
그걸 담은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김병준의 ‘권력 회고록’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보수파가 아니다. 대선을 10개월 앞두고 발간한 이 책은 이명박 정부의 허점을 지적하며 “빼앗긴 권력을 되찾자”고 말할 것으로 일단 가늠된다. 내용은 전혀 안 그렇다. 그는 기존의 진영논리 밖으로 나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전체를 책임있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누구나 정파(政派)에 매달리는 요즘 세상, 이점은 흔치 않은 미덕이 분명하다. 그의 목소리 몇 개를 직접 들어보자.
"복지 없이는 성장이 어렵습니다. 이 점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복지만으로도 성장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처럼 대외교역이 활성화되어 있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 저성장의 아픔은 고스란히 서민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진보가 성장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복지 속에 모든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진보진영을 걱정합니다."
“다음 대통령이 진보진영에서 나온다면 어떨까요? 성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반드시 할 겁니다. 성장을 중요한 과제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복지만으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 되면 달라집니다. 산업구조 개편과 서비스산업을 포함한 신산업의 문제, 자본시장과 금융의 문제 등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때는 어떻게 할 겁니까? 다시 그 대통령의 얼굴에 ‘시장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의 낙인을 찍을 건가요?”
'다시'라는 말 속에는 뼈가 있다. 이제 와서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권력획득을 도모하는 인사들의 상당수가 한때는 노 대통령을 경계 밖으로 내쫓아 비난하고 매도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세상에서 제일 인기 없는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인 것 같지만, 5년 전의 분위기가 결코 지금보다 덜하지는 않았다. 비극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김병준이 선택한 방법은 ‘질문 던지기’다. 그는 이 책에서 총 일곱 가지의 질문을 던진다.
①우리는 (정책 담론과 대통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②성장담론 없이 집권을 한다? ③국가 위의 기업, 무엇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나? ④집권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⑤양극화를 복지로 푼다? ⑥욕심을 버리고 상생을 하라? ⑦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가?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은 정권만 바뀌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리는 줄 착각한다. 정치권이 그런 착각을 유도한다. 현명한 시민들이라면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을 이끌어 가는 동력은 역시 참여정부 시절의 경험이다. 그의 회고를 통해 독자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분명히 대단한 자리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된다. 누가 집권을 해도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공무원들과의 알력다툼은 쉽지 않으며, 잊을 만하면 다가오는 중간 선거는 숨통을 죄어온다. 선거의 해인 2012년에 대통령이라는 직분의 한계를 되새기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제왕이 싫어서 민주화를 했던 한국이 또 다른 제왕을 찾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제왕적 지도자, 나보다 많이 가진 자의 주머니를 털어 내 주머니를 채워줄 수 있는 영웅적 지도자가 과연 탄생 가능한가?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제쳐 놓고 정치 논의에 몰입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참으로 딱한 것이다. 그래봐야 대통령이 바뀌는 것일 뿐인데….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이 책 저자와 달리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다. 즉 세계관 자체가 다른 책이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이 메시아다”라고 일갈하는 책의 마지막 부분은 통쾌하다.
“상대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고 그 위에 올라타 권력을 얻겠다고 덤비는 것이 일종의 문화가 되어 있다”는 그의 지적도 예리하다. 좌-우 모두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의 논법과도 유사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잘하면 된다.”는 장하준 식 결론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 또한 책의 백미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유권자 개개인의 각성을 제안하고 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그것이 근본적인 정답이라는 점에는 좌우가 따로 있을 수 없다.
고질적인 진영논리를 벗어나서 사회정의와 균형 잡힌 대통령론을 말하는 인사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게 읽힌다. 혹시 당신이 정의보다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 즉 보수주의자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 경우 지금 당신 머리 안에 어떠한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는가? 그것도 궁금해진다.
‣평점:★★★★☆
‣20자평: 권력의 정점을 보좌한 ‘진보’의 진영논리 출구전략.
‣함께 읽어볼 책: ①<노예의 길>(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지음) ②<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장하준, 정승일, 이종태 지음) ③<자본주의 4.0>(아나톨 칼레츠키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