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해외에서 보니 한국의 토론문화 부재가 더욱 가슴 아프다

이종운 미주도산기념사업회 운영이사

사회적 견해 차이에 따른 한국사회 특유의 소통 부재와 적대 심리는 실로 만만치 않다. 친구나 가족 간이라고 해도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의견을 진솔하게 말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일 수 있다. 민족통일, 공정분배, 반(反)시장주의 등의 용어를 자주 구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사회주의자, 좌파, 종북주의자로 몰리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법치, 안보, 한·미 우호, 친기업 등 보수적 가치를 담은 담론은 수구, 꼴통, 꼰대 등으로 야유 받기 일쑤이다. 그런 분위기가 전염된 것일까? 이제 그런 일은 해외 교포사회에서도 흔히 접하는 풍경이 됐다. 
  특히 노무현, 이명박 전·현직 대통령을 두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언어는 한 개인을 그렇게도 미워할 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진보나 보수 이념의 양 극단에 서있는 이름난 논객의 책임이 크다. 각양각색의 인터넷 사이트에 둥지를 틀고 소통보다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논리와 주장만을 확산시키는‘아무개 닷컴’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논객들의 모습을 닮기 때문이다. 이들 논객들은 다른 의견은 무시한 채, 빼도 박도 못할 막장 발언으로 증오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 '무한 정글의 사회'로 변신한 대한민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나누고 선도해야 할 공론장인 TV, 신문, 잡지 등 정통 언론 매체나 일부 오피니언 리더들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이슈에 따라 집중적 사유(思惟)와 자기검열의 절제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익 추구나 이념 노선과 성향에 따라 편을 가르고 비판과 지지를 쏟아내며 무리한 추론이나 극단의 뜻풀이로 상대를 함몰시키려 든다. 이들의 독선은 자극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스스로 흥분하며 자신의 불만을 집단사고로 강화시킨다. 
  일반 대중은 이들의 단견과 극단적인 사고(思考), 자극적인 관행어, 차단의 프레임에 갇히기 일쑤이다. 20년 넘게 미국에 사는 필자의 눈에는 그런 한국사회가 더 잘 보인다. 이곳 미국사회의 경우를 보자. 학교, 시, 수도국, 소방국 등 수많은 공청회에 참여한 바 있지만, 간혹 발언시간을 넘겨 경고를 받다가 끝내 마이크가 꺼져 멋쩍어하는 시민 발언자는 종종 보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고성이나 자극적인 언어로 공청회의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못했다. 정해진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상대를 존중하는 미국인들의 토론 문화와 달리 미주 한인사회, 그리고 '정글의 원조' 한국사회의 분위기란 실로 부끄러운 수준임이 분명하다. 
  그런 차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게 로스앤젤레스 동쪽 약 60km 떨어진 지점인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에 세워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상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몸소 본보기로 가르쳐 준 도산 선생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미주도산기념사업회와 리버사이드 시가 2001년 공동으로 건립한 것이다. 리버사이드 시민광장은 도산 동상 이후에 건립된 간디 동상과 훨씬 이전부터 있던 마틴 루터 킹 동상이 함께 어울려 평화를 상징하는 명소로 자리매김이 되었다. 학생들의 교육현장과 시민쉼터로 정착되고 한인 위상도 더불어 높이고 있는 곳이다.
  밝히지만 동상건립을 처음 제안한 것이 필자였다. 동상 건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리버사이드 시장과 시공무원을 비롯한 시의원과 시민들의 동상건립의 타당성에 대한 의사결정 전 과정을 지켜보며 그들의 민주적인 토론문화와 토론역량의 진수를 맛 본 산뜻한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도산 동상건립 제안을 받은 시장과 시관계자들은 무척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산 안창호는 생소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당국은 제출 자료를 검토하고 현지 대학의 한인 교수를 초청하여 도산에 관한 강의도 듣는 열린 자세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앞으로 동상건립을 반대할지도 모를 시민들을 설득하는 데 긴요하다며 도산이 남북에서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증명하라는 치밀함도 보였다. 결국 리버사이드 시는 도산 삶의 발자취를 동상 건립으로 기리는 것은 시민의 교육현장으로서의 의의가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애국자이자 민주주의와 세계평화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높은 윤리사상으로 솔선수범해온 삶에 대한 평가였다. 이는 시당국의 리더십과 토론 참여자의 건설적이고도 협동적인 민주시민 역량이 일구어 낸 작품인 것이다. 
  최근 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2011년 말 현재 한국 국민의식 조사에서 51.4%의 유권자가 스스로 중도라고 규정함으로써 7년 전 같은 조사에 비해 중도진영이 무려 12.5%나 늘어난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배타적인 선명성 주의·주장보다는 좌우를 아우르는 중도적인 의사를 선호하는 중간층이 두터워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합리적 주장이 다수의 목소리가 되어 서로 다른 의견들을 경청하고 어우르는 소통의 장이 될 때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벽을 넘어서서 상식의 회복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보수와 진보의 중간을 이야기하면 아마 ‘사꾸라’라는 말을 들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중도의 공론장은 비단 보수와 진보의 양극화의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간, 각종 이해집단간의 반목과 분쟁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한결 같이 자신의 틀 속에 갇혀 각자 어느 한 편의 주장만 내세워서는 이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킬 수 없다. 이제 서로 간 증오와 아집으로 편을 갈라서서 벌이는 극단의 막말싸움을 종식시키고 소통과 화합의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간의 목소리를 내는 다수가 참여하는 중도의 공론장을 만들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공통분모를 모색해 나가야 한다. "과연 어떻게"가 문제인데, 중도의 공론장 마련이 민주주의의 기본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