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의 덫 <중>
- "경제적 불평등 없이 발전 없다?"
좌승희 서울대 겸임교수
[싣는 순서]
<상> 지금 우리는 평등주의라는 함정에 빠져있다
<중> "경제적 불평등 없이 발전 없다?"
<하> 한국경제 회생을 위한 마지막 처방
우리가 사는 시장은 무엇인가? 시장은 경제적 차등과 차별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를 통해 동기(motivation)를 부여하는 장치이다. 이루어낸 성과에 따른 차등과 차별이 없이 일할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부 열심인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에 대해 성적을 차등하지 않고 모두를 다 공부 열심히 하게 할 방법은 없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동기부여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다. 시장은 바로 이러한 경제적 차별화의 선수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 참여하는 모두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장은 그래서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들을 골라 이들에 열심히 구매력(돈)으로 투표한다. 그래서 경제적 차등을 만들어낸다. 중소기업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시장에서는 대기업의 제품을 더 사랑하는 것이 시장의 현실이다. 이렇게 해서 훌륭한 기업에의 경제력 집중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은행은 돈을 잘 버는 기업과 개인에게만 더 싼 금리로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하는 장치이다. 정치인이나 학자, NGO들은 돈을 잘 못 버는 어려운 기업과 개인에게 더 많은 대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경제현실은 역으로 은행이 자금을 더 잘 이용할 줄 아는 주체에게 대출을 해야 예금자나 국민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은행도 잘 하는 기업과 개인들을 더 선호함으로써 경제력 집중에 기여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적 차이 무시하는 평등주의는 무서운 독배(毒杯)
증시의 투자자들은 항상 잘하는 기업의 주식만을 선호한다. 그래서 잘하는 기업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여 경제력 집중을 조장하는 셈이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은 좋은 기업만을 선호한다. 기업도 또한 차별적으로 좋은 인재와 제휴기업을 선택한다. 강한 기업에 선택된 인재와 제휴기업은 미래를 보장받는다. 그래서 학생들은 스펙을 쌓느라 애를 먹기도 하는 것이다. 이래서 시장에서 우리 모두는 이성적으로 원하든 않든 결국은 경쟁력 있는 경제주체를 선택하여 자원을 집중시킴으로써 경제력 집중과 더 나아가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시장이나 사회나 조직이 경제적 차별을 제대로 하지 않고 그 구성원들을 성과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혹은 성과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보상하거나 대접하게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시장도 사회도, 조직도 모두 구성원들에 의한 사보타지(sabotage, 태업 등 방해 행위)에 직면하게 되어 결국은 몰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어느 누가 경제나 사회나 조직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인가? 그래서 시장의 경제적 차별화는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며, 역으로 경제적 차이를 무시하는 경제적 평등주의는 경제정체의 충분조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차이나 차등이 없이, 즉 경제적 불평등이 없이 경제발전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을 통해 모두를 동기부여 하여, 더 열심히 부의 창출에 나서도록 유인함으로써만 경제발전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시장이 바로 이런 기능을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란 바로 이런 시장의 자연스러운 진화 결과로서 여기서 생기는 경제적 불평등은 아름답지는 않지만 시장의 변화를 지속시키는 필요조건이다. 시장은 항상 불완전하지만 적어도 차등과 차별을 만들어냄으로써 발전을 ‘견인하는’ 장치인 것이다.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없이는 경제적 역동성과 부의 창출노력도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적 차등을 없애 동기부여가 없어져야 모두 잘사는 행복한 사회가 된다고 했으니 이 세상의 이치를 잘못 본 셈이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경제적 평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적, 경제적 노력을 하지 않는 나라가 있는가? 1인 1표의 민주주의는 국민다수가 모두 평등한 부와 번영에 대한 바람을 버리지 않는 한, 불행하게도 경제평등주의 정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경제적 평등을 이상으로 내거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이나 체제가 보편화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바람이 안타깝게도 시장의 차별화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발전역행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모두의 행복을 위한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양극화는 모두가 가난해지는 하향평준화 과정이다.
그동안 인류는 경제적 평등이라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시장의 동기부여 기능을 차단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경제발전을 바라고 부유한 삶을 기원해 왔다. 지금 인류가 부딪치고 있는 많은 경제문제들, 특히 양극화의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제평등주의 이념을 추구해 온 민주주의 정치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시장이 경제적 차등을 초래하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하여 이를 인위적으로 보다 평등한 사회로 바꿔보겠다는 민주정치의 노력이 오히려 조그만 차이를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동기부여가 안 되는 사회, 즉 경제적 차등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는 경제정체를 피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2:8이니 1:9니 하는 ‘양극화’는 경제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 정치 하에서 경제정체로 인해 모두가 가난해지는 과정으로 오히려 경제의 ‘하향평준화’ 현상이라고 불러야 옳다고 생각한다. 논란과 분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양극화라 자극하고 있지만 90%가 다 어려워지는 상황을 어찌 양극화라 할 수 있는가. 모두 다 몰락하는 과정이지….
그동안 인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에 악(惡)이고, 민주주의는 평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선(善)이라며 하느님처럼 믿어 왔다. 그러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해온 민주주의는 오히려 가난의 보편화에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그럼 모두가 같아지지는 않지만 모두의 발전을 가져오는 자본주의 시장은 악이고, 모두가 평등하지만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평등지향 민주주의는 선인가?”라는 질문이다.
오히려 지금은 자본주의를 더 평등한 체제로 개혁한다하여 이미 평등지향 민주주의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삶의 현장인 시장을 또다시 평등주의적 이념의 잣대로 제단하려 할 것이 아니라, 1인 1표의 민주정치가 그동안 초래한 경제적 왜곡과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풀어내기 위해 민주정치의 경제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는 아닌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 4.0이니 뭐니 하여 시장을 더 왜곡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난의 보편화를 가져온 민주주의에 의한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히려 민주주의 4.0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악이고 민주주의는 선이다?
오늘날 세계경제와 한국경제가 부딪치고 있는 경제문제들의 핵심원인은 바로 국민들에게 일할 동기를 부여하기 보다는, 국민들의 뜻에 따른다하여 국가가 국민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한다고 약속함으로써 다수 국민들의 일할 동기를 차단하는데서 연유하고 있다. 시장은 끝없이 “열심히 하지 않고는 경제적 부를 쌓을 길이 없다”고 하는데도 정치계와 정부는 나서 “시장은 잘못됐습니다. 우리가 시장이 만들어낸 불평등을 고쳐 모두를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고 약속을 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동기부여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데 경제성장이 가능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 재정이 건전해질 수 없는데 복지지출은 더 늘려야 하니 재정적자와 국가부체의 증가는 필연적 결과이고, 이에 따라 금융 불안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난 반세기 이상을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가 걸어온 “모두 번영하는 행복의 길”의 종착역인 셈이다.
그래서 정부의 진정한 역할은 국민들에 동기를 부여하여 발전의 길에 나서게 하는 것이지, 시장의 차별화를 통한 동기부여 기능을 무력화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의 동기부여 기능을 활성화하는 정부만이 발전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동안 걸어온 하향평준화의 길을 계속 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70억 인류 모두의 몫이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인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