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과 법치주의
- 현실적 국민의사의 수용 한계 -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장영수
Ⅰ. 문제상황: 포퓰리즘의 발현과 법치의 충돌상황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복잡하고 다의적인 것만큼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 또한 매우 다양하다. 포퓰리즘을 중남미의 특수한 현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이미 세계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그 뿌리를 19세기 러시아의 브나로드(인민 속으로) 운동이나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포퓰리즘을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포퓰리즘의 전면적 긍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시도로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문제상황은 포퓰리즘에 대한 접근 자체를 매우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언론에 의해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매우 다양한 의미로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포퓰리즘에 대한 개념 정의 자체를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 내지 개념 정의의 곤란성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징표 몇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포퓰리즘은 대중적 지지를 지향한다. 사실 대중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점에서는 민주주의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에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의 실현과 관련하여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포퓰리즘은 보다 직접적인 국민의 의사를 중요시하며, 이를 인민주권의 형태로 구현하고자 한다.
둘째, 포퓰리즘은 대중적 지지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하여 기존의 규범이나 체제를 무시하거나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이는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기득권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다수결에 의존하되, 다수결의 한계를 인정하는 민주주의 헌법이해와 충돌하게 된다.
셋째, 포퓰리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근본가치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적 지지, 다수의 의사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다수의 결정이 잘못된 경우를 드물지 않게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다수결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본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다수결의 정당성이 갖는 의미와 한계, 그리고 소수자의 보호가 과거와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포퓰리즘은 이러한 숙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큰 것이다.
이러한 포퓰리즘의 특징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대해서는 각자의 민주주의 이해에 따라 논자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포퓰리즘과 법치의 관계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전통적인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와의 조화를 전제로 형성된 반면에 포퓰리즘은 법치주의와 충돌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포퓰리즘과 법치의 관계를 몇 가지 현상을 중심으로 분석하기보다는 근본가치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법치의 의미에 대한 혼란을 정리하고, 법치를 통해 무엇을 실현하여야 하는 것인지가 분명해져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근본가치에 대한 이해가 법치의 실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Ⅱ)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본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법치주의와 법의 이념으로서의 정의가 어떤 구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지, 이 과정에서 이른바 다수에 의한 정의와 근본가치로 인정되는 정의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Ⅲ)를 정리하는 것은 포퓰리즘과 법치의 관계를 정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에 기초하여 포퓰리즘 정치의 위험성 및 그에 대한 안전장치로서의 법치의 중요성(Ⅳ)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법치의 목적과 근본가치
1. 법치의 의미
민주주의와 더불어 법치주의가 현대 헌법국가의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마치 정당성의 동의어처럼 사용됨으로 인하여 그 의미에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반면에 법치주의는 전통적인 법(法)과 법치(法治)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하여 그 의미와 역할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적지 않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은 법치(法治)보다 덕치(德治)가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널리 확산시켰으며,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법가 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또한 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법은 권력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은 법치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헌법의 기본원리로 인정되는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에 의한 통치라는 형식만을 강조할 경우에는 그 법의 내용적 정당성을 도외시한 채, 법을 제정하는 사람이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르게 될 수 있으며, 이는 법치를 지배자의 통치도구로 만드는 것이 된다. 그러나 헌법원리로서의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을 수단으로 하는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개인적 자의(恣意)에 의한 통치가 아닌 - 법이라는 객관적인 제도에 따른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법치주의의 생명은 법의 형식보다 법의 내용적 정당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법치주의가 내용적으로 정당한 법을 지향한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공정한 법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법치주의의 핵심적 요소로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법을 집행하는 자와 법을 제정하는 자가 분리․독립되어야 한다는 권력분립과 연결된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로 구성된 의회에서 법률을 제정하고, 또 다른 민주적 정당성의 기초 위에 성립된 정부는 법률에 따라서만 국가권력을 행사하도록 함으로써 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며, 만일 법의 내용적 정당성이 문제될 경우에는 사법부에서 규범통제의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는 것이다.
2. 법치주의의 역사적 발전
오늘날과 같은 법치주의의 틀이 형성되기까지 인류는 수백 년의 시행착오를 경험해야 했으며, 우리나라도 1948년의 헌법제정 이후로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특히 구미의 법치주의 발전사는 법치의 실현에서 나타나는 보편성과 고유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법치의 기본적 방향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 보통법이 발전되고, 이러한 보통법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법의 지배(rule of law)라는 사상이 널리 확산되면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영국에서의 법의 지배는 불문헌법국가인 영국의 특성으로 인하여 법률의 내용적 정당성을 사법적으로 판단하는 위헌법률심판제도의 탄생으로 연결되지 못하였지만, 주변국가들에서 법치주의를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전쟁을 통하여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미국은 영국의 제도와 문화를 많이 수용하였지만, 의도적으로 영국의 법제도와 다른 형태의 제도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영국과는 달리 성문헌법을 제정한 점과 –의회주권에 기반한 영국의 의회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제의 창안이 그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치의 실현과 관련하여서 영국의 법의 지배와 매우 유사하지만 부분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는 성문헌법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위헌법률심판제도를 창안하게 된 미국 사법제도를 지배하는 중요한 헌법원리로 인정된다.
영국이나 미국에 비하여 정치적 발전이 매우 늦었던 독일의 경우에는 독특한 형태의 법치주의 발전이 있었다. 민주적 다수에 의해 법률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수 있었던 영미의 경우와는 달리 독일은 이른바 외견적 입헌주의 하에서 의회가 군주세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른바 형식적 법치주의가 통용되었으며, 독일에 민주주의가 확립된 이후에야 실질적 법치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체계의 정교함 및 포괄적인 위헌심사, 광범위한 헌법재판을 통하여 현대 독일의 법치주의는 가장 발전된 모델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법치주의의 발전과 관련하여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정치의 발전에 비하여 법치주의의 발전이 매우 늦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헌법평의회는 그 구성방식의 특이성과 더불어 예방적 규범통제라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위헌법률심사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최근 헌법개정을 통하여 구체적 규범통제까지 도입함으로써 프랑스의 법치주의가 한걸음 더 발전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 성과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의 여러 나라에서 나타난 법치주의의 발전은 몇 가지 공통점을 보여준다. 즉, ① 권력분립의 원리 ② 법원의 독립 ③ 행정의 법률적합성 ④ 사법적 권리보호 ⑤ 공법적 손해의 전보 등에 의해 나타나는 법이라는 형식에 의한 통치는 오늘날에도 법치주의의 실현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된다. 다만 그러한 요소들의 실질적인 의미는 내용적으로 정당한 법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각 국가에 따라 시민사회의 성격과 내부적 변화․발전이 상이한 과정을 통하여 나타났으며, 특히 경제적 기득권의 유지 등과 관련된 문제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법치주의는 동일한 이념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국가권력의 행사를 객관성과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법에 구속되도록 함으로써 헌법질서의 안정성과 내용적 정당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3. 법치의 목적으로서의 인권보장
법치주의는 근대적 시민사회를 전제로 시민적 자유의 보장을 위해 형성․발달된 헌법적 원리이다. 따라서 법치주의와 인권보장은 이미 그 출발에 있어서부터 불가분의 내적 관련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권의 보장이야 말로 법치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기본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권보장과 법치의 관계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단순하게 정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양자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하며,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법치주의가 어떻게 구체화되느냐에 따라서(형식적 법치주의와 실질적 법치주의) 인권보장의 방향과 방법 및 정도가 달라지는가 하면, 거꾸로 인권에 대한 이해의 차이(소극적․자유주의적 기본권이해와 적극적․사회국가적 기본권이해)가 법치주의의 실현행태를 바꾸기도 하는 것이다.
전통적․자유주의적 법치주의는 인간의 생활영역을 국가의 영역(공적 영역)과 사회의 영역(사적 영역), 즉 국가권력의 우월적 지위가 인정되는 영역과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이 인정되는 영역으로 분류한다. 이에 따라 기본권은 공동체질서 속에서 개인에게 부여되는 지위를 밝혀주는 것으로 이해되며, 일반적으로 국가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적) 활동을 할 권리가 아니라 사회의 영역 속에서 자유롭게 사적 생활을 영위할 권리로 이해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사적 영역의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또한 권력의 분립이 요청된다. 그러나 국가권력구조의 문제는 단순히 인권보장 내지 법치주의의 실현을 위한 조건으로 인정될 뿐, 전체 국가권력이 인권에 구속된다는 관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인권보장과 국가권력의 이원화). 또한 국민의 인권도 단순히 국가의 방해 없이 자유로운 활동을 할 권리(소극적 방어권으로서의 자유권)로 인정되었고, 국가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한 인권의 실현은 생각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발전, 기본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과 맞물려 발전하게 된 실질적 법치주의는 이러한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법치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실질적 법치주의는 단순히 법에의 구속, 법의 최고성을 주장하고 이에 따른 형식적 합법률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의로운 법규범의 창설과 유지를 지향하고 있다. 이에 따라 헌법은 이러한 정의로운 질서의 기초와 과제를 규정짓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본원리들을 실정화하여야 하며, 이들의 실현을 - 헌법재판 등을 통하여 - 규범적으로 관철시켜야 한다.
현대헌법상의 실질적 법치주의는 인간의 존엄 및 자유와 평등이 공동체의 전체질서 속에서 실현될 것을 요청하게 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밀접한 상호관련에 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이미 인권보장을 국가질서 형성의 지침으로 보는 새로운 헌법이론이 보편화되어 있으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관계도 종전과 같은 소극적․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결합 및 보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나아가 민주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인권의 실현에 있어서도 국가권력의 적극적 활동이 요청되는 사회국가가 보편화되면서 사회적 법치국가의 요청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법치가 행해진다는 것, 즉 ‘법이라는 형식에 의한 통치질서’가 확보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권보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국가권력이 분립되고, 안정적인 법의 제정과 운용이 이루어짐으로써 법치주의에 의한 법적 안정성 내지 국가활동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확보되면, 그것은 국민의 자유로운 활동의 영역을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보장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무리 형식적 안정성을 갖춘 법이라도 그것이 내용적으로 정의의 요청에 위반되는 것이 명백할 경우, 그러한 법은 통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정의에 합치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의 하나로서 우리는 역사적 경험과 투쟁을 통해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 발전되어 온 인권을 들 수 있다. 즉, 인권 속에서 확인되는 가치기준들이 정의 내지 내용적 정당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4. 근본가치 논쟁과 법치의 역할
헌법학에서 가치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이다. 과거 법실증주의가 헌법이론을 주도하던 당시에는 법학의 가치중립성을 법학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본적 전제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가치의 문제를 도외시하던 경향이 바뀌게 된 것은 20세기초의 방법논쟁과 직결되어 있다.
실증주의적 방법에 기초한 근대 자연과학의 발전은 20세기초까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법실증주의나 실증사학 등이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초에 들어와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문화과학(또는 정신과학)의 학문성과 이를 기초지우는 방법론적 독자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고, 실증주의적 방법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러한 학문의 성격과 방법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 가운데 문화과학의 특징으로 제시되었던 가치관련성은 자연과학과 구별되는 사회과학 내지 인문과학의 독자성을 잘 설명할 수 있었으며, 법학에서도 가치관련성을 받아들이는 이론들이 등장하였다. 물론 전통적인 법방법론과의 경합과 충돌이 적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법학은 가치관련성을 인정하는 기초 위에 서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어떤 공동체, 어떤 헌법도 가치 및 가치평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미 헌법제정 자체도 일정한 가치평가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일정 한도의 가치평가는 법에 있어 불가피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헌법에 있어서의 가치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기본적인 가치의 정립이 과연 어디까지 미치고 있으며 또 미쳐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헌법에 있어서의 가치에 대한 다양한 견해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1970년대 후반 서독에서 있었던 이른바 근본가치논쟁이다. 이 논쟁의 원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은 낙태나 이혼과 같은 종래의 윤리적 또는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법적 규제가 과연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얼마나 필요한지 라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곧 국가가 지켜야 하며, 그 기초 위에서 국가와 헌법이 존립하고 있는 근본가치란 과연 무엇인가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근본가치의 문제는 여러 정치적․사회적 영역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며, 또한 헌법학에 있어서도 민주주의의 존립의 기초에 관한 많은 연구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근본가치에 관한 논쟁의 바탕에 깔려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의 긴장관계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다원성과 근본가치와의 긴장관계의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다수의 의견과 근본가치와의 긴장간계이다.
⑴ 민주적 다원성(=자유)과 근본가치의 긴장관계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인 자유는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다원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가운데서만 남들과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본가치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불가침의 영약을 인정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다원성에 대한 제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프랭켈(E. Fraenkel) 이후로는 다원주의에 있어서도 일정한 공동의 기초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이 보편화되고 있다. 즉, 근본가치라는 것은 다원성이 인정되기 위한 전제로 모든 사람이 합의한 공동의 기초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근본가치는 다원적 사회의 사회윤리적 공통분모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적 다원성과 근본가치간의 긴장관계는 다원성의 올바른 발현 속에 해소될 수 있다.
⑵ 국민의 다수의사와 근본가치의 긴장관계
근본가치에 대한 물음은 또한 그 궁극적인 정당성근거를 국민에 의한 지지에 두고 있는 민주적 정부가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국민의 사실적 다수의견에 반하여 가치를 정립하고 또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국민주권을 본질적 징표로 하는 민주주의가 국민의 동의에 기초하는 국민의 정부라는 것(혹은 국민의 정부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국민의 주권이 어떻게 행사되는지 내지 민주적 국가질서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형성되며 민주적 의사형성이 어떤 절차와 내용에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따라 다수결이 민주적 의사결정방법으로 인정되고는 있으나 그것이 민주적 정부는 항상 그때그때의 국민 다수를 통계적으로 확인하여 그로부터 정책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오늘날의 사회적 상황이나 정치적 관계가 너무 복잡하고 전문적이다. 오늘날 직접민주제가 아닌 대의제가 민주주의 실현방식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국민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충분한 전문적 지식과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올바르게 판단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국가기관 내지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통제라는 측면이 항상 문제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스스로가 그때그때의 국가적 사안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원한다. 그러면 근본가치는 과연 어떻게 국민의 다수의사에 대립하여 스스로를 관철시킬 수 있는가?
근본가치의 의미와 실효성은 결국 그때그때의 다수에 의해 정해지는 정치적 결정보다는 역사 속에 형성된 법이념과 법원리에 대한 숙고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근본가치를 수호하는 것이 법치의 중요한 과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Ⅲ. 절차적 정의와 실체적 정의
1. 법의 이념으로서의 정의
법의 이념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란이 없지 않으나, 오늘날에는 정의와 법적안정성, 합목적성을 법의 이념으로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정의가 법의 의미와 기능을 밝혀주는 가장 중요한 이념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이론(異論)이 없다. 법의 지향하는 바는 정의로운 국가공동체 질서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실정법의 가치표준이고 입법자의 목표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도 아직 확실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논의는 -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는 - 정의의 실체 내지 핵심이 평등이라는 결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오늘날에서 정의는 산술적 평등(=평균적 정의) 또는 비례적 평등(=배분적 정의)으로 이해된다.
법에서 인정되는 산술적 평등은 비례적 평등의 결과로 생각될 수 있다. 일단 비례적 평등에 의해 동등한 자격이 인정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들에게 산술적 평등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에 있어서의 정의, 법에 있어서의 평등은 결국 “각인에게 그의 (정당한) 몫을”이라는 배분적 정의를 기본으로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정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배분적 정의는 자의적인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불평등한 것을 불평등하게 취급할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① 도대체 어떤 것을 평등 또는 불평등한 것으로 볼 것인지, ② 또 불평등한 것을 각기 어떻게 달리 취급하여야 할 것인지에 관한 보편타당한 기준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결국 정의는 실정법체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지만, - 적어도 배분적 정의라는 형식만으로는 - 구체적인 질서형성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없다.
2. 실체적 정의 확인의 어려움과 대안으로서의 절차적 정의
배분적 정의는 각자에게 자기 몫을 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정의의 형식에 대해서만 정리하였을 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마치 일정한 사항을 공동체의 기본적 가치(=근본가치)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면서도 무엇이 근본가치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적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정의의 내용은 개개인이 무엇이 정의라고 생각하는지가 서로 다를 수 있으며, 개개인의 정의 관념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따라 문화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정의의 보편성 요청과는 대립되는 개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가공동체의 법적 기본질서로 국가의 근본가치를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헌법의 경우에도 이러한 보편성과 고유성의 병존이 확인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등에 관한 보편적 요소가 각국의 헌법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방식과 미국에서 이를 실현하는 방식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마다 나타나는 개별성 내지 고유성을 어떻게 적절하게 반영하면서 보편적 가치를 최대한 실현시킬 것인지가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된지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커다란 정치적․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인권과 민주주의, 법치주의에 대한 신봉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할 것인가를 비롯한 많은 문제에 있어 사고의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헌법은 여러 차례 크고 작은 변동을 겪어야 했다(헌법개정과 헌법변천). 이런 과정 속에서 기존의 제도가 변경․폐지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제도가 유지되는 경우에도 그 제도들의 배경에 있고 해석에 의해 실현되는 각종 가치들은 많은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가 그 본질상의 다원성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가치의 변천은 불가피하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변천을 억압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민주주의는 이러한 변천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련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이념인 자유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의 변천은 근본가치의 확인을 어렵게 만들며, 그로 인하여 헌법의 불안정성을 수반할 수 있다. 가치의 변천을 이유로 헌법을 자주 개정하게 되면 헌법의 권위와 헌법에 대한 존중, 나아가 헌법의 규범력을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무엇이 정의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실체적 정의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널리 이용되고 있는 것이 절차적 정의이다. 일정한 절차를 통해 합리적 조정과정을 거쳐서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이 정의라고 잠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개개인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체적 정의관념보다 (개인적 정의관념을 조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절차를 통한 정의의 확인과 실현에 보다 큰 비중을 두게 된다.
3. 절차적 정의의 한계로서의 실체적 정의
이처럼 절차적 정의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해서 실체적 정의가 더 이상 전혀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오늘날의 정치질서 및 법질서가 절차를 통한 정의의 실현에 의지하는 바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일정한 한계 내에서 실체적 정의의 요청은 (헌)법적으로도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다.
모든 사안에 있어서 실체적 정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실체적 정의의 확인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인 오늘날 인류의 보편가치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인권이다. 인권의 구체화와 관련하여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구체적인 인권의 유형과 내용에 관하여는 범인류적 합의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깨뜨리는 다수결이나 절차적 정의는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 상대주의적 민주주의에 따라 다수가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어떤 사항이라도 결정할 수 있다고 인정한 결과 나치가 다수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고, 나치의 독재를 통해 수많은 반인도적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다수의 결정, 절차적 정의에 대해서 일정한 한계를 그어주는 것, 이른바 비상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실체적 정의인 것이다.
Ⅳ. 포퓰리즘에 기반한 다수의 횡포와 그 방어벽으로서의 법치
1. 포퓰리즘 정치의 위험성: 다수의 독재, 다수의 횡포
포퓰리즘의 사례로 이야기되는 것들 중에는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더구나 포퓰리즘의 역사적 뿌리로 지칭되는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이나 미국의 인민당의 경우와는 또 다르게 최근 남미를 중심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이른바 신포퓰리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는 포퓰리즘이 한편으로는 인민주권을 내세우면서 민주주의의 실질화를 지향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힘을 앞세워 기존의 절차와 규범을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헌법이론이 국민 다수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는 가운데 국가질서를 형성해 나가는 민주주의와 이미 확인된 중요한 가치들을 중심으로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법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법치주의의 조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포퓰리즘은 오로지 다수의 힘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물론 다수가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경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미 인류 역사를 통해 충분히 확인되었다. 따라서 다수에 의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될 근본가치가 있으며, 이를 함부로 침해할 경우에는 그 결정에 동참한 다수도 후회하게 될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을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방식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다수가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믿음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다수의 수적 우위로 인하여 다수결이 -힘의 논리에 의해-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다수결이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수의 의사가 결정력을 갖게 되는 것은 다수의 의사가 소수의 의사보다 실질적으로 더 큰 비중을 갖는다는 점에서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다수결이 채택될 경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진다는 것, 즉 다수결이 적용됨으로써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억압된다고 느끼는 사람의 수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수결은 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를 통하여 다수결은 평등의 실현에 기여한다는 분석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수결(혹은 다수의 지배)이 결코 자기목적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수결이 정당성을 갖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이를 벗어난 경우의 다수결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수결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전제와 한계가 매우 중요하다.
먼저 다수결이 진정 자유와 평등의 실현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하여는 그 전제로서 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간의 평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구성원이 평등한 인격권을 갖고 있고 따라서 자기의 문제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사실적 능력여부를 떠나) 스스로 결정할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비단 다수결이 민주적 정당성을 발하기 위한 전제일 뿐아니라 민주주의 자체의 기초이기도 하다.
또한 다수결은 다양한 형태의 결정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가치관의 다원적 개방성이 인정되고, 그런 가운데 다양한 견해와 다원적 집단이 형성되고 활동하며 이들 간의 정당한 갈등과 경쟁, 타협과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다원주의적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다수의 형성은 항상 역동하는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즉 다수결의 내용은 물론 다수의 형성 그 자체가 항상 개방되어 있으며 실질적인 기회균등을 통해 다수와 소수가 교체될 수 있을 때, 그리고 다수의 형성 및 결정과정의 공정성이 절차의 공개를 통해 보장될 때, 그러한 다수결은 민주적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원주의적인 대립이 무제한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원주의적인 다양한 집단의 대립과 충돌, 다수와 소수의 경합과 경쟁이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극단적 결과로 나타나지 않기 위하여는 이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통합시켜주는) 공동의 기초가 필요하다. 이러한 공동의 기초위에서 다수와 소수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가운데 한 편으로는 상대방이 (비록 자기와 의견이 다를지라도)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는 주장을 하며 또 대화를 통해 서로의 견해차를 좁혀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다른 한편으로는 설사 상대방의 주장이 관철된다 하더라도 그동안 인정되어 왔던 때로는 법정립의 형태로, 때로는 정치적 합의의 형태로 나타나는 공동의 기본가치의 존속과 효력에는 변함이 없다는 믿음이 다수결을 가능케 한다.
이로써 다수결의 한계 또한 분명해진다.
다수결은 다수의 결정이라는 형식적 절차만으로 모든 것을 미화시킬 수 있는 마이다스왕의 손은 결코 아니다. 다수결의 민주성은 소수가 다수의 결정에 승복함으로써 비로소 확보될 수 있으며, 소수를 억압하는 다수의 결정은 이미 민주적 다수결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2. 소수자보호의 수단으로서의 법치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로 지칭된다.
국민주권에 기초하여 국민의 의사와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국가질서의 형성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국민이 하나의 통일된 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수 국민의 의사를 기준으로 국가질서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사가 국민 전체의 의사를 갈음할 수는 없는 것이며, 다수의 의사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벗어날 경우에는 –즉, 다수결의 전제가 결여된 경우나 다수결의 한계를 넘어선 경우에는- 다수결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위헌법률심판이다. 다수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모여서 다시금 다수결로 제정한 법률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이 헌법적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확인되면 무효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다수가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자 할 때, 그 정당성을 확인하는 방법,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다수의 결정을 통제하는 방법은 결국 법치에 있다. 다수라 하더라도 법을 준수하여야 하며, 법적으로 보장된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법치를 통해 다수의 횡포를 막고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첫째, 다수관계를 확인하고, 다수의 결정이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정한 절차를 거치도록 하는 방법이다. 단순히 여론조사를 통해 어떤 의견이 다수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나 국민투표 등과 같이 제도화된 절차를 통해서 확인된 다수의 결정에 대해서만 법적 구속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 다수와 소수 모두가 합의하여 마련한 원칙과 기준을 다수라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컨대 헌법개정의 경우에는 국회 내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라는 가중다수를 얻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과반수의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는 국가공동체의 기본적 사항에 대한 변경을 정당화하기에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며, 반대의견이 3분의 1 이상이면 이러한 중대한 변화를 막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일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아예 다수결의 한계 밖에 있는 것으로 봄으로써 다수라 하더라도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 이른바 가치구속적 민주주의 내지 방어적 민주주의를 수용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다수결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근본가치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밖에도 법치를 통하여 다수의 횡포를 막는 방법은 다양하게 모색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다수에 대하여 법치를 통해 일정한 기준과 지침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정상적인 헌법질서 하에서는 민주적 다수와 법치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민주적 정치관정을 통해서 올바른 내용의 법이 형성되고, 이렇게 형성된 법의 울타리 내에서 -법의 이념과 법적 기준을 준수하고 실현하는 가운데- 민주적 정치과정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가 법을 무시할 경우, 헌법질서는 혼란에 빠지게 되며, 법치가 흔들릴 경우에는 국가공동체의 근간이 위태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3. 법치를 통한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국가질서의 유지
법치는 법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다. 즉, 법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경우에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법의 이념인 정의와 법적 안정성, 그리고 합목적성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법치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정의의 이름으로 엉뚱한 피해가 발생하는 것도 최소화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법이 수시로 바뀜으로 인하여 혼란을 야기하지 않도록 하며, 나아가 법에 근거하여 국가작용의 예측가능성을 확보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 안정성은 무엇보다 법 자체의 안정성을 요청하며, 이러한 안정성은 라드부르흐의 말에 따르면 네 가지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① 법이 실정적이라는 것, 즉 제정법으로 명확하게 조문화된다는 것, ② 이 제정법이 그 자체로서 안정적이라는 것, 즉 일반조항 등에 모든 것을 미루지 않고 제정법 스스로가 -사실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문제들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다는 것, ③ 법의 기초가 되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오류없이- 확인될 것, 이를 위하여 때로는 확인이 곤란한 내면의 문제를 외적 징표로 대치하기도 한다. 예컨대 개인의 정신적 성숙을 판단하는 대신 일정 연령에 이르게 되면 행위능력을 인정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④ 그리고 법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실정법이 너무 용이하게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의와 법적 안정성이 법이 지향하는 목적을 나타내는 법이념이라면, 합목적성은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의 정당성에 관한 법이념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목정의 정당성과는 별도로 수단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기준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헌법원리로 인정되는 비례성원칙은 국가작용의 정당성 판단에 매우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비례의 원칙(Verhältnismäßigkeitsprinzip)은 초기 국가권력, 특히 경찰권의 행사에 대하여 한계를 긋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이미 19세기부터 자유주의적 국가사상의 영향하에 기본권을 제한하는 국가권력의 행사는 특별한 수권(법률의 근거)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그 제한의 목적에 비추어 적정한 수단만이 허용된다는 판례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학설상으로도 이러한 목적과 수단 내지 기대하는 결과와 수단의 비례성에 대한 검토는 점차 비중있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행정법적 원칙으로 생각되어지던 비례의 원칙이 헌법적인 차원으로 고양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실현에 관한 이론 및 - 특히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 의한 - 실무상의 발전은 곧 기본권 내지 법치국가의 요청과 관련하여 국가권력행사에 있어서 엄격한 비례성을 요청하였으며, 그 적용범위도 단순히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활동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비례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국가권력의 행사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결과 내지 목적과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선택하는 수단간의 합목적성을 의미하며, 이것은 다시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비례성원칙은 목적과 수단 사이의 적합성을 요구한다. 둘째, 비례성원칙은 필요성의 요청을 포함한다. 셋째, 비례성원칙은 협의의 비례성판단을 통해 구체화된다.
이처럼 법치는 법이념의 실현을 통하여 국가작용의 목적과 수단이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며, 이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국가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Ⅴ. 맺음: 진정한 민주적 법치국가를 향하여
국가공동체의 발전방향을 논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다양한 가치와 방법들의 경합으로 인하여 혼란스럽다. 포퓰리즘이라는 새로운 정치현상이 과연 우리나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시각 또한 다양하다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기초 위에서도 그 실현의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경우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공동의 기초를 부정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포퓰리즘 문제에 대한 접근은 더욱 조심스럽다. 그러나 포퓰리즘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김대정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모든 정책이 비민주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정책이, 혹은 어떤 정부가 포퓰리즘적 요소를 갖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바람직한 민주주의,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치주의가 무엇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문제되는 정책이나 주장이 이에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따져보는 것이 보다 올바른 자세일 수 있다.
다수의 지지, 다수의 지배를 지향한다고 해서 모두가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닌 것처럼, 포퓰리즘의 색채를 보인다고 모두 비민주적이고,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문제의 핵심은 다수의 형성과정의 정당성, 다수의 이름으로 내리는 결정이 정당성을 갖기 위한 전제 및 한계에 관한 정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어떤 경우의 어떤 정책이 다수결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복지 포퓰리즘으로 논란되는 무상급식 논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정된 예산을 사용하여 국민의 복지수준의 최대한 향상시키고자 노력할 때, 학교급식을 저소득층에 한정하지 않고 전체 학생으로 확대하는 것은 과도한 예산의 투입이며, 급식비를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의 제공에 소요되는 예산을 보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투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민투표 등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다수가 결정하게 된다면, 이를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포퓰리즘을 연상시키는 인기영햡적 정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헌법의 근본가치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수결도 무효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노무현 정부 당시의 신임투표 논란의 경우처럼, 헌법이 정하고 있는 가치를 무시하고 다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이려고 할 경우에는 그 위헌성을 확인함으로써 무효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마치 위헌정당해산제도가 도입되었어도, 이를 자주 활용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처럼, 포퓰리즘적 다수의 횡포에 대한 법치국가적 통제의 가능성은 열려 있으되 실제 사용될 필요가 없는 국가가 바람직한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퓰리즘에 의한 혼란이 야기될 소지 자체가 없도록 진정한 민주적 법치국가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