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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8] UN과 한반도 - 대한민국의 건국외교와 UN 인쇄하기
이름 허동현
2013-11-27 10:17:33  |  조회 3544

대한민국의 건국외교와 UN

허동현(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1. 서 론

국민국가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국민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파리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에서 열린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을 얻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 이는 대한제국(1897-1910)이 국민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점과 일제 패망이 다가올 무렵 중경의 임시정부와 이승만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전개한 임정 승인외교가 실패한 사실, 그리고 미국 등 연합국 측의 신탁통치 실시 계획 등에 비추어 볼 때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고의 가치로 하는 통일지상주의사관을 견지하는 한국사학계는 종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근거로 분단 고착화의 주된 책임을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물었기에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한 건국 외교활동도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촉발한 암울한 역사의 개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왔다.

종래 한국사학계에서는 분단 고착화의 주된 원인을 1946년 봄에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와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이승만의 정읍선언에서 찾았다. 그러나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 즉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이 이승만이 귀국하기 이전인 1945년 9월 20일에 내려진 데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남북의 통일을 원치 않았다.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도 겉치레에 불과했다. 남북 분단의 원인은 민족내부 분열 때문도 자치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일제 패망 후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 모두 자국에 적대적인 국가가 한반도에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된 국가의 수립이 불가능했던 것이 당시 국제정치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을 넘어 국공내전 등 주변국가에서 일어난 일들과 강대국 간 국제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본고의 목적은 일국사적 관점을 넘어 국제사적 시야에서 광복 이후 1948년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제3차 유엔총회에서 국제적 승인을 이끌어낸 건국 외교활동을 재조명해 그 역사적 의의를 부각시켜보려는 데 있다.

2. 국제사적 시각에서 본 대한민국의 건국

(1) 소련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당한 김구의 남북협상

일제 강점 하 민족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1919년 3․1운동의 열망은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전략은 두 방향에서 추진됐다.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외교를, 그리고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았던 김구는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려고 했다. 1941년 6월 김구는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방법론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나 우리는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으며, 광복된 조국은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최근의 국제사적 시각에 입각한 연구에 의하면 한반도 분단이 고정화되기 시작한 시점은 19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였으며, 남북 분단에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사건은 1945년부터 1948년 사이에 벌어진 중국의 내전(civil war)이었다. 종래 런던외상회의는 한국 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학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지 않았지만,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됨으로써 한반도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당시 스탈린은 전후의 일본 통치에 참여와 지중해 진출을 위한 아프리카 대륙 북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할양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미국과 영국에 의해 일축되자 동북아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를 중단하고 대결관계로 전환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외상회담 중인 9월 20일 북한에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10월에는 국민당과 연합하라는 종래의 입장을 바꿔 30만 명의 팔로군에게 만주 점령을 지령해 1946년 4월 국공내전을 촉발하였다. 특히 1946년 5월 팔로군이 파죽지세로 국민당군에 밀리자 스탈린은 점령지 북한지역을 후방기지로 팔로군에게 제공함으로써 북한은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聖所(sanctuary)와 같은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 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그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이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2) 이승만이 주도한 유엔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수정주의적 입장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정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이승만과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국의 안보에 직접 관련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방이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5년 8월부터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중국사태의 추이를 보며 소련과의 교섭을 계속하며 현상을 유지하려 한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국민당이 내전에서 공산당에게 패색이 짙어진 1947년 4월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한 달 전인 1947년 3월 미국이 선언한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해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한반도에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5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즉 미국은 단정 수립의 짐을 유엔에 떠넘긴 것이었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즉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1달이 지난 1946년 6월 3일 남한 단정 수립 후 세계 공론에 호소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선언이나, 1946년 12월 미국 방문 시 “소련이 전 조선을 위한 자유정부수립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 명백하므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울 것”을 호소하고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처음으로 제의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데 대한 소련과의 협약을 지킨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단정 수립을 결정한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미국이 한국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정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거나 본국정부가 좌우 연립정권이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을 백지화하려 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고 이것이 한위 대표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하였다. 5월 10일 총선에 의해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에 의해 제정된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닦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정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진 상황에서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당시 고립무원의 섬과 같았던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서두른 이유는 권력욕이 아니라 남한에서라도 40여년간 독립운동을 이끌며 꿈꿔 온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워 국제적 지지를 통해 지키려 했던 데 있었다.

3. 유엔 승인 획득을 위한 주도적 건국 외교

대한민국이 건국 직후인 9월 3일 북한정부가 들어섬으로써 국제적 승인의 획득 여하가 정통성 확보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당시 신생 대한민국은 심각한 안보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48년 말까지 미군을 철군할 것이라는 공식발표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북한은 무력통일로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소련의 지원 하에 급속하게 무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경시하는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4일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은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이는 1948년 9월 21일에서 12월 12일까지 58개 회원국이 모인 가운데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이 밖에도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수석대표 장면이 9월 6일 발급받은 제1호 대한민국외교관여권이 대한제국 시대의 여권을 참조해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이 웅변하듯이, 대표단(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 정치고문 조병옥, 법률고문 전규홍, 경제고문 김우평, 고문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모두 전문적으로 훈련된 외교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직업외교관들을 상대로 국가의 사활이 걸린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교섭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던 우리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저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유엔 총회 개회 하루 전인 9월 20일에야 총회장소인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이 있는 파리에 도착한 대표단이 대한민국 승인의 당위성을 회원국 대표들에게 설득할 수 있던 기간이 3개월도 못될 만큼 짧았던 것도 걸림돌이었다.

셋째,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이들의 외교활동에 장애로 작용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일어난 제주도에서의 무장봉기가 10월초 다시 불붙고, 이의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주둔 14연대가 10월 20일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에 앞서 10월 13일 국회에서는 외군 철퇴안이 동의되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요지의 담화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발송할 만큼 정정(政情)이 극히 혼란스러웠다.

넷째, 대한민국 승인 안건이 소련 대표 비신스키(Andrei Vysinsky)를 비롯한 공산진영의 고의적인 지연작전으로 그 상정이 지연되다가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5일 전인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호주와 인도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12월 6일 정치위원회에서 한국대표 초청 동의안이 가결됨으로써 7일 수석대표 장면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승인해 줄 것을 호소하는 영어연설을 할 수 있었다. 8일에는 한국 독립승인안의 총회 상정이 찬반 41대 6, 기권 2표로 통과되었으며, 12일 총회에서 한국독립안은 찬반 48대 6, 기권 1표로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대한민국 승인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 2차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1947년 장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번(Patrick J. Byrne) 주교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이는 국제 관례상 교황청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이해되어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비오 12세는 제 3차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해 지원할 것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를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소개받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장면은 유엔 호주대표부 대사로서 미소공위 결렬 후 한국문제의 유엔이관을 반대해 온 당시 유엔총회 의장인 호주대표 에밧트(H. V. Evatt)를 설득해 한국승인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지원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복선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전적으로 장면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대표단 성원들의 헌신적 노력이다. “우리대표단은 국운의 장래를 짊어지고 事不成生不還(일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의 철석같은 결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섣불리 모책을 弄하지 않고 오로지 표리일관한 성심성의의 피력으로 유엔 당국 각국대표를 역방하며 아국의 실정을 인식시켜 우호적 贊手 투표를 호소할 뿐이었다”는 장면의 회고가 잘 말해주듯이, 대표단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점은 정치고문 조병옥의 승인에 미온적 입장을 취했던 시리아와 인도에 대한 설득 노력이 웅변한다.

미국의 對 팔레스타인 정책 때문에 약소국인 시리아가 같은 약소국인 한국의 비참한 처지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함은 정의의 국가인 시리아의 취할 의리가 아니라고 약 1시간에 걸쳐 역설했던 것이다. 그리하였더니 이 호소는 功을 奏하여 마침내 그 老翁(시리아대표 엘쿠리)은 동정적 태도를 보이면서 자기나라가 한국문제에 가담할 것은 물론 爾餘의 아랍블럭 說服에 대하여서도 노력을 다하겠다고 언질을 주게 되었다. …인도대표 씽씨에게 ‘귀국 대표는 국비를 쓰고 기권할 목적으로 유엔에 참석했느냐’고 농담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비상한 결심을 한 나는 외교관으로서는 상투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언조와 논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네루씨에게 ‘각하는 한국이 남북의 통일없이 정부를 수립함은 拙策이라고 말했거니와 귀국은 과연 통일이 되어 있는가? 인도, 파키스탄, 세이론으로 삼분되어 있지 않은가’고 말하였더니, 그는 ‘우리는 그 분열을 승인했다’고 대답했다. 승인이라는 말은 영어로 accept이므로 나는 이 말의 꼬리를 잡아 ‘아니요 네루씨 귀국이 분열을 승인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분열정책에 추종(acquiesce)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오. 네루씨 각하도 금일의 분열에 만족치 않을 것이고 장래의 민족통일을 위하여 인도의 부분적 주권을 찾아 정부를 수립한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오. 우리도 소련이 남북통일을 방해하여 우리의 주권회복을 훼방하는 한 우리는 주권을 수립하여 그 주권의 발동으로써 민주진영의 협력을 얻어 최고 최대의 목표인 남북을 통일하려 하는 곳이 우리 한국민의 비장한 결심이거늘 어찌하여 각하는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동정을 아끼느냐’고 신중한 언사와 激越한 감정을 다한 응수를 하였다. …씽씨의 말에 의하면 네루씨는 인도 대표단을 모아놓고 한국독립안에 대하여 기권하지 말 것은 물론 동정투표를 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한다.

셋째, 미국의 지원이다.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는 대한민국이 승인을 획득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로 막전과 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이는 장면의 회고담에 잘 나타난다.

제 3차 국련총회가 개최되고 있는 동안 덜레스씨로 보면 전세계 각처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한국문제에 대하여는 각별한 열성을 가지고 노력하여 한국문제의 제안으로부터 한국대표의 참가결정 북한공산대표 초청안의 부결 토의전술 득표공작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을 줄기차게 해결해 나갔으며 우리 대표단의 활동에 대하여도 세심한 충고와 조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이스라엘 문제로 한국문제의 토의가 지연된 데다가 소련대표를 위시한 공산진영의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한국문제토의에 대한 지연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총회 폐회예정일까지 결정을 못보고 다음 총회로 넘어가게 될 우려가 증대하여 우리 대표단은 여간 애가 타지 않았는데 덜레스씨의 열성과 탁월한 역량이 믿음직하여 우리의 용기를 더욱 붇돋아 주었다. 한국 문제가 최종의제로 상정되어 폐회전일이 되었는데도 결말이 안 나게 되니까 덜레스씨는 당시의 총회 회장인 호주 외상 에바드씨에게 특별 교섭을 하여 야간회의를 열고 새벽 두 시까지 토의를 하였으며 그 다음날 오후 3시에 또 모이게 하여 오후 5시경에 결말을 보았던 것이다.… 이 때에도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이와 같이 수석대표 장면이 거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자들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 전략과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다. 특히 미국과 바티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인도와 아랍진영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은 대표단이 자력으로 일구어 낸 공적이었다.

4. 결 론

본고에서는 국제사적 시야로 대한민국 건국에서 유엔에서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이 면면을 조명해 봄으로써 다음과 같은 점을 究明할 수 있었다.

첫째, 1948년 12월 12일 건국 4개월 만에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은 것은 한 세기 전 국제사회에서 국민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대한제국과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했지만 정부로 승인받지 못한 임시정부, 그리고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 사건이었음을 밝혔다. 1950년 북한이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을 도발했을 때 유엔의 승인을 획득한 것이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70%에 가까운 63개국이 대한민국의 생존을 도울 수 있었던 근거였다.

둘째, 미국이 반공보루 구축을 위해 한국을 분단한 것이 아니라 소련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기지로 북한을 활용하기 위해 런던외상회의가 열리고 있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려 분단을 기정사실화 했으며, 광복 이후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음을 밝혔다. 왜냐하면 중국의 공산화가 명약관화해진 1947년 9월 이후 미국이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통한 해결로 정책을 바꾼 것도 1946년 정읍선언 이래 이를 먼저 제기하고 요구해온 이승만의 전략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전문 외교관이 아닌 대표단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팽창일로를 걷고 있던 공산진영의 저지공각을 뚫고 미온적 입장을 보이고 있던 인도와 아랍진영 회원국의 지지를 이끌어 내 48대 6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유엔의 승인을 얻어낸 것은 미국과 바티칸의 지원에 힘입은 것이지만, 이들의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이들로 대표단을 구성한 이승만의 전략과 장면과 조병옥 등 단원들의 헌신적 노력 때문이었음을 밝혔다.

○ 대한민국 정부가 발행한 외교관 여권 제 1호

: 제 3차 유엔총회에 파견된 대표단이 소지했던 여권에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

당시 일행 중 한 사람인 정일형의 회고. “우리 일행이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을 빠져나갈 때 해프닝이 벌어졌어요. 일행 선두에 섰던 내가 여권을 내밀자 이리저리 뒤적이던 공항 직원이 ‘이 여권을 내게 팔 수 없습니까’고 묻는 거예요. 여권 모양도 다른 나라 것과 다르고 이름 석 자를 붓글씨로 쓴 이 희귀한 여권을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나 그래도 명색이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제 2호인 내 것을 그렇게 보다니 괘씸한 생각마저 들었어요.”

○ 1948년 12월 12일 오후 5시 15분에 실시된 제3차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대한 표결 결과를 정리한 "Voting Check List"

찬성 48개국, 반대 6개국, 기권 1개국의 국명이 정리되어 있음.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제 공한 것임. 이에 관한 장면의 회고.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擧手可決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6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韓國의 恩人) 덜레스씨를 추억한다」 『조선일보』(하), 1959,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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