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韓民國의 빛과 그림자
이영훈(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많은 한국인들에게서 국가는 여전히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도덕 질서로 감각될 뿐이다. 서해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충분히 예상했던 사태였다. 그런데, “대응에 만전을, 그러나 확전은 곤란”이란,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애매한 지령을 내린 대한민국의 수뇌부로부터 아직도 국가경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초라한 도덕군자들을 본다. 언제부턴가 그 점이 한국사의 짙은 그림자였다”(본문 中)
안녕하십니까? 이영훈입니다. 굿 소사이어티 측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을 부여받고 처음엔 막연했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역사가 어느 시점에서 성공을 거두면 성공을 가능케 한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고 또 성공을 이루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실패를 예비하는 과정이 또 진행되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역사란 실패와 성공의 복합적인 과정이고 그 미묘함을 성찰하는 것이 한 지성사회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제 전공은 경제사입니다만 경제사를 전공하다보니 한국 전통사회의 구조에 대해 관심 갖게 몇 편의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고로 오늘날 한국인들이 건전하고 강건한 공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못한 가운데 사회와 정치에서 일상적인 분열과 대립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점이 오늘날 한국의 그림자를 이루고 있다는 취지의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준비해 온 원고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2010년 세모에 한국인들은 그들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서 차지하는 높은 위상에 한껏 고무되어 있는 듯하다. 성공리에 마무리된 G20회의,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의 높은 성적 등이 그 호재이다. 한국인들의 성취감은 한 때 그들을 식민지로 지배한 일본과의 경쟁적 비교에서 두드러진다. 삼성이 이미 소니를 제치지 않았던가. 머잖아 현대자동차가 토요타를 따라 잡을 지도 몰라. 이처럼 한국인들을 우쭐대게 하는 대한민국의 커다란 성취는 역사적으로 한국인에 축적된 인적 자본이 우수하다는 점, 人間自由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국가체제가 성립하고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경제제도가 잘 정비되어 그러한 성장의 잠재력을 한껏 실현하였다는 점, 종종 간과되고 있지만 국제정치와 국제시장의 환경이 한국인들의 성취에 특별히 우호적이었다는 점 등을 그 원인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조건들은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에 걸쳐 유효할 것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앞날은 빛처럼 밝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성공은 실패를 胚胎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 지속적인 성취를 위해서는 이 같은 歷史의 複合性을 성찰할 수 있는 知性이 요구된다.
大韓民國이 앞으로 실패한다면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많은 한국인들이 이미 예감하고 있듯이, 한국 政治와 社會의 분열 바로 그것일 터이다. 한국인들이 크게 분열해 있음은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대립, 예컨대 쇠고기파동, 4대강사업, 천안함사건 등을 둘러싸고 극명하게 노출되었다. 2008년의 建國60周年 기념을 둘러싼 歷史인식의 분열도 이들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요컨대 대립과 분열은 공공선택의 좌향 내지 우향을 둘러싼 정책의 수준이라기보다 이 국가와 사회의 歷史的 유래를 둘러싼 존재론적 갈등이기도 한 것이다. 분열의 그러한 속성은 北韓體制에 대한 평가와 統一의 전망ㆍ방안에서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분열은 한국인들이 역사적으로 튼튼한 公의 世界를 건설하고 공유한 경험이 일천하다는 제약조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간들이 그들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상호 신뢰하고 협조하는 원리나 형태는, 리차드 도킨스가 그의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발적으로 제기한 ‘문화적 유전자’와 같은 것이어서, 그냥 방치한다면 짧아도 2백년의 세월을 경과하지 않고서는 볼만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 영역일 수 있다. 그러한 이른바 ‘長期’ 내지 ‘構造’의 시간 영역에서 現代 韓國은 19세기까지의 그들의 傳統社會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역사적 성찰은 21세기 오늘날을 복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여러 층위의 時間性들을 구분해 내고, 현대 한국의 모순이 기인하는 시간성의 역사적 주소를 구명하는 작업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그 점에서 현대 한국의 제반 역사적 社會科學은 극히 유치한 지적 수준을 보이고 있다. 지성사회가 유치해서는 그 나라가 세계를 리드하는 선진국의 반열에 끼일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까지의 한국인들은 어떠한 원리와 형태의 公의 세계를 구축하였던가. 서유럽이나 일본의 전통사회가 좋은 예를 보이고 있는, 정치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잘 뭉쳐진 민간단체가 발달했던 사회는 아니었다. 18세기까지 商人과 手工業者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인들의 단체는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지방에서 그 조직과 활동이 관찰되는데, 단체 결성의 기본 취지는 상장례(喪葬禮)의 상호부조에 있었다. 곧 양반사회에 국한되던 유교적 禮의 질서가 하층의 상인사회에까지 침투한 것이다. 단체의 기본 취지가 그러했던 이상, 상인단체는 크게 말해 국가질서의 일환으로 존재하였다. 단체의 결성은 수령의 인가를 필요로 하였고, 그것은 단체가 존속하는 권위의 기초가 되었다. 단체를 지지하는 특권은 성립하지 않았고, 가입과 탈퇴의 기회는 열려 있었다. 19세기말 동학농민봉기를 맞아 또는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에 맞서 보부상 단체가 기존의 王朝體制를 수호하는 친위부대로 동원되었던 것은 단체의 이 같은 속성 때문이었다.
흔히들 오해하고 있지만, 마을과 촌락도 잘 뭉쳐진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마을이라 함은 인간들이 거주하는 空間의 구획일 뿐이었다. 인간들의 경제생활과 사회생활에 불가결한 치안, 수리, 營林, 교육, 도로, 축제 등의 공공재를 공동으로 생산하거나 그에 필요한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단체 내지 법인격으로서 마을은 아니었다. 그러한 공공재는 마을 내외에 걸쳐 다양한 층위와 범위에서 결성된, 중심이 각기 상이하게 배치된, 契에 의해 공급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전통사회의 특질을 두고 ‘多層異心’의 사회라고 그 유형적 특질을 규정한 적이 있다.
사회조직의 이 같은 특질로 인해 사회가 갈등기에 접어든 19세기 이후 마을은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세기말 전국적으로 3만 9천이었던 마을의 수가 20세기 초까지 6만 3천으로 증가하였다. 1913년 총독부는 그 마을을 2만 3천으로 통폐합하였다. 들어선지 불과 3년의 외래권력이 원주민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주거공간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던 것은 마을이 자기 재산과 인격으로 영속하는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치안, 수리, 영림, 교육, 도로 등의 온갖 공공영역이 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 질서에 흡수되었다. 민간사회에 남겨진 자율적 질서는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족계(族契) 정도에 국한되었다.
이처럼 公의 질서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직능과 지연에 기초를 둔 민간단체가 상대적으로 결여된 가운데 한국인들이 감각한 공의 세계는 두드러지게 도덕적이었다. 조선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公은 公理로서 인간사회와 자연을 생성하는 기초 원리에 해당하였다. 반면 私라 함은 私氣 내지 私慾으로써 어디까지나 공리에 의해 억제되고 순치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렇게 19세기까지 조선왕조 시대에 公과 私는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이른바 以公滅私의 관계였다. 조선성리학의 교의에서 인간 욕망의 자연성에 바탕을 둔 개체로서 私[個私]의 존재는 끝까지 긍정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공은 도덕적으로 성취를 이룬 君子, 곧 양반관료나 선비들 가리켰다. 19세기까지 한국사회는 個私가 미성립인 가운데 무수한 小公들이 분립하는 구조였다.
이 같은 사회구조의 특질은 公이란 말이 현실의 사회생활에서 쓰인 용례에서도 분명하게 관찰된다. 예컨대 정약용의 『牧民心書』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3부로 이루어져 있다. 임금에 의해 수령에 임명된 자가 임지에 도착하는 것[부임]부터 임지를 떠날 것[해관]까지 마음에 두고 행할 바를 위와 같이 나열한 것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그 모두가 奉公이다.
가령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는 것은 ‘호전’의 일이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진황’의 일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일이 공직자가 성의를 다해 수행할 직무로서 봉공의 대상이다. 그런데 정약용이 열세 가지의 하나로 나열한 봉공은 수령이 임금의 명을 忠로 받들고, 상사인 관찰사를 誠으로 섬기고, 이웃 고을의 수령과 友愛함을 말하였다. 곧 公의 영역은 양반관료 사회로 국한되며 거기서 수령이 취할 올바른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가리켜 奉公이라 하였다.
이러한 公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그에 의해 지지된 전통사회가 20세기를 경과하면서 어떠한 구조적 변환을 겪었는지는 막상 그에 대해 관심을 기울어야 할 현대 한국의 철학이나 사회학 등이 그에 대해 더 없이 무심하기 때문에 참고할만한 연구가 별로 없다. 몇 가지 산발적인 개인적 성과를 종합할 때 다음과 같은 지적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한 가지는 ‘多層異心’의 사회가 불안정하게나마 생산하던 여러 층위의 공공재가 총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 질서로 흡수됨에 따라 고도로 중앙집권적 구조의 사회와 정치가 성립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강한 국가’와 ‘약한 사회’라는 대한민국의 구조는 그 과정에서 확정되었다. 다른 한 가지는 인간들의 사회관계를 규율하던 조선성리학의 禮의 질서가 마땅한 대안도 없이 해체됨에 따라서 사회조직에서는 물론 사회철학에서도 커다란 공백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공백은 자연스럽게 다른 무엇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인들이 日帝의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民族’이라는 공동체의식이었다. 원래 조선성리학의 정신세계에서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역사적 추이로 빚어진 1950년대 한국사회의 실태가 어떠했는지는 당시 몇몇 사회학자들이 행한 농촌조사에서 잘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농촌의 사회조직은 면사무소와 같은 관료제적 행정기구, 가입이 거의 강제된 자유당의 지방조직, 그리고 상장례의 상호부조를 위한 族契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 외에 교회, 師親會, 4H클럽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참여자나 활동의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도시에는 상공회의소나 방직협회와 같은 상공인들의 단체가 존재했지만, 그것은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준관료기구이거나 동업자들의 대정부 로비 창구일 뿐이었다. 동업자들이 자율적으로 경쟁행위를 규율하거나 공동으로 판로를 개척하는 등, 공동의 이익과 규범으로 잘 뭉쳐진, 꽉 쥐어진 손과도 같은, 단체는 아니었다.
1950년대에 미대사관의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는 이 같은 한국의 사회조직과 그에 규정된 정치행태를 적실하게 묘사한, 지금도 그 학술적 의의가 드높은, 名著이다. 비록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한 책이지만, 누구든 한국 사회의 역사적 특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은 꼭 읽어야할 명저이다. 헨더슨은 조선왕조 이래의 한국사회에 대해 “촌락과 왕권 사이에 강력한 제도나 자발적 단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그래서 “전형적으로 원자화된 개체에 의해 구성되고, 개체 상호의 관계는 주로 국가권력에 대한 관계로 규정”되는, “비정형적 대중과 사회적 제관계에 있어서 고독을 특색으로 하는” ‘대중사회’로 파악하였다.
이 ‘대중사회’가 실현하는 정치행태는, 헨더슨의 관찰에 의하면, 제반 중간단체의 결여로 인해 중앙정치가 말단의 원자화된 개체를 직접 동원하는 ‘소용돌이’인 가운데, ‘소용돌이’의 核 그 자체는 몇몇 유력 정치인의 개인적 권위와 명망을 公의 명분으로 하여 다양한 인연을 좇아 집결하는 정치단체 상호간의 지속적인 분열과 대립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었다. 즉, 특정한 이념을 두고 하나의 정치단체가 구성되기보다 유력한 명망가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1950년대까지의 사회조직과 정치행태를 전제한다면, 오늘날 한국인들을 고무시키는 대한민국의 특별한 성취를 가능케 한 역사적 조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앞서 거론한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 곧 인간자유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국가체제와 경제제도의 성립, 특별히 우호적이었던 국제정치와 국제시장의 환경은 한국사회가 그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한 정치적 합의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자유에 대해 종교적인 신념을 가졌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한 건국의 주체들이 내외의 온갖 장애를 돌파하면서 강렬하게 추구했던 선택에 다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이후 자유무역주의를 기본 동력으로 하여 세계경제가 고성장의 경주에 들어섰을 때, 수출주도공업화의 개방체제로 개발전략을 기민하게 수정한 것도 한국사회가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도출한 합의는 아니었다. 돌이키건대 박정희 대통령이 그 첫 관문인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열고자 했을 때 민족의 자존심을 운위하면서 大學을 위시한 당대의 지성사회는 얼마나 격렬하게 저항하였던가.
요컨대 오늘날 大韓民國을 빛 좋은 陽地에 놓게 한 것은 한국인들이 추구할 역사적 방향과 선택에 대해 남다른 성찰의 능력을 가졌던 정치적 리더십이 운 좋게도 소용돌이의 核을 장악하였던 건국의 초기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른바 권위주의 내지 개발독재라는 그림자가 조성되었다. 그 그림자는 한국의 사회조직과 정치양태 그 속에 배태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자가 된 것은 그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가 추진한 이른바 ‘조국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형성과 집행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측면도 강하다. 예컨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처리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정치 및 사회 지도자들은 한사코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야당과의 원만한 대화와 협상이 어려워지고, 상호 불신이 깊어졌다. 이른바 개발독재는 그러한 과정에서 초래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권위주의든 개발독재든 그것들은 ‘건국’ 또는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당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조직과 정치양태가 그 고유한 모순으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던 비용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빛 좋은 양지는 그러한 역사의 그림자가 있었기에 마련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양지를 가능케 한 과거의 그림자를 그림자로만 알고 비난함으로써 역사의 성취가 어떠한 비용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능력을 결여한 한국의 정치나 지성, 그 자체라고 하겠다. 그것은 새로운 전진을 위해서는 어떠한 리더십이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지에 대한 몰이해로 귀결되기 십상이라, 또 하나의 실패를 예비하는 첫걸음이기도 한 것이다. 앞서 성공은 실패를 배태하는 과정이라 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커다란 성취는 한국의 사회를 보다 문명화된 형태로 바꾸었음이 분명하다. 사회학자 뒤르켕의 표현을 빌리면 한 사회가 보다 촘촘하게 자율적 제관계로 짜인 유기체로 진화하였다. 企業, 敎會, 友愛團體 등,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사회의 영역은 많이도 넓어졌다. 그렇지만 반세기의 짧은 기간에 한국인들이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유전자’에서 너무 많은 진화를 기대하기는 무리이다. 한국인들은 너무나 즐겨 중앙정치의 ‘소용돌이’에 자신의 몸을 던지고 있다. 중앙정치는 너무나 비생산적인 논쟁으로 날을 새고 있으며, 그에 따라 그에 몰입하고 있는 지역과 인간들을 더 큰 대립과 분열로 이끌고 있다. 한국인들은 아직 그들의 정신세계와 사회ㆍ정치생활을 하나의 큰 그릇으로 결속하는 公의 世界를 결여하고 있는 편이다.
한국인들이 아직 커다란 공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서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는 국가창설의 기본 원리에 대한 신앙이 엷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유럽 계몽주의에서, 미국혁명에서 최초의 정치적 결실을 본 이 같은 정신세계는 자연과 인간사회의 질서감각이랄까 종교랄까 해도 좋을 문화적 배경이 원래 상이한 탓에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서 주변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북한체제가 빚어내고 있는 극심한 반인권의 참상이 국내에 전해져도 그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공분을 좀처럼 관찰하기 힘든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몇 년 전에 요덕수용소라는 뮤지컬 드라마가 공연된 적이 있는데 결국은 수지를 맞추지 못해 장기간의 공연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북한 인권에 근본적으로 무심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명성황후 같은 뮤지컬은 외국에도 진출하고 상업적으로 성공도 했다. 그녀가 나라가 망해가는 그 시대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만큼 황동무계한 역사의 조작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뮤지컬은 보기 좋게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의 반일 민족주의 감정이 그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다.
타인의 노예상태에 대해 분노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라고 해야 온당할 것이다. 한국 사람은 자유인인 것처럼 보여도 정신 상태에서 자유인이 아니다.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 이념에 바탕을 둔 공의 세계를 건설하고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한국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보다 넓은 정신세계는 명성황후 뮤지컬이 잘 이야기하고 있듯이 다름 아닌 ‘民族’이다.
지난 20세기의 시련기에 한국인들이 새롭게 발견한 그 ‘민족’으로부터 온갖 형태의 집단적 생존윤리를 표방하는 개념이나 구호가 파생하고 있다. ‘民衆’, ‘民生’, ‘民族經濟’, ‘우리 민족끼리’ 등등. 이런 파생적 개념들은 쉽게 정의되지 않은 모호함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소리 높여 외쳐질수록 인간사회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넣는다.
한국인들이 넓은 공의 세계를 결여하고 있는 가장 좋은 예를 찾자면 국가의 본질이 인간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적 폭력체이며, 외부의 적대세력에 대해서는 강인한 軍國의 主體임을(좋은 의미의 군국!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 이해하지 못함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에게서 국가는 여전히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도덕 질서로 감각될 뿐이다. 그래서 자국의 군함이 적대세력의 기습으로 침몰하여도, 정치지도자들이 격침이니 자폭이니 어불성설의 논쟁을 벌이거나, 그 소용돌이에 편성하여 국민의 상당수가 잔뜩 분열하는 일이 버릇처럼 되풀이 되고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참에 적대세력으로부터 또 한 번의 군사적 공격이 있어 서해 연평도에 수백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충분히 예상했던 사태였다. 그런데, “대응에 만전을, 그러나 확전은 곤란”이란, 자신도 잘 알지 못할 애매한 지령을 내린 대한민국의 수뇌부로부터 아직도 국가경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초라한 도덕군자들을 본다. 언제부턴가 그 점이 한국사의 짙은 그림자였다.
--------------------- 질의와 응답 -----------------
□ 질의 :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의 전통사회는 굉장히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하다고 합니다. 두레나 품앗이 같은 농촌사회의 미풍양속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전통사회에 있어서 공 개념의 결여를 주장하시는데,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과 배치되는 것은 아닌지요? 선생님께서는 생각하고 계시는 공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는 사회란 어떤 것이지요,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 답변 : 우리의 전통사회나 전통문화가 강한 공동체 조직이나 정신을 특징으로 한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해 저는 그것이 상당 부분 지난 한 세대에 걸쳐 한국의 민족주의가 빚어낸 역사의 미화라고 봅니다.
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의 일입니다. 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전국의 3-4만 개 마을의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건전한 리더십이 있는 마을은 25%가 못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다수의 마을에서는 리더쉽이 아예 없거나 불충분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의 마을들이 일반적으로 잘 단합된 공동체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통계를 봐서도 이야기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리더십이 건전하게 작동한 마을을 대체로 동족부락입니다. 종가를 중심으로 강한 친족 결합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친족 결합이 어떠한 내용인지를 조사한 연구가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 유명한 동족부락의 친족조직은 기본적으로 조상을 모시는 위선(爲先) 사업을 위한 조직이었습니다. 문중의 재산을 조성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족보를 편찬하고 비석을 세우고 제각을 짓고 시제를 지냈습니다. 그런 위선사업에 문중재산의 대부분의 수입을 투여했습니다. 가난한 족원들을 위한 생계비 보조나 공동사업을 위한 지출은 거의 없었습니다. 최근 각 문중마다 문중의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곤 합니다만, 그것은 문중의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라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지 예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건전한 공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지 못한 것은 비단 정치만의 일도 아닙니다. 그에 따른 갈등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의 경우, 여러 학회에 가입하고 활동하고 또 여러 학회의 창설에 간여해 왔습니다만, 지도부를 이루는 유력한 교수들조차 공과 사에 혼란을 일으키는 일을 여러 차례 경험해 왔습니다. 지적을 해 줘도 시정하지 않으니까 몇몇 학회에는 요사이 아예 발걸음을 끊었습니다.
공 개념이 강하게 존재하는 나라의 예를 물어셨는데요, 오늘날의 선진국들이 그러한 나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트러스트』라는 책이 좋은 예를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자발적 민간단체가 상대적으로 결여된 저신뢰의 사회입니다. 반면 일본이나 서유럽의 선진사회는 자발적 민간단체의 오랜 역사 위에 사회적 신뢰의 규범이나 제도가 두텁게 축적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한 사회가 선진국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이 같은 문화 수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김인섭 이사장 : 우리 국민은 우리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거기서 우리란 말에는 국가나 국민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연고관계가 있는 사람들(예컨대 근친, 동창, 한 고향, 기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교수님의 말씀대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족벌 같은 연고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사회공동체 전체의 가치(공화주의적 가치)를 의미하는 ‘우리’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공화주의적 가치(공익)를 조성보존하기 위한 사회공동체의 연대책임의식 (협동단결력)이 아주 부족하고 미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부 집단 이기주의 아니면 개인 이기주의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으려면 공 개념의 인프라가 쌓여야 하는데 국민의 이점에 대한 이해와 연대책임감이 안 되고 있습니다. 바로 절제되지 않은 과잉자유와 집단 이기주의등 한국적 연고주의 때문입니다. 법치주의 운동을 하면서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연고주의 문화가 제도상의 법치주의가 현실에 있어서는 제대로 잘 작동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민주주의 성숙한 운영이 되지 못하고 있는것도 같은 맥락에 봐야 할 것입니다. 또 부정부패와 불신풍조같은 것이 만연된 것도 다 같은 연유에서 생긴 것입니다.
□ 질의 :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면 우리나라의 공적 영역이 약하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엄청난 성공을 이뤘는데 그 원인을 이승만, 박정희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설명하셨는데 그 외에 다른 원인들은 무엇이 있었는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또 6.25 전쟁 당시 학도병이 적극적으로 싸웠던 것이나, 새마을운동을 통해 보면 굉장히 공적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한편으로 공동체의 비젼과 통합을 위해선 이 비젼을 제시하는 리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 들 중 운동권 출신이 많습니다. 그런데 운동권 출신의 활동 스타일이 투쟁하고, 선동하고, 경쟁하고, 갈등하고, 분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4.19때 민주주의에 비하면 요새 민주주의는 더 분열과 갈등이 많은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 나옵니다. 요새 지도자들 가운데 운동권 출신이 너무 많습니다. 현 정부에도 4.19동기나 6.3동기 같은 것이 정치권 내외부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교수님께서는 이런 리더십 충원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답변 : 새마을 운동을 얘기하셨는데, 거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께서 국민들로부터 정치적 협조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소재는 민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민족의 중흥을 이야기 했고 거기에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동참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민족과 국가가 구분되지 않은 채 혼연일체가 되어 근대화를 위한 국가적 통합을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80년대 이후가 되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과 역할이 통일운동으로 변질되어 결국 국가와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초래하는 소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건전히 작동하려면 건전한 리더십이 생산되는 매커니즘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공감입니다. 오늘날 중국의 경우는 강건한 리더십 창출하는 공산당이라는 나름의 시스템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우수한 대학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린턴, 오바마와 같은 약관 40대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그런 훌륭한 인재들은 전적으로 미국의 우수한 대학교육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의 미래를 담당할 훌륭한 리더쉽도 결국 우수한 대학교육 밖에 방법이 없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굉장히 문제가 많습니다. 너무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저는 그 해결책으로 정부가 당분간 대학에, 특히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분야에, 지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의 대립과 분열의 책임은 앞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음을 지적했습니다만, 상당 부분 대학에 책임이 있습니다. 이 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쇠고기파동, 4대강사업, 천안함사건을 둘러싼 정치사회의 갈등도 상당 부분 대학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사태에 대학사회가 책임 있게 발언할 능력이 없는 것이죠.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민족주의라는 집단 정서로부터 대학이 자유롭지 않게 때문입니다. 한국의 역사적 사회과학은 아직도 자유라는 이념이나 가치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유의 최후의 보루로서 국가가 무엇인지, 이 국가가 어디서 유래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이면서 책임 있는 사고를 하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정부가 매년 수 천 억의 예산을 대학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투여하고 있는데, 잘못 되었다고 봅니다. 바탕이 잘못되었는데, 지원을 계속하면 왜곡은 더욱 심화됩니다. 지원을 중단한 채 대학이 스스로 올바른 길을 모색하도록 장기간 그냥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한국의 미래를 새롭게 여는 통합적이며 창의적인 리더쉽을 양성할 수 있는 대학교육의 바탕이 서서히 마련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