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가시고기는
물이 맑은 하천의 물풀이 많은 곳에서 삽니다. 번식기가 되면 수초 줄기와 잎으로 집을 만들고 암컷을
부릅니다. 암컷이 다가와 사랑을 나누고 알을 낳은 후 암컷은 그냥 떠나 버립니다. 수컷은 알을 지키면서 다른 암컷이 다가오면 쫓아버립니다. 가슴 지느러미를
계속 움직여 깨끗한 물을 공급하다가 열흘쯤 지나 알이 깨어나 둥지를 떠날 즈음 수컷은 탈진상태가 되어 죽습니다.
백혈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한 아버지의 눈물겨운 부성애를 그린 ‘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 는 부성애 강한 가시고기를 모델로
하여 우리들의 가정에서 늘 침묵 속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사랑과 희생을 주제로 우리가 꿈꾸었던 영원한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평양 연안에 동갈돔과에 속하는 어떤 바닷고기가 있습니다. 이 어종은 암놈이 알을 낳으면
숫놈이 그 알을 입에 담아 부화시킵니다. 입에 알을 담고 있는 동안 수컷은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
점점 쇠약해지고 급기야 알들이 부화하는 시점에는 기력을 다 잃어 죽고 맙니다. 숫놈은 죽음이 두려우면
입 안에 있는 알들을 그냥 뱉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숫놈은
죽음을 뛰어넘는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 땅에는 ‘아버지’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누구 하나 위로해주지 않는 그 무거운 자리.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어깨를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어깨가 축 처진 아버지의 뒷 모습이 눈에 들어 오던
날, 비로소 조금, 아주 조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백혈병에 걸린 어린 아들의 골수이식 수술비를 감당하려 신장을 팔려다 간암 말기 환자인 것을 알게 되어 실패하자 자신의 각막을 팔아
아들 골수 이식수술비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 아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기 위해
이혼한 아내에게 아들을 보냅니다. 소설 ‘가시고기’의 줄거리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은 좀 다르게 표현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자식의 고통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다른 자식들에게는 다시 희망입니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죽음을 앞두고 예수는 겟세마니 언덕에서 이같이 절규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아버지에게 삶을 간청하지만 곧바로 신의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생명을 맡기는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 순명을 보입니다. 2000년 전에 보여지는 효성 지극한 신의 아들의
모습입니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拘 聖人不仁 以百姓爲芻拘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하늘과 땅은 무심하여 만물을 보살피지 않는다.
성인은 무심하여 사람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도덕경,
5장>.
노자는 "천지는 만물을 가만히 놓아두고, 성인은 사람들을
가만히 놓아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치를 아는 사람은
가만히 놓아두는 게 자녀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자가 '성인이 무심하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가만히 놓아 둔다는 것은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절대적인 신뢰이자 사랑입니다.
성철스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이미 완전하므로 아무 것도 분별된 마음으로 행하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파울로(바오로, 바울)는 로마서 11장33절에서
“ 오!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은 깊고 심오합니다. 누가 그
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 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영광은 깊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깊음이 소멸되어 가고 있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불과 1 세대 전까지만 해도 부모에
대한 공경과 복종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였습니다. 2 세대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또는 부모)의 산소 옆에서 오두막을 짓고 3년 상을 지내는 일도 거의 의무이자 또한 효자의 표상이었습니다. 요즘에
들어와 아버지의 존재는 그 위상이 비참할 정도로 추락했습니다. 특히 아들과 아버지의 입장은 오히려 역전되기까지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눈치를 보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와 피조물인 인간 아들의 관계는 대양과 해수면의 파도와 같습니다. 또한 거대한
무의식과, 일상을 움직이는 표면 의식과의 관계와도 같습니다. 佛家에서
말하는 선(善)은 분별하지 않는 마음, 즉 무심한 상태를 말합니다. 바다 표면에서는 태풍이 몰아치고 격랑이
일어도 대양의 심연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일상의 의식은 끊임없이 생각의 파도를 만들어 내지만 내면의
무의식은 역시 고요하고 무심하기만 합니다.
새끼 가시고기들이 애비의 고난과 희생을 알아줄까요? 가시고기의 부성애는 '주는 것’으로 이미 만족하고, 더 이상 바라지 않기 때문에 새끼
가시고기가 어떻게 하든 무심할 것입니다.
옛 소련의 철학적인 영화감독이었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가 말합니다. “이 세상이 살 만하다면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등 굽은 아버지의 어깨가 유난히 왜소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슬픔에 앞서 아버지의 무심이
하느님을 닮은 깊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